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깎는 이발사 이종철씨
세월을 깎는 이발사 이종철씨
함께사는 세상[13]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10.21 00:00
  • 호수 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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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면에 남은 단 한곳의 이발소를 37년간 지켜온 이종철씨
아버지 손을 붙잡고 찾아간 이발소. 키가 닿지 않아 이발용 의자에 나무판을 대고 올라앉으면 `사각사각' 거리며 머리를 헤집고 다니는 가위질 소리가 너무 단조로워 항상 졸곤 했다.

중학교에서 두발 검사 통보를 받고 달려간 이발소에는 이미 친구들로 넘쳤고 그곳에서 맘에 맞는 친구라도 만나면 머리 깎는 것을 젖혀 두고 해 떨어질 때까지 뛰어 놀기도 했다.

군에 입대하기 일주일 전에 찾아가 짧은 머리를 요구하는 청년에게 이발사 아저씨는 `군대에 가나보죠? 저도 강원도 산골에서 근무했었는데요....'라며 머리를 깎는 내내 자신의 군 생활 얘기를 흥에 겨워 풀어놓기도 했다. 명절이나 장날이라도 겹치면 몇 시간씩 기다려 가며 머리를 깎곤 했던 그 곳이 지금은 세대의 변화에 따라 시골 변두리로 밀려나 그 간판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게 됐다.

17일 찾아간 안내면 현리의 `신미이발관'도 이제는 안내면에서 유일하게 남은 이발소가 되어 있었고, 항상 머리카락이 수북히 쌓여 있었을 법한 바닥도 깔끔하게 치워져 건조하기까지 했다. 올해로 37년 동안 머리를 깎아온 이종철(53)씨를 그곳에서 만났다.

▶먹고 살기 힘들어 선택했던 이발

아침은 먹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고 점심시간에 들른 집에서 어머니는 항상 기울개떡을 점심으로 내 놓았다. 그렇게 배고팠던 시절 이종철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간 집에 있다가 17살이 되어 첫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 이발사였다.

번듯한 농사꺼리 하나 갖고 있지 못한 집안의 칠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1964년 이발소에 취직을 한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1년 동안 있었던 안내 이발소에서 그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머리감기기다. 일본말인 `시다'로 불렸던 머리감기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에 평균 40∼50명의 머리를 감기고 나면 몸이 풀어져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감기기에 익숙해지면 면도를 담당했다. 일본말로 `함빠'라고 불리는 면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시간만 나면 자신의 팔뚝에 비누칠을 해 놓고 면도기 사용법을 익혔다. 여기까지 숙련이 되면 비로소 머리 깎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머리를 빡빡 깎기 위해 찾아오는 아이들이 기술 교재였다. 아이들 머리를 깎기 전에 상고머리 깎기를 연습 한다. 잘못 깎아도 어차피 빡빡 깎을 머리였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대로 된 이발사가 되기 위해서는 2년 가량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 때는 정말 많이 맞으면서 배웠지. 조금만 잘못하면 발로 채이기 일쑤였고... 그래도 부산에 내려가서 이발 기술 배울 때만큼 서럽지는 않았지 고향이니까..."

안내에서 약 1년 정도 이발 기술을 배웠던 이씨는 대도시에서 이발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산에 살고 있던 형님의 소개로 부산 자갈치 시장에 있던 시대 이발소에 들어간다.

▶기술 배웠던 이발소 사장이 되다

"그 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 혼자 화장실에 숨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20살도 되기 전이니까 타향의 설움이 견디기 쉬운 것은 아니었어."

그곳에서 그가 기술을 배우면서 받은 돈은 매일 밥값 90원과 월급으로 쌀 다섯 말 값이었다. 지금의 기억으로도 당시 밥값이 월급보다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는 이종철씨. 그는 돈을 모으기 위해 그 밥값을 아꼈다. 어린 시절 그랬듯이 한끼 30원 하던 아침은 밥으로 먹었고, 점심은 5원짜리 빵 두 개, 그리고 저녁은 굶었다. 그렇게 돈을 모으고 기술을 배우던 중 안내면에 있던 넷째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발소를 사놨으니까 와서 경영을 하라'는 연락이었다.

"집에 돈이 많아서 가게를 산 것은 아니고 형 처갓집이 좀 잘 살았어, 그래서 그때 쌀 70가마니를 빌려다 이발소를 인수했지."

꿈에 부풀어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옥천으로 올 때 그가 손에 쥘 수 있었던 돈은 지금 돈으로 대략 300만원 가량이었다. 그런데 그만 잠든 사이 그 돈을 모두 소매치기 당하고 만다.

"대구역 쯤 도착했을 때 도둑맞은 걸 알았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구. 그런데 내리고 싶어도 호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했지. 밥 굶어가며 모은 돈이었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고향에 돌아온 그는 69년부터 이발소를 직접 혼자서 경영하게 되었다. 지금 `신미이발관' 자리가 그때 그 자리다. 당시에는 1층에 있었던 이발관은 지난 82년 2층으로 증축하면서 현재는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라져가는 이발소에 대한 아쉬움

45세 이하의 손님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요즘. 그만큼 안내면 인구가 줄어든 것도 원인이지만 미용실로 많은 손님들이 흡수되면서 이발소는 `여성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기기 쑥스럽다'는 노년층의 남자들만이 찾고 있다. 그는 이렇게 경영이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을 대략 5년 전부터로 보고 있다.

"옛날에야 대단했지. 일하는 사람만 4∼5명씩 두고 했으니까."

당시에는 `수곡머리'라는 것이 있었다. 현금을 마련하기 힘든 농촌 사람들이 매년 보리수확 때하고 벼 수확 때 보리와 쌀을 갖다 주고 1년 동안 머리를 깎았던 시골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그렇게 수곡을 치를 때가 되면 보통 100가마니는 우습게 걷어들이곤 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네 이발사는 처녀들에게 손꼽히는 신랑감 중에 하나였다.

"그 때만 해도 처녀들에게 인기 좋았지. 돈도 잘 벌고 시집와서 힘든 농사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이제 이발소가 동네 소식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사랑방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시대의 흐름에는 이발소 역시 버티지 못하는가 보다. 요즘같이 가을걷이가 한창 일 때는 하루종일 손님 한 명 없을 때도 있다.

"그래도 지저분하게 이발소에 들어왔다가 말끔해져 문을 나서는 손님들을 보면 `이 기술 잘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 중에 이발 기술 배우려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우리 세대 지나면 이발소는 없어질 꺼야.."

오늘은 한 번 동네에 있는 이발소를 찾아가 아저씨하고 이런 저런 동네 얘기도 하면서 이발소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면도 거품 냄새를 기억 속에 잡아두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내 김영순(50)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둔 이종철씨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안내면에서 유일하게 남은 `신미이발관'을 계속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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