신마을탐방[13] 동이면 평촌리-시장터, 성골
신마을탐방[13] 동이면 평촌리-시장터, 성골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1.01.13 00:00
  • 호수 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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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한 것이 마을 형성 계기가 된 시장터(위)와 서원골이라 불리웠던 성골(아래).
이름만 남아 버린 `시장터'
총 26가구가 거주하는 시장터는 평촌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인 동시에 면사무소를 비롯해 보건지소, 농협 등이 위치해 동이면 행정민원처리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불과 40여 년 전이다. 지난 1964년 이곳에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한 것이 마을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들미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이전하고 시장터를 닦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옥천장과 이원장, 보은장 등에 밀려 몇 개월 시장이 운영되다 지금은 시장터란 이름만 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1936년 4월에 개교해 올해로 개교 66주년을 맞이하는 동이초등학교는 동이면 주민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동시에 많은 추억을 안겨주고 있다.

총 25가구, 다른 마을과 달리 각성바지
이곳 시장터는 새로 생성된 마을인 만큼 평촌에 거주하는 대다수 주민이 성주이씨인데 반해 7가구의 성주이씨를 제외하면 곽씨, 김씨, 오씨 등 모두 각기 다른 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25가구가 거주하고 있지만 시장터가 생성되기 전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은 2가구에 불과했다. 25가구 중 대다수 주민들은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며 포도 재배 농가가 2가구, 가게나 식당을 운영하는 주민이 6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주민들 추억 담긴 동이초 운동장의 `플라타너스'
동이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60년 된 플라타너스는 평촌리 주민뿐만 아니라 동이면민들의 추억이 가장 많이 담겨져 있다.

1936년 동이초등학교가 개교한 후 모두 5그루의 나무가 심어졌으나 2그루는 베어졌고 남은 3그루가 함께 자란 플라타너스는 그 그늘이 동쪽 운동장을 덮을 정도로 넓어 한 여름 학생들에게는 더위를 피하게 해주고,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도 활용되고 있다.

성골, 본래 이름은 `서원골
지금은 성골이라 부르지만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서원골이라고 전해진다. 부산에서부터 서울에 이르는 길목이기도 한 이곳은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서원과 이와 관련된 건물이 지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서울로 향하는 길이 남아 있으며 그 중간엔 과거에 임하던 선비들이 합격을 기원하는 성황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서원이 자리잡고 있던 장소에서는 놋그릇과 기와가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

옥천 최초의 사설교육기관 `쌍봉서원' 임진왜란 당시 후기 의병 본부로
임진왜란 당시 조헌 선생의 참모로 활동하며 이충범 선생과 의병활동을 전개한 고암 정 립 선생의 문집에는 이곳 성골에 옥천지역에서는 최초로 사설교육기관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서원의 이름은 `쌍봉서원'으로 1571년 선조 4년에 당시 서희여 군수와 유림들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향토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정수병씨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송정 전팽련선생과 탄암 곽시, 충의공 김문기 선생 등 3현을 위패로 봉안하고 있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다음해인 1593년 불에 타 없어졌다"고 전한다.

또 "왜군의 방화로 재로 변한 `쌍봉서원'에는 전씨, 곽씨의 문집과 저서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이곳은 의병들의 집결지인 동시에 본부역할을 담당했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쌍봉서원이 우리고장 의병들의 본부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과 관련해 정 립 선생이 남긴 고암문집에서는 "조헌 선생이 금산에서 패한 후 옥천을 지킬 의병이 없게되자 이충범 선생은 쌍봉서원을 본부로 의병을 모집, 하룻밤에 350명의 의병을 모을 수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순수한 주민은 2가구, 화학공장과 플라스틱 공장 들어서
이곳 성골에 거주하는 8가구 중 순수한 주민은 3가구에 지나지 않는다. 2가구가 벼농사를 짓고 있고 지난 74년부터 성골에 거주하며 현재 밤 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종학(80)씨가 저온창고를 운영하며 마을사람들에게 무료로 대여해주는 등 선행을 베풀고 있다. 이밖에 외지에서 들어온 화학공장과 플라스틱공장, 기계제조공장 등이 성골에 자리잡고 있다.

보도연맹 사건의 참상지, 97년 참혹상 보여준 유골 발견
지난 1997년 7월, 평촌마을 성골에 내린 비로 6.25 전쟁 당시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의 유골이 도로변에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골을 발견한 이종학(80)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비로 인해 무너져 내린 흙이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덮자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유골이 발견했다"며 "유골과 함께 주위에는 처형당시 이들을 묶었던 것으로 보이는 전선줄이 아직도 매듭을 한 채 같이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이로써 6.25 전쟁 발발 후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살해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억울한 죽음과 참혹했던 실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보도연맹은 해방 후 좌우의 사상대립 속에서 1949년 자유당 정부에 의해 좌익의 전력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교육시키고 사회적인 안정을 기한다는 명분으로 조직되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행동이나 뜻과는 전혀 달리 사상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반 농민이나 교사 등에 이르기까지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유골을 발견한 이씨도 6.25 당시 보도연맹원들을 차에 싣고와 이곳에서 처형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하며 "당시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도 행방불명되었고 우리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발견된 유골은 모두 수습돼 1997년 7월 15일 군서면 월전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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