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신부전증 투병중인 전양표씨
만성신부전증 투병중인 전양표씨
함께사는 세상[6]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08.26 00:00
  • 호수 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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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성신부전증 투병중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전양표씨
▶병원에 가면/밤낮 희망과 절망의 무덤들이/여기저기 널부러져 뒹군다 -병원에 가면 3- 중에서
지난해 본보 지면을 통해 `만성신부전증'이 악화돼 병원에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의 안타까운 소식이 주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격려와 성금이 이어졌다. 지금은 퇴원을 하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병원을 찾아 투석을 받고 있는 전양표(43·옥천읍 문정리)씨.

"얼굴도 잘 모르면서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는 말씀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직접 찾아 뵙고 인사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직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아 얼굴엔 병색이 남아 있었지만 환하게 웃는 전씨의 표정만큼은 편안해 보인다. 요즘 전씨는 틈틈이 시를 쓰면서 무거워진 몸을 풀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운동도 하고 있다. 가끔은 방학이어서 집에 있는 두 아들 정하(15), 종하(13)의 손을 잡고.

▶낮과 밤/모두/방안에서 뒹군다/속편하게 얹혀사는/기둥서방/내색않고/아낸/품 팔러 간다 -투병생활-
"병원에서 퇴원을 한 후 다시 볼 수 있었던 모든 사물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다가 올 수 없었어요. 풀뿌리 하나도 돌멩이 하나도... 다시 태어난 `기쁨'이라기 보다는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정말 마음에 `미움'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모두 시들해졌어요."

40일 정도 중환자실에 머물면서 10여 차례의 수술을 통해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전양표씨는 전기 충격기에 삶을 이어갈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간혹 정신이 들어도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혼수상태 속에서 전씨가 보았던 `고통의 세계'는 너무 끔찍했다.

"정신을 잃고 많은 것들을 보았어요.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이 해일처럼 밀려들기도 했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죄 값을 받는 저쪽 세상을 보기도 했어요."

곁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믿을 수 없고, 꿈이나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였던 전씨에게는 현실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힘든 현실이었다. 그런 고통의 과정을 겪고 난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전씨는 `초연(超然)'이라는 낱말로 설명한다.

"지금은 병원에 가도 `환자'가 아닌 줄 알아요. 항상 밝게 웃으니까요. 여기서 겪고 있는 나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전씨에게 병원 생활은 아픈 몸을 치유하기 위해 들른 곳이었지만 또 다른 `학교 생활' 이기도 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한 청소부 아주머니에게서 느낀 감정은 `청소부 아줌마'라는 `시'가 되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회초리가 들어있다/천한 일이라고 자격지심에 빠지거나/배운 것 없다고 자존심을 버리거나/별 볼 일 없는 일이라고 소홀히 하는 법이 없는/청소부 아줌마/그녀의 미소에는 회초리가 들어있다

"항상 웃으면서 밝게 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를 보면 `내가 과연 저런 아주머니한테 인사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하는 자책이 들더라구요. 그 분한테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전씨가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얻은 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눈물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고마운 사람들을 보아도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웃음 짓는 전씨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대학 나와/거리 장사 한다고/수근수근/그 말을/아내 조심스레 건넨다 -떠돌이1 - 눈치- 중에서
`노점상' 삶의 막바지까지 몰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 현실이다. 제주대학을 졸업한 전씨가 선택한 직업도 `노점상'이었다. 물론, 지금은 투병생활로 일선(?)에서 떠나 있지만...

막연히 사업에 실패하고 다니던 직장에 적응을 못해 선택한 직업이라고 이해하기에는 `노점상'을 선택하게 된 전씨의 배경은 조금 복잡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점상'이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그리고 다른 노점상들의 삶을 바라보는 전씨의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는 것이다.

"돈보다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씨는 아들의 운동회에 찾아간 적이 있다. 아들에게 줄 김밥과 먹을 것 대신 풍선과 장난감 등을 싣고 장사를 하기 위해 찾아갔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생각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혹시라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 아버지의 직업에 대한 `창피함' 이런 것들을 없애주고 싶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아이보다 내가 더 힘들 수 있는 일이었는데." 다행히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였고,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그렇게 자라주는 아이들이 전씨는 고맙기만 하다. 지금도 전씨는 작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

"트럭에 빙어를 가득 싣고 대전에 나갔어요. 그날 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고 길에는 차와 사람들도 뜸해 지더라구요. 차안에 들어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옥천주부문학회에서 발간한 작품집을 읽고 있었어요. 그때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진 시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바로 노트를 사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죠."

그렇게 쓰기 시작한 전씨의 시는 `삶의 향기'가 그대로 묻어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했던 노점상으로서의 삶. 항상 안쓰럽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아내, 자신을 유난히 아껴주시며 딸 몰래 용돈을 찔러 주시는 장모님, 병마와의 힘든 싸움 등이 고스란히 시로 녹아있다.

그의 시에는 함축된 시어도 아름다운 은유도 없지만 그의 작품을 읽고 그를 만나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친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지금은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화된 깨끗한 시선으로 한없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 있는 전양표씨. 운동도 꾸준히 하고 컴퓨터를 배워보고 싶다는 전씨는 아내 정구철(40)씨와의 사이에 두 형제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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