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청원경찰 이응섭씨
군 청원경찰 이응섭씨
함께사는 세상[15]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11.18 00:00
  • 호수 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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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15살의 나이에 군청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40년간 군청의 역사와 함께 해오고 있다.
현 보건소 옆, 지금은 헐린 옛 읍사무소 건물이 군청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군청 정문을 들어서다 간혹 마주치는 정문의 아저씨가 그 시절부터 군청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파란 제복을 입고 청원경찰로 군청 정문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응섭(55)씨. 1960년 15살의 나이에 군청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40년의 긴 세월을 군청의 역사와 함께 해 오고 있다.

▶15살, 첫발 디딘 군청
보은이 고향이지만 목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에서 살았던,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어린 시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한으로 내려와 외가인 옥천읍 문정리(구읍)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이응섭씨는 죽향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병을 얻어 앓아 누워 있던 아버지를 11살 때 여읜다. 전쟁과 아버지의 죽음 등은 그의 어린 시절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 시대야 나만 그랬나... 어려운 시대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지..."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를 진학하는 것은 가정형편상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형편으로 중학교에 못간 친구들하고 구읍 사거리(정지용 생가 부근) 장터길에서 신나게 뛰어 노는데 어머니가 부르시더라구..."

40년 전의 일이었지만 이응섭씨는 그 때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가 만난 사람은 군청 계장으로 있던 친구 아버지였다. 이 만남이 이후 이응섭씨의 40년 인생을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자리에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알고 있던 친구의 아버지는 이응섭씨에게 군청 `사환'자리를 제안했고, 거절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소년이응섭은 다음 날 바로 군청에 출근을 시작한다. 1960년 처음 걸었던 그 출근길을 따라 군으로 출근한 것이 이제 40년이 된 것이다.

"처음에야 뭐 알았겠어, 어린나이에 어른들이 심부름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우체국으로 은행으로 이리 저리 뛰어다녔지"

그때 받았던 월급이 천 원이었던 것으로 이응섭씨는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 월급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꼬박꼬박 할아버지에게 갖다드렸다. 어린 나이에 적지 않았을 그 돈에 손대었다가 한 번쯤은 혼났을 기억이 있을 만도 한데 이씨는 그런 기억은 전혀 없다고 얘기한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집이 워낙 힘들었으니까... 딴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

이응섭씨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몇 년인가 모은 돈으로 집을 장만해 이응섭씨의 일가를 분가시켰다. 이응섭씨는 그 때 월급을 모아 산 옥천읍 죽향리 가산빌라 맞은 편 집에 아직도 살고 있다. 물론 당시의 초가집은 아니지만. 40년이 되어버린 직장, 40년 가까이 되어버린 집, 월급을 받아 꼬박 꼬박 할아버지에게 가져다 준 기억... 이런 것들이 이응섭씨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겨울철 '분탄 나르던 기억' 아직도...
"지금은 규모가 많이 커졌지만 당시에는 군청 직원이라고 해봐야 70∼80명 정도 됐나? 부서도 내무과하고 산업과 밖에 없었을 꺼야."

그렇게 지금보다 작은 규모 때문인지 당시 군청 분위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고 그는 설명한다.

"당시에 만났던 대부분은 내 나이가 아들 뻘 되기 때문인지 잘 챙겨주셨어. 직원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지금은 돌아가셨을 지도 모르지만 인물 좋은 신사에다 마음도 따뜻해 아들같이 귀여워 해 주었던 김태수 군수나 한상열 군수 같은 분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하지만 지금은 군청 직원들이 많아져서 명찰을 달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과별로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는 과거와 같이 그런 따뜻한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모든 직원들이 그렇게 잘 챙겨 주었으니 뭐 특별히 힘든 일은 없었어. 겨울에 난로용 연료로 분탄을 사용했을 때나 조금 힘들었을까..." 나이가 되었을 때 이응섭씨는 3일에 한 번씩 숙직 근무를 했다. 다른 때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그 추운 겨울 아침에 출근하는 직원들이 바로 난로를 지필 수 있도록 밤에 양동이에 분탄을 담아 각 사무실마다 옮겨 놓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탄(가루 석탄)을 담아 사무실에 가져다 놓고 근무시간 동안 피우고 남은 재를 긁어모아 끌어내리면 겨울밤이 깊어지고 온몸에는 뻐근한 피로가 몰려들곤 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물과 분탄을 적당히 개어서 불을 지펴 주곤 했던 그 기억이 이씨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고생담'이다.

"그것말고는 굳이 힘든 일을 찾자면 청원 경찰하면서 잡상인들하고 실랑이하면서 상스러운 욕 얻어먹을 때지."
이씨는 지난 85년부터 청원경찰로 직종을 바꾸었다. 이씨가 청원경찰로 직종을 바꾼 것은 기존 일용직보다는 보수가 조금 높기 때문이었다. 처음 청원경찰을 시작했을 때는 지금처럼 민원실이 없었기 때문에 정문이 모든 민원창구였다. 지금이야 군청을 처음 찾는 사람들이 간혹 안내를 부탁하곤 하지만 역시 주 업무는 청사를 찾는 잡상인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과거에 비해 군청을 찾는 잡상인들도 많이 줄었다는 것이 이응섭씨의 설명이다.

▶구조조정으로 40년 직장 떠날까 걱정
40년 동안 동고동락해 온 군청. 이응섭씨에게는 군청을 찾는 일반 민원인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응섭씨는 지금 그렇게 정든 직장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걱정이 크다.

"보람도 많은 생활이었는데 법적 정년(58세)은 아직 몇 년 남아있지만 전국적으로 불어닥치는 `구조조정' 바람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아. 머리가 커지면서 한 두 번 다른 일을 해보고 싶고, 더 큰 데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았어."

이응섭씨라고 4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왜 군청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까?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살기 빠듯한 인생살이에서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팔 여유가 쉽게 생기지는 않았다. 모든 일에 쉽게 싫증을 내고 조금 나은 조건이 제시되면 금방 정든 직장을 옮겨버리는 지금의 풍속도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응섭씨는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초년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끝까지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중요하지.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만 가지고 있다면 안될 일이 없을거야."
때로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개인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응섭씨에게는 욕심없이 만족하는 삶의 모습과 방식이었다. 이응섭씨는 아내 최수월(55)씨와의 사이에 큰딸과 아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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