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청 사진기사 박재흠 씨
군청 사진기사 박재흠 씨
함께사는 세상[11]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10.07 00:00
  • 호수 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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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옥천의 모든 것들을 앨범속에 고스란히 간직하는 일에 전념하는 군청 사진기사 박재흠씨
기념식장이나 지역에서 큰 축제라도 열리면 항상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큰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행사장 구석구석에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

이 정도라면 흔히 신문사 사진기자나 아니면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뇌하는 사진작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재흠(46·옥천읍 금구리)씨는 그 둘 모두 아니다. 옥천에서는 동일 직종 근무자가 없는 직업인 옥천군청 문화공보실 소속의 사진기사(공식명칭 기계기사)다.

박재흠씨가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말 우연한 기회였다. 그 우연처럼 옥천 군청 공보실 직원으로 `기록'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도 역시 우연이었다.

▶극장의 영사기사로 시작된 사진기사 생활

70년대 초반 집을 뛰쳐나가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박씨가 10대 후반에 결국 자리를 잡은 곳이 극장. 대전의 한 극장에서 영사기 작동기술을 배웠던 그는 당시 옥천에 있던 극장이 없어지면서 유일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옥천문화원' 영사기사로 취직을 하게 된다.

"당시에 문화원에서 20원씩 받고 35mm 영화를 상영했어요. 친구들은 중학교 다니고 그랬었는데 내가 인기는 제일 좋았어. 내 친구들은 내 덕에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었거든요."

30년 가까이 지나버린 그 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는가 보다. 까까머리 악동들이 영사실로 박씨를 찾아 올라오면 몰래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 주던 그 때. 옥천읍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 주민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정책홍보수단은 역시 영화였다. 그래서 각 군에는 영사기가 있었고 비나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 매일 밤이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금은 극장에서도 자취를 감춘 `대한뉴스'나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 등의 홍보영화를 상영했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스크린 밑에 쪼그리고 앉아 근엄(?)하기만 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나 초가지붕이 말끔한 스레트 지붕으로 바뀐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시골 동네 아낙들의 어색하기만 했던 웃음을 바라봤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시절 우연히 군청에서 영사기를 돌리던 사람이 그만두게 되고 문화원에서 영사기를 돌리고 있던 박씨가 그 일까지 떠맡게 된다.

낮에는 문화원에서 밤에는 마을을 돌며 영사기를 돌리는 일이 계속되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밤이었기에 영사기를 돌리고 있는 청년 박재흠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75년부터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79년까지 박씨는 그렇게 마을을 돌며 영사기를 돌렸다. 75년부터 군에서 공무원같이 근무를 했던 박씨는 79년이 되어서야 2월1일자로 정식 공무원 발령을 받게 된다.

동네 순회 영화 상영프로그램(?)이 사라지면서 박씨가 맡은 일은 사진기사였다. 군청에서 사진기를 맡고 있던 전임자가 직장을 옮겨 영사기사로 있으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박재흠씨의 사진기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집에 `사진기'라도 한 대 있으면 큰 부자로 인정받았던 그 시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도 박씨가 사진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일 수 있다.

지금까지 박씨가 함께 일을 한 군수만도 14명. 결코 짧은 시간일 수 없는 긴 시간동안 옥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역사의 현장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내가 찍어 놓지 않으면 영원히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는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껴요. 그것이 가장 큰 보람이지요." 박씨는 본격적으로 사진 일을 시작했던 지난 80년부터 찍은 모든 필름을 제목과 함께 바인더에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다.

이러한 박씨의 `기록'에는 군수가 참가하는 중요한 행사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지용제나 중봉충렬제같이 지역에 큰 행사들은 물론 큰 재해가 발생하면 모든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옥천을 누볐다. 그렇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때론 목숨을 담보로 하기도 하는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81년도였나? 큰 수해가 발생했을때 보청천에 물이 엄청나게 불었거든요. 가슴높이까지 차오르는 물에 들어가서 한다리(현재의 청산대교)를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큰 천둥소리가 나더니 다리가 확 떠내려가는 거예요. 그때는 정말 십년 감수했지요."

재해 현장이나 문화재뿐만 아니라 박씨가 심혈을 기울여 착수했던 `기록'의 작업은 각 마을 전경을 사진에 담아 놓는 것이었다. 점점 변하는 마을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91년부터 시작했던 마을 전경사진 찍기. 제대로 된 전경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겨울이 돼 낙엽이 떨어진 마을 주변의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고 쉬어야 하는 주말에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결국 군서면 사양리를 마지막으로 쓰러져 버렸다.

"한 6개월 출근 못했지요. 재활 치료받고 전신마비가 왔던 몸은 회복이 됐지만 돌아와서 찍어 놓은 마을 전경 사진을 다 불살라 버렸어요." 정말 힘들게 찍은 사진들이었지만 미련을 가지면 또 산을 올라갈 것 같아 아쉽지만 모두 불살라버렸다는 박씨.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 다시 도전해야 할 작업이라고 힘주어 얘기한다.

▶정년 후 팔도유람으로 사진속에 국토 담고 싶어...

다양한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에 대한 기록작업을 알면서 혹은 모른채 차근차근 진행해 가고 있다. 박재흠씨 또한 중요한 기록자 중 하나다. 이러한 기록은 이후 역사에 의해 한 세대를 평가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 작업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그러한 이유에서 한없이 부담스러운 작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씨는 힘들면서도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기록자의 역할에 대해 애정과 함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정년 퇴직할 때까지 몸이 성하면 계속 일을 해야죠. 그리고 정년을 하면 팔도 유람을 하면서 사진에 국토를 담고 싶어요" 당연히 정년을 한 후 전 국토를 돌아다닐 때 박씨의 곁에는 박씨의 아내 김명숙(45)씨와 함께 박씨가 애지중지하는 사진기(니콘 F4)가 함께 따라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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