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우체국 집배원 신성근씨
옥천우체국 집배원 신성근씨
함께사는 세상 [18]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1.06 00:00
  • 호수 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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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젊은이들, 연애편지도 안쓰면서 어떻게 연애 하는지 모르겠어..." 세상이 바뀌면서 마음이 담긴 편지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신성근씨는 못내 아쉬워한다.
연말과 새해가 되면 대문 앞에 수북히(?) 쌓였던 카드와 연하장을 기억하기가 어렵지 않다.

지금이야 이메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배원이 가져다주는 카드와 연하장의 양으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뒤돌아보기도 했고 잊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더듬었다.

그래서인지 연말과 연초가 되면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이 바로 집배원이었다. 이 세상 가방 중에 제일 클 것이라 생각했던 커다란 우편가방을 메고 동네 골목길을 지나던 집배원 아저씨는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해 주던 든든한 다리였다.

2001년 지금, 집배원 아저씨의 무거운 가방도 줄지 않고 자전거는 더욱 기동성이 향상된 오토바이로 바뀌었지만 더이상 집배원 아저씨들이 그때 같지만은 않다.

▶찬밥 신세 되어버린 우편물
옥천우체국에 근무하고 있는 집배원 신성근(56)씨가 우편 배달을 시작한 것은 우표요금이 20원 할 때부터다. 물가억제를 고려해 인상폭이 최소화된 상황에서 오른 우편 요금이 지금 170원인 것을 생각하면 그가 우편물과 함께 한 시간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신성근씨는 대전에서 학원을 다니며 통신기술을 배워 `통신사'(모르스부호를 이용한 통신업무)로 우체국에서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집배원'으로의 전직을 권유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68년 4월1일, 지금은 청산면과 통합된 청성우체국에서 집배원 생활을 시작해 벌써 경력 3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옥천에서 현직에 있는 집배원 중에 내가 제일 오래됐을 거야. 짧은 시간은 아니지. 그래도 한 우물을 팠다는 것이 후회되지는 않아. 오히려 재미있고 보람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직업이었으니까."

그의 얘기대로 군대간 아들의 옷가지나 소지품이 들어있는 소포꾸러미와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의 소식을 한아름 안고 동네를 찾던 집배원은 언제나 대 환영이었다. 그러나 80년대가 지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우편물이 차지하는 위치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환영을 받던 집배원의 위치와 역할도 함께 평가절하 되어 버렸다.

"지금 우편물 가져가도 누가 반가워 하나. 아파트 우편함에 우편물이 먼지가 쌓일 때까지 그냥 있지."

그는 이런 현상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전화와 인터넷 이메일이 편지를 대신하기 시작했고,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부터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렇게 `따뜻했던 편지'를 다른 문명의 이기들이 대신하면 우편물이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로 업무는 더욱 늘었다. 과거에는 없던 수많은 행정우편과 납입고지서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결국 요즘 배달되는 우편물이래야 대부분 `돈 내라는 고지서'일 뿐 반가운 우편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그가 생각한 `찬밥신세'가 되어버린 이유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신씨가 생각해 낸 반가운 우편물도 있었다.
"아! 반가워하는 우편물이 있긴 하지. 사람들이 신용카드 발급되는 날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모르겠어. 새로 발급된 카드를 들고 찾아가면 얼른 도장 찾아서 갖다주고 표정도 반가움이 가득하지...(웃음)"

▶인심 좋았던 옛날이 좋았지...
지금은 `집배원' 생활을 하면서 `직업'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인심 좋았던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던 생활이었다고 신씨는 회고한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월남전쟁이 한창일 때 전사한 군인의 유골이 소포로 배달되었어. 그걸 전달하고 나서 슬퍼하는 그 군인의 어머니를 보니까 내가 꼭 이런 일을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하지만 그때 말고는 특별히 집배원 생활이 지겹다거나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시골 마을에 들어서 마을 어귀에 자전거를 세우면 벌써 주민들이 몰려들어 자기 우편물 챙겨갈 만큼 언제나 환영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집배원들은 그런 기분 모를 껄. 시골에 들어가면 점심걱정은 안 했어. 서로 집에 밥 차려 놨다고 밥 먹고 가라고 하고 심지어는 집에 아무도 없는데 점심 준비해 놨으니까 챙겨먹고 가라는 사람들도 있었어.(웃음)"

당시 집배원의 역할이 우편물을 배달하는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주민들과 집배원의 사이가 더욱 가까울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 때는 시내에 한번 나오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주민들 부탁도 많이 들어주었지. 면사무소에서 주민등록 초본 떼다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도장 만들어다 주기, 약 사다주기까지. 글읽기 힘든 사람들 편지 대신 읽어주고 또 대신 써주는 것은 기본이었지."

더군다나 60년대 후반에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때는 직접 사진기를 들고 주민등록증 부착용 사진도 찍어 주었으니 당시 집배원은 세상과 시골 마을 주민들을 연결해 주는 가교역할을 톡톡히 했다.

▶글을 써야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써야돼...
"지금 사람들은 연애편지도 안 쓰면서 어떻게 연애를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이해가 안가. 사람이 종이에 글씨를 써야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고 글씨 연습도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요즘 대학 나온 사람들도 글씨 쓰는 것 보면 우리 초등학교 때 쓰던 것보다도 못써..."

직접 밤을 세워가면서 편지도 써보았고, 그렇게 씌어진 편지를 배달도 해 본 그에게는 이메일과 채팅, 휴대전화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요즘 세대들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해 쌓여있는 우편물들을 마을별(구수별)로 나누고 다시 담당도순으로 구분하는 작업을 하면 아침 10시에서 10시30분 가량 된다.

이때부터 자신의 몫을 챙겨 들고 우체국을 출발해 배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오면 4시30분에서 5시 사이. 들어와서 등기우편물 배달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우체통에서 수거해 온 우편물들 정리하고 나면 6시에서 7시정도가 되어야 모든 일이 끝난다.

"내가 호적에 조금 늦게 올라가 있어. 그래서 요즘에는 힘이 조금 부치더라구. 한 3∼4년만 더하고 그만해야겠어."
하루 12시간 가까이 일을 해야 하는 힘든 직업이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이 30년 넘게 해오고 있는 일에 대한 소중함을 얘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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