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자들의 보호시설 '영생원' 최미숙 총무
정신질환자들의 보호시설 '영생원' 최미숙 총무
함께사는 세상[7]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09.02 00:00
  • 호수 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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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데 최선을 다하는 영생원 최미숙 총무
옥천읍 삼청리 마을을 지나 저수지를 끼고 올라가면 산비탈에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정신지체 등 중증장애인 보호시설인 `청산원'과 정신질환자들의 보호시설인 `영생원'.

그중 밑에 위치한 것이 영생원이며 그곳에서 총무로 일을 하고 있는 최미숙(35)씨를 만나기 위해 비 내리는 26일 아침 영생원(원장 최석윤·68)을 찾았다.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최미숙 총무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바쁜 손길을 놀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국정감사 때문에 보건소에서 요구하는 자료가 있어서요. 머리가 좋아서 어제 밤새 했던 작업물을 모두 날려버렸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금방 최미숙씨는 일을 정리하고 의자에 걸터앉는다.

"저 말고 진짜 일 열심히 하는 우리 직원 소개시켜 주면 안돼요? 꼭 내가 해야 돼나.." 지역에서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녀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호탕한 웃음과 함께 최 총무는 한마디 던진다. "이미 섭외가 끝난 걸로 아는데 무슨 얘기냐?"며 못을 박고 그녀의 삶을 훔쳐보았다.

▶자연스럽게 선택한 영생원

"청동초등학교 유치원 교사로 5년 정도 생활했는데요. 아버님이 영생원에서 일을 해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들어오게 됐어요. 무슨 특별한 사명감이나 많은 고민 등의 과정은 별로 없었구요."

최미숙씨는 영생원을 설립한 현 최석윤 원장의 2남2녀 중 큰딸이다. 그래서인지 최 총무에게는 `봉사정신·헌신·투신·결심·결단' 등의 낱말이 연상되는 사회시설소 영생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던 것이다. 또 어린시절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을 그녀의 환경도 그녀에게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제가 만약에 평범하게 자라다가 부모님이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했다면 나름대로의 갈등과 고민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영생원의 역사가 제 나이하고 똑같아요. 부모님이 이곳에 정착했을 때 제가 태어났고 시설소에 있던 아주머니 손에 키워졌죠. 물론 이곳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자랐기 때문에 그들이나 이곳이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죠."

그렇다고 그녀가 단순히 하나의 직업으로 영생원을 선택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회적 오해 속에서 그녀의 부모가 직접 손으로 피땀 흘려 하나 둘씩 이루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마저도 떨쳐 버리기는 쉽지 않다.

"지금보다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로 만들어야겠죠. 아버지 세대가 개척이었다면 우리세대는 질을 높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욕심이 영생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생기더라구요." 이런 욕심과 생각이 그녀를 늦은 나이에 청주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특별하지 않아요. 그냥 우리의 이웃이예요

"사회의 시선이 좀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아동시설이나 장애인시설에는 관심과 따뜻한 마음을 이제는 쉽게 나눠주는 것 같은데 정신질환 시설을 바라보는 눈은 아직도 차가운 것 같아요. 그게 제일 아쉽죠."

최 총무는 사회에서 정신질환자들을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이웃으로 바라봐 주기를 희망한다. 이런 사회의 시선과 환우들 스스로 느끼는 `고립감', `소외감' 등을 없애기 위해 2∼3년 전부터 영생원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해 추진하고 있다. 소풍을 비롯한 체육대회, 해맞이 여행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신질환을 감추고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기회가 된다면 계속 밖으로 나가고 밖의 사람도 안으로 불러 들여야 돼요. 시설소도 이제는 `수용'에서 `재활'로 목표가 바뀌고 있잖아요."

처음에는 가족들이 정신질환자를 거부할 경우 아무리 상태가 호전되어도 환우들은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의사 등 전문가의 소견이 있다면 가족이 받아들여주지 않아도 환우들은 밖에서 직장생활을 비롯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시설소에 있는 환우들 뿐만이 아니라 시설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을 해야하는 것에 대한 목표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간혹 이렇게 재활프로그램을 받고 상태가 호전돼,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시설소를 찾아와요. `영생원에 있는 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그러면 정말 눈물이 나죠. 그런 사람들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는 큰 힘이 돼요."

이런 보람과 재미가 어려운 시설소 생활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런 결과를 위해 직원들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힘든 생활속에서도 퇴근 후 시간을 내 사설학원에서 종이접기며 컴퓨터 등을 배워 교육프로그램으로 개발, 환우들에게 재교육을 시키고 있다. 최 총무는 이런 직원들과 잊지 않고 영생원을 찾아주는 자원봉사자들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희망을 일구겠다는 강한 의지

"힘든 거요? 정신없이 바쁜 거죠.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환우들과 의사소통이 안 될 때에요. 그들에게 나의 마음을 전달할 수 없고,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힘들죠."

밖에서 간혹 보인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기만 하다. `힘들지 않느냐?'는 우문에 역시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최미숙 총무. 그러나 그 어려움 보다 보람과 재미가 더 크기 때문에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결혼이요? 저는 단순해서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해요. 그래서 안하는 거예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한 마디 한 마디 자신 있게 얘기하던 최미숙씨도 결혼 얘기가 나오자 쑥스럽게 웃으며 `영생원' 일 때문에 아직은 생각이 없다는 말을 돌려 얘기한다. 지금도 육중하게 닫혀 있는 영생원의 철문 앞에 서서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웃음에서 `희망'을 일구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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