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1] 청성면 산계2리-신기.새터
신마을탐방[1] 청성면 산계2리-신기.새터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0.09.30 00:00
  • 호수 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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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쪽 기름진 들녘, 맑고 푸른 보청천 따라 독산의 상춘정은 한 폭의 그림 같고 서북쪽은 병풍처럼 둘러친 오구니재가 북풍한설을 막아주어 더욱더 살기 좋고 평온한 마을 청성면 산계2리.

이 마을은 청성면 소재지 관문이다. 성, 직업, 성격 등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뜻의 `각성바지'는 이 마을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다. 가장 많은 성씨인 전씨가 이 마을에서 5가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며 타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정착한 마을로 신기(新基), 새터라 불리기도 한다.

12월에도 산이 푸른 이곳에 애국지사들 정착하며 마을 형성
이 마을을 처음 연 사람은 구한말 일본군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양벽도 선생으로 전해진다. 청성면 산계2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64년 동안 생활한 박진수씨는 양벽도 선생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양벽도 선생은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일제의 강점을 막기 위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신 분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지속적인 의병활동으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피난처를 찾던 중 `산도 들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가 피난처다'란 말을 듣고 무오년(1918년)에 이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후 3·1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신태림 선생과 경북 경주군 강서면 원당(당시 주소) 3·1만세운동 주모자인 박길만 선생에게 `12월 청산에 만인이 거하라'란 정감록 비결을 알려주며 이 곳으로의 이전을 권하였다".

그 당시 양 선생이 12월에도 산이 푸른 곳으로 이곳으로 점지한 이유도 특이하다. 12월(十二月)이란 한자를 조합하면 청(靑)이 되며 과거 청산 땅이었던 이곳이 만인이 거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 청성면 산계2리는 그 당시 행정구역상 청산현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양 선생의 권고로 인해 신태림 선생의 가족들과 박길만 선생의 5남매가 이곳에 정착하며 마을이 형성된다.

홀어머니의 과도한 아들 사랑이 빚어낸 '노고성' 산성
산계2리 안성이란 마을 뒷산에는 큰돌로 쌓은 노고성이란 산성이 있다. 신라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이 성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60여 년을 이곳에서 생활한 터라 박진수씨는 이 전설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박씨가 전한 전설의 내용은 이러했다.

『성이 쌓여지기 전에 이곳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생활하는 두 남매가 있었다. 내기를 좋아한 두 남매는 어느날은 목숨을 건 무시무시한 내기를 하게 되었다. 아들은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어린 송아지를 끌고 서울을 다녀오고, 딸은 성을 쌓기로 한 것이다. 다음날 아들은 굽 높은 나막신과 어린 송아지를 몰고 서울로 향했고 딸은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딸이 성을 쌓는데 돌멩이들이 스스로 날아와 성이 쌓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늙은 어머니는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성은 다 쌓아지고 있는데 아들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홀어머니는 아들의 편을 들었다. 홀어머니는 뜨거운 팥죽을 끓여 성을 쌓고 있는 딸에게 권하였다. 딸은 뜨거운 팥죽을 후후 불어가며 식혀 먹는 바람에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아들은 먼저 도착해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다』

마을에서 40분 정도 산을 타고 올라가니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노고성이 우물터와 함께 수풀로 뒤덮인 채 발견되었다. 마을주민들은 "성안에서 생활하기 위해 파 놓은 우물이지만 물은 본래 높은 곳에서 생겨 깊은 곳으로 가는 법인데 그 높은 곳에서 물이 나오는 곳을 어떻게 알고 우물을 팠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조상의 지혜로움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비누없이도 머리감고 빨래 가능한 '수룡골',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고사 지내
청성초등학교와 마을회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수룡골. 이곳은 물이 좋아 비누칠 없이 머리를 감거나 빨래가 가능한 곳으로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승재 전 이장의 안내로 찾아간 수룡골에는 수풀이 우거지기는 했어도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던 장소와 머리를 감기 위한 웅덩이가 아직도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씨에 따르면 "이곳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이지 않고 아무리 더워도 바람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며 "예전에는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지금은 빨래판 역할을 하는 돌들이 많이 깨어져 있지만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들을 접할 수 있다.

마을주민 대다수 벼농사, 포도시험장 노인 소득증대 기여
1985년 산계리에서 분구된 산계2리는 61세대 128명의 주민 중 대다수 농가들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며 담배농사를 짓는 농가가 3가구, 고추농사를 짓는 농가는 20농가 정도이다. 이곳에는 청성면의 치안을 담당하는 파출소를 비롯 우체국, 시설포도 연구소 등이 위치하고 있다.

특히 농촌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시설포도 연구소는 마을 유휴노동력 활용에 공헌하고 있다. 하루평균 5명의 인력이 이곳에서 1만8천원 정도의 일당을 받고 있어 노인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곳을 견학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청성면 수익증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단양교육청 교육장을 지낸 김기억씨가 이 지역 출신이며 농협 옥천군지부장과 면목동 지점장을 지낸 전용삼씨, 김숙자 청주소아과 원장, 이태재 보은농공고 서무과장 등이 출향인으로 사회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덕호 이장과 최상운 새마을지도자, 천선자 부녀회장, 성만재 노인회장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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