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초 병설유치원 최복현 교사
대성초 병설유치원 최복현 교사
함께사는 세상[14]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10.28 00:00
  • 호수 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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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 풍물패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최복현 교사, 그는 영혼을 울리는 소리에 인생을 싣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했다
길거리를 가득 메우는 풍물 장단 소리. 그 소리는 장단을 잘 몰라도 우리의 귀에 익숙하게 다가온다. 언젠가부터 행사가 열리면 항상 그 시작을 풍물소리로 알리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그것도 무척 큰 소리를 내는 악기들의 소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어울렁더울렁 얽혀 살던 우리 민초들의 생활과 그 소리가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그 풍물 소리가 들릴 때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면 유난히 젊고 체구가 작아 금새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가 어깨에 둘러메고 힘차게 두드리고 있는 그 북을 4∼5개만 쌓아 놓으면 금새 키를 넘겨 버릴 것 같은 작은 체구지만 뿜어나오는 북소리만큼은 강렬하다.

최복현(39·대성초 병설유치원 교사)씨. 누군가 옥천 지역의 풍물패 역사를 정리한다면 이 이름을 빼놓고는 한 구석이 비어버려 정리가 쉽지 않을 그런 사람. 관성회관에서 열린 영생원의 작은 음악회에 출연하고 땀도 식히지 못한 채 만난 그는 `형식과 틀에서는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라는 이미지'를 기자에게 첫 인상으로 심어주었다.

▶탈'로 인연을 맺은 풍물

"옥천여고를 졸업할 때 발표회 형식의 축제가 있었거든요. 그때 탈춤패를 급조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탈춤공연을 선보인 적이 있어요. 그게 풍물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탈'이었을까? 당시 옥천여고에 탈춤반이 있어서 그곳에서 전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 몇 명과 모여 책에서 자료를 찾고 직접 탈을 제작해 무대에 올린 첫 탈춤 공연. 그것이 어떻게 보면 그가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외부로 표출한 첫 출발선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탈을 보고 있으면 그 이미지나 표정에서 일상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 보여요. 그것이 매력이죠"

이렇게 시작된 탈과의 만남은 대학을 졸업하고 만난 우연한 기회에 계속된다. 물론 `탈'에 대한 관심이 `계속된 만남'에 결정적이 역할을 했으니까 우연보다는 필연의 결과일 수도 있다. 대학시절 생각의 차이로 탈패 동아리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그에게 유치원 교사 연수를 다니다 우연히 보게 된 `탈춤강습회 포스터'는 본격적으로 탈춤을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달려가 접수를 하고 본격적으로 대전중구문화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탈춤 `양주 별산대'. 탈에 얼굴을 감추고 장단에 몸을 실으면서 최복현씨는 장단을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결국 풍물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 옥천의 대표적인 풍물패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한울림'을 창립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전통의 중요성에 대해서 얘기하잖아요, 하지만 얘기하는 만큼 정책적인 뒷받침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더 늦기 전에 이 부분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풍물패 `한울림' 만들어 내다

그는 `탈'에서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다면 풍물을 통해서는 빈 곳을 채워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각기 다른 네 가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하나로 묶여 나가는 것이 좋잖아요. 꽹과리에서 못내는 소리를 북에서 내주고, 북에서 내주지 못하는 소리를 장구에서 내주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에서조차 풍물의 장단이 읽힐 정도로 풍물에 푹 빠져 있던 최복현씨는 결국 90년 9월1일 박노경, 송치양씨와 함께 옥천에 `한울림'이라는 풍물패를 만든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활동을 했었는데, 지금은 나이드신 분들만 남아 우리 것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면 조금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워요. 악기 메고 길놀이 한 번 하면 젊은 사람들도 힘이 쭉 빠질 정도로 힘들거든요."

지금 한울림을 구성하고 있는 회원 대부분이 50∼6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도 젊은 사람들이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것. 그래도 그는 현재 한울림의 `풍물 선생님'으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살림꾼으로, 여전히 남아 10년째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특히 우리 악기 중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북'이다. 잠시 그 매력을 표현할 적당한 언어를 찾아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북의 소리가 가슴을 울리는 소리'라고 정리한다.

"언젠가 장애우들을 상대로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청각 장애인들이 다른 소리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북소리가 느껴진다고 얘기하더라구요. 그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태어나서 그 때처럼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부연 설명이다. 영혼을 울리는 그 소리에 대한 매력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점점 더 꽉 조여져만 가는 세상을 확 풀어버리고 싶어하는 욕망이 읽혔다.

▶그와 함께 자라는 수많은 아이들

풍물을 사랑하고 지역에서 `한울림'과 `한마당한소리' 등의 풍물패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지만 그의 직업은 대성초 병설유치원 교사다. 그는 사회에서 통상 얘기하는 `결혼할 시기'를 한참 지나버린 나이이지만 `자신의 나이를 자꾸 잊어버린다'는 스스로의 말대로 세월에서 한쪽으로 비켜선 인상을 준다.

그래서 그에게는 당연히 아이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린 시절을 그와 공통된 추억으로 쌓아 놓은 채 부쩍 커버린 사람들이 모두 200∼300명은 족히 된다. 그는 스스로를 이들의 `엄마'라고 얘기한다.

"가끔 군대갔다 왔다고 혹은 결혼했다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러면 왜 그렇게 징그럽던지...(웃음)"

그가 대성초등학교 병설유치원를 포함, 대성초 학구 내에서 근무를 한지 15년이 돼 버렸으니 이제는 시집간 아이들도 군대를 다녀온 아이들도 있을 만 하다. 15년이라는 시간을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저에게는 그곳이 집이었어요. 맑고 순수한 시골아이들과 보내는 그곳에서의 생활은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잊어버리게 만들어요."

얼마 전에는 14명 유치원 악동들과 함께 학교에 떨어진 낙엽들을 긁어모아 불을 지피고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고, 또 단풍 공부를 위해 아이들을 이끌고 너무 예쁜 뒷산을 올라갔다고 자랑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동료교사들의 말처럼 "누가 유치원생이고 누가 교사인지 모를 정도"의 순수함이 읽힌다.

관성회관 계단에 철퍼덕 앉아 긴 시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들려주며 때론 목젖이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어젖히던 최복현씨가 왜 청바지나 정장보다 우리 생활한복을 즐겨입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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