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2] 청산면 의동리
신마을탐방[2] 청산면 의동리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0.10.07 00:00
  • 호수 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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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천근이 묻혀 있다는 천금산 아래 의동 저수지를 이고,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정산리와 연결된 마을로 마을 주민들의 대화속에서 묻어 나오는 경상도 사투리가 정겹고 600여 년의 전통이 말해주듯 주민간의 정이 돈독한 마을 청산면 의동마을.

원래 청산현 동면 가지리에 속해있던 의동마을은 1914년 군, 면 통폐합 시 청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청산현 동면 소재지로 112호가 넘던 가구 수는 이제 52가구 137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 주민들은 대다수가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47가구가 벼농사를 짓고 있고 24가구가 인삼농사를 짓고 있다. 지난 93년 14가구가 재배하던 담배농사는 올해 단 1가구로 줄었다. 그나마 이 담배 재배농가도 내년에는 경작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어 의동리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농가는 없어질 것 같다. 인삼은 마을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남부 3군 중 가장 먼저 인삼이 재배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양성영(61) 이장에 따르면 "지난 69년 금산에 거주하던 양만선씨가 이 마을 양만필씨의 토지에 인삼을 심기 시작한 것이 옥천, 보은, 영동 남부3군 중에는 가장 오래 된 인삼재배일 것"이라고 전한다. 양 이장은 "처음에 지력이 좋아 인삼재배가 성공을 거두자 많은 마을주민들이 동참해 지금은 대다수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인삼재배가 성공을 거두자 이곳은 농가부채가 크게 줄어 인근 3개 마을 중 가장 부유한 마을로 인근 주민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조선초 남원양씨 정착하며 마을형성
이곳은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주민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남원양씨 집성촌이다. 남원양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한 것은 조선초기이다. 고려 말 문하시중이라는 벼슬을 지낸 양천용 선생이 조선이 건국되면서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모든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갔다.

양천용 선생의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양천용 선생도 남원에서 타계하였고 부인과 두 형제는 탄압에 견디다 못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두 아들 중 큰 아들이 의동마을에 정착한 것이 양씨의 시작이다. 이들 남원양씨가 이곳에 정착하기 전 이곳에는 차씨가 거주하고 있었다. 천금산 밑 동작골에 거주하던 차씨는 양씨들이 이곳에 정착하자 현 위치에 함께 거주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5년 전 차씨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 현재 차씨성을 가진 의동마을 주민은 단 한 가구도 남아있지 않다. 남원양씨가 이곳으로 옮겨온 후 들어온 성주도씨와 그밖에 노씨, 박씨, 최씨, 마씨, 김씨, 강씨, 이씨 등이 몇 호 이곳으로 이주해 거주할 뿐이다.

600여년 역사와 함께 한 정자나무
마을에 들어서면 600여 년 간 마을의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정자나무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마을주민들에게는 한여름 시원한 그늘과 휴식터를 제공하고 이곳을 떠난 출향인들에게는 향수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이 정자나무가 마을을 상징하는 만큼 나무에 대한 주민들의 애착 또한 크다.

정자나무 옆에 위치한 양곡창고 지붕에 가지가 걸려 정자나무가 죽어가자 창고를 옮기며 나무를 살려냈고 비바람으로 가지가 둘로 갈라져 또 다시 고사위기에 처하자 두 가지를 철근으로 연결해 다시 살려냈다. 지금은 이곳 정자나무 밑이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인 동시에 마을일에 대한 논의도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열녀비와 효자비 후손에 귀감
의동마을은 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그중 효행과 열행으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풍천임씨 열녀문과 효자 도명화의 효자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다.

열녀문과 효자비에 대해 양 이장은 "조선시대 규장각 정3품인 부제학을 지낸 양한신의 처 풍천임씨는 남편이 병들자 한 겨울 잉어와 대추로 정성으로 돌보았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른 날 목을 매 자결하였다. 이에 1772년 영조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았다. 도명화 효자는 아버지가 병으로 눕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7년을 더 살게 하는 등 효행이 극진해 후손이 효자비를 세웠다"고 전했다.

매년 출향인 모임 열려, 정월대보름 화합 위해 다양한 행사
양씨 집성촌인 만큼 이 마을 출향인 모임은 양씨를 주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매년 연말총회를 마을에서 개최하며 음성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퇴직한 후 청주대한불교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양병석씨와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양기성씨가 꾸준히 고향의 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참가하고 있으며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양병구씨와 양병화씨가 성공한 출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년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행사도 개최된다. 정월대보름날이면 마을주민 모두가 모여 민속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올해는 마을주민이 모두 참가해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5월8일에는 경로잔치를 열어 주민간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 모든 행사를 양성영 이장과 양태복 노인회장, 양갑영 새마을지도자, 김경애 부녀회장이 관심과 노력으로 일궈내고 있다.

개천 석축공사, 진입로 개설 주민숙원
지난 70년대 말 의동저수지가 생겨 농업용수의 공급이 원활해졌고 80년대 중반 경지정리로 인해 의동마을의 농사짓는 여건은 대부분 충족되었다. 95년에는 마을회관이 건립되었고 현재 의동, 덕지, 효림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새로 개설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마을주민들에게도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의동저수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개천에 대한 석축공사와 마을 앞까지 2차선 도로가 개설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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