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12] 동이면 평촌리-들미, 갈골
신마을탐방[12] 동이면 평촌리-들미, 갈골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0.12.16 00:00
  • 호수 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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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북으로 금강이 포근히 감싸안고 흐르며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이 가운데 위치한 평촌마을의 본동 들미(위). 평촌 마을의 가장 좋은 전답이 위치해 있어 들미 주민 대다수가 농사를 짓고 있는 갈골(아래).
'들미'하면 평촌을 비롯해 상촌, 소도를 합친 평산리를 부르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평촌의 가장 큰 마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들미와 함께 시장터, 갈골, 성골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평촌리는 면사무소와 동이파출소, 우체국, 농협동이분소 등 면단위 기관이 모두 모여 있는 행정민원처리의 중심지이다.

총 134가구에 306명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고 포도와 복숭아농사로도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들 가운데 있는 산이란 뜻 `들미'
동남북으로 금강이 포근히 감싸 안고 흐르며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인 들판이 가운데에 위치한 평촌마을의 본동 들미는 10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들 가운데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들뫼'라 불리었던 옛 이름이 한자화되면서 평산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말처럼 이 마을은 평산리의 중심마을이 되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세조 때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처음 정착한 문중은 성주이씨로 현재까지도 많은 가구가 거주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성주이씨 102가구 중 91가구 차지
들미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성주이씨 집성촌이란 사실이다. 102가구 중 91농가가 성주이씨로, 마을에 사는 성씨의 88%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이밖에 김씨가 5가구, 박씨 2가구, 한씨, 정씨, 금씨, 곽씨가 각각 1가구로 서로 아끼며 화목한 마을을 가꾸어 나가고 있다.

마을의 형성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문정공 이직 선생의 증손자인 이석현 선생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출향인들 사이에는 성주이씨가 들미이씨라 불리기도 한다.

이 직 선생의 뜻 이어 받아 전통 이어가는 마을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이 글을 남긴 이직 선생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세종 때에는 영의정까지 지냈다. 이직 선생은 `계자손시'란 글을 통해 "나라에는 충성을, 부모에는 효도를, 형제간에는 화목을, 생활은 검소하게"란 가훈을 정하고 가난해도 바르게 살라고 당부하였고 후손들은 이 같은 가르침을 높이 받들어 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직 선생의 증손자인 이석현 선생은 조선 세조 때 이곳에 정착하며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 자손으로 성골에 거주하고 있는 이종학(80)씨가 15대에 이르고 있다. 이석현 선생의 묘는 현재 마을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그 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성금을 모아 지난해 묘까지 이르는 길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을주민 모두가 한 조상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어 내일같이 협력해 많은 성금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조상을 위한 일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 등 행정기관이 입주할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토지를 희사하는 등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고 이병렬 이장은 설명한다.

이기윤 망북비, 국권수호와 민족자존의 의지 표출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기윤 망북비는 이 마을 가장 높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이를 비통하게 여기고 국권수호와 민족자존의 의지를 굳게 다지기 위해 1921년 이기윤 선생이 세운 이 비에는 "임금님께서 돌아가시니 해와 달이 빛을 잃었구나.

온 국민이 마치 어버이를 잃은 듯 망극하다"라고 비통한 심정을 한문으로 음각해 새겼다. 당시 국상을 당하면 온 국민이 임금이 계신 곳, 즉 북쪽을 향하여 북향사배를 드리고 슬피 울며 다짐한데서 `망북비'란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망북비가 위치한 땅이 개인소유로 되어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따르고 훼손의 우려가 따르는 만큼 군에서 토지를 매입해 줄 것을 대다수의 주민들은 바라고 있다.

벼농사 주로 하며, 포도·복숭아 재배
들미에 거주하는 102농가 중 80여 가구가 벼농사에 종사할 만큼 전통적으로 이 마을에서는 논농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밖에 소득작목으로 포도와 복숭아를 재배하는 농가가 18가구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964년으로 이병렬 이장의 부친인 이정순씨가 처음 포도를 심은 뒤부터이다.
지금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이 이장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하지만 "벼농사보다 좀 나은 정도"라며 생각보다 큰 수익을 올리지는 못한다고 이 이장은 설명한다. 이밖에 이정순씨가 88년부터 옥천농협분소 옆에 하우스를 만들어 꽃을 재배해 오고 있다.

농공단지에서 부소득 올려
들미 마을의 주 소득원이 벼농사이기는 하지만 이웃 적하리에 들어서 있는 동이농공단지를 통해 얻는 소득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특수작물이 많지 않은 마을의 특성에 따라 60대 이하의 주부들은 농공단지를 통해 부수익을 올리고 있다. 현재 농공단지로 출퇴근하는 주민은 30∼40명에 이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아이들 학교 가르치기가 어려워요. 벼 20마지기를 짓는 것보다 월 50만원 받고 일하는 월급쟁이가 더 낫다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서 오가고 있습니다"라는 주민의 말에서 농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엿볼 수 있다.

상하촌 주민 안녕 기원하는 `동제'
이곳 들미와 성골의 중간에 위치한 성황당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성황당 앞을 지나가는 길은 과거 한양으로 통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다녔다.

특히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이 공부하던 곳이 성골에 위치해 이곳 성황당에서 합격을 기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매년 음력 1월14일에 지낸다.

이곳 동제가 다른 지역과 다른점은 평촌과 상촌이 함께 주민의 안녕을 기원한다는데 있다. 한 해는 평촌에서, 한해는 상촌에서 지내는 동제는 1년에 한 번 상하촌의 화합을 다지는 '만동회'를 통해 유사를 결정한다. 유사로 선정된 주민은 한달 동안 부정한 곳을 피하고 정갈한 생활을 하며 동제를 준비한다.

가장 좋은 전답 위치한 `갈골'
평촌의 자연마을은 들미, 시장터, 성골 그리고 갈골로 나뉜다. 그중 갈골은 골짜기이며 들 이름을 이르는 말로 평촌마을의 가장 좋은 전답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가장 좋은 전답이 위치해 있어 들미에 거주하는 주민 대다수가 이곳 갈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은 함양박씨의 종답과 산이 위치해 있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단 한 가구도 함양박씨의 후손인 박종수씨가 벼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주민 대다수가 농사를 짓고 있음에도 농로가 포장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

"마을 안길이나 농지정리는 잘돼 있지만 평촌 주민들이 가장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갈골의 농로가 포장이 안돼 비만 오면 경운기 통행도 힘들 정도"라며 주민들은 농로를 확포장 문제가 시급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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