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6] 군북면 국원리-늘티
신마을탐방[6] 군북면 국원리-늘티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0.11.04 00:00
  • 호수 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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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초기 들국화와 구절초가 어우러진 모습에 감탄한 한 선비에 의해 붙여진 지명 군북면 국원리. 세개 자연마을 중 가장 많은 주민이 거주하는 늘티 마을의 모습
조선시대 초기 이 마을을 지나던 한 선비가 들국화와 구절초가 어우러진 모습에 감탄하였다는 군북면 국원리. 할미성을 지나던 이 선비는 이 마을에 국화국(菊)자에 들원(園)자란 지명을 붙여주었다.

늘티, 과거 주막거리라 불리기도 했던 새말, 안말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국원리, 지금은 96 가구에 336명이 거주하는 작은 농촌마을로 변모했지만 이곳은 옥천에서 소정리, 석호리, 막지리, 용호리 등 주위 마을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며 60년대 후반 이곳에 위치한 군북초등학교의 학생수가 700여명에 이를 만큼 큰 번성기를 이루기도 했다.

5년간의 공사끝에 79년부터 시작된 대청호 담수의 영향으로 국원리 주민수는 72년부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79년이후 교통의 요충지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주막거리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여 가구가 줄어든 안말에 비해 6.25 직전에 형성된 새말은 현재 27가구로 늘어나 국원리 전체적으로 볼때 가구수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일제 때 빼앗겼던 지명 `국원리'
이곳의 지명은 앞서 밝힌 것처럼 국화국(菊)에 들원(園)자를 써 국원리라 불리었다. 하지만 일제 때부터 이곳을 아홉구(九)에 수건건(巾)자를 써서 구건리라 불리게 되었다.

마을주민 박찬흥씨는 마을 지명에 대해 "우리나라의 마을지명을 비하하는 뜻으로 징병 때 9명이 수건을 쓰고 갔다하여 구건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일본인이 국원리라는 발음을 하기에 무리가 있어 구건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가 현실성있게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50여년간 `구건리'로 불리워진 마을 지명은 지난 96년 지명 찾기로 원래의 국원리라는 지명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세개 자연마을 중 가장 번성한 늘티
늘티, 안말, 새말 세 개의 자연마을 중 안말이 가장 오래 전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티'란 지명은 고려시대 때 형성된 마을이라는 얘기도 전해져 늘티마을이 더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란 의견도 제기된다.

국원리에 거주하는 96가구 336명의 주민 중 늘티에 가장 많은 45가구, 120여명이 거주한다. 성주배씨가 15가구로 가장 큰 문중을 이루고 있고 특별히 집성촌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박종호씨가 산림조합에 근무하고 있고, 버스운전을 하는 집이 2가구, 식당 운영 등 비교적 다양한 직종을 갖고 살아가지만 주민 대다수인 36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다. 그중 7가구를 제외한 29가구가 벼농사를 짓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곳의 특산품은 메론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의 가장 큰 수입원 `메론' 농사, 16가구에서 이제는 7가구만이 재배
13년 전 16가구가 마을의 특산물로 재배하기 시작한 메론, 지금은 7가구만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여전히 늘티마을의 가장 큰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초기부터 메론농사에 종사해온 박재철(50)씨는 1천200평의 터에 메론을 가꾸고 있다. 1천평당 약 천만원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전하는 박씨는 37번 국도변에서 판매하고 있는 메론은 수량이 달릴 만큼 판매가 잘된다고 설명한다.

"천평정도 메론농사를 지으면 대략 천만원정도의 순수익을 올리죠. 하지만 작황이 좋을 때 얘기지 예민한 작물이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요." 이처럼 초기에 전열로 키우는 만큼 전기료가 많이 들고 온도에 예민한 작물이기 때문에 70%만이 생존하는 단점을 안고 있어 좋은 작황을 올리는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박씨는 강조한다.

이런 어려움으로 해마다 메론 재배농가가 한 두 농가씩 손을 떼고 있고 크게 활성화되었던 작목반 활동도 2, 3년 전부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어려움속에서도 7가구 농가들은 도로변 원두막을 통해 옥천의 메론을 전국에 알리고 있으며, 6월말까지 메론수확이 끝나면 배추나 콩, 상추, 고추, 아욱 등을 심어 또 다른 수입을 올리고 있다.

▶옛 전설 간직한 `며느리재' `할미성' `할배성'
늘티마을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할미성'과 `할배성'을 비롯해 늘티마을에서 감나무골을 거쳐 장자발, 안내로 통하는 `며느리재'의 전설 등 이곳에는 대대로 전해오는 얘깃거리가 많다. "마을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할미성과 할배성에는 아직도 성터가 남아있어요. 옛날 이곳에 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성 쌓기 내기를 해서 할머니가 이겼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열 사람이 들어도 들지 못할 만큼 큰 돌로 쌓아 그 신비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 박찬흥씨의 설명에 의하면 특히 할미성에는 30∼40년 전 차돌광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특이하게 하얀 차돌이 많이 쌓여 있다고 전한다. 또 봉화터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는 이곳 할미성은 돌들이 모두 까만 돌로 쌓여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박씨는 "이곳의 돌과 흙은 모두 검은색입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증약에서부터 국원리 은운리까지는 우리나라에 2곳밖에 없는 터키 지층으로 검은색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히기도 했어요"라며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할미성은 모두가 검은 색 돌들로 쌓여 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늘티에서부터 안내면으로 통하는 며느리재는 국도가 뚫리고 차량이 지나다니기 전인 옛부터 사람들이 걸어서 넘던 고개다. 이 고개에는 `어느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이고개를 넘어가던 중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를 맞자 며느리의 옷은 몸에 달라붙었고 이를 본 시아버지가 딴 마음을 먹자 며느리는 이를 피해 계곡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전설이 고개 이름을 며느리재로 불리게 한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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