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240] 청산면 하서리
신마을탐방 [240] 청산면 하서리
마을 앞 보청천 감싸는 덕의봉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8.03.20 14:12
  • 호수 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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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마을이 대부분 그렇지만 마을은 절대로 그냥 생기는 법이 없다. 하천과 산맥, 터의 이로움과 불편을 보고 인간과 자연이 가장 원만히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곳이 마을로 선택된다. 풍수라는 철학은 바로 이런 우리 민족의 경험이 바탕이 된 사고체계일 것이다. 청산면의 서쪽 마을 하서리를 찾았다.

하서리에 들어서면 우리 옛 풍수가 말한 좋은 터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마을 앞으로 보청천이 유유히 흐르며 기름진 농토를 선물하고 뒤로는 덕의봉 자락이 마을을 병풍처럼 휘감으며 푸근하게 동네를 감싼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본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적 이상향이 그림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풍경이다.

과거 하서리는 여기에 한 점을 더했다. 바로 자하모연(紫霞暮烟)이 그것. 청산의 여덟 가지 아름다움 중 하나인 하서리의 자하모연은 저녁노을이 고즈넉이 드리울 무렵 마을의 밥 짓는 연기가 줄줄이 피어나 덕의봉을 배경으로 장관을 연출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담고 있는 바로 그 풍경은 바로 이곳 청산 하서리에서 수백 년 동안 연출됐고 청산은 이를 자하모연이라는 네 글자에 담아 청산을 상징하는 문화 콘텐츠로 즐겼던 것이다.  하서리의 두 자연마을 중 하나인 자하동의 유례가 바로 자하모연이다. 자하동이라는 이름은 시간이 흐르며 하동이 됐고, 송시열, 조헌의 위패를 봉안했던 서원(덕봉서원)이 있던 동네는 서원마을로 이름 붙여진다.

▲ 마을 입구 마을 자랑비
◆청산곶감의 기술력은 하서리에 있었다

봄을 준비하는 마을이지만 마을은 생각 외로 조용하다. 올 초부터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고광수(61) 이장을 만났다.  "다들 나이들이 드셨죠. 나도 젊은 축이니까…,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작목들을 농사지으시는데 딱히 소득이라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다들 그렇죠."

마을입구부터 느껴지는 조용함이 아쉽기도 하지만 사실 마을에 활력이 넘치던 모습은 그리 오랜 이야기가 아니다. 청산의 대표적 농산물인 청산곶감의 원천기술을 확보한 마을이 바로 하서리였으니까.

"영동이 한참 곶감을 시작할 때 우리 청산 하서리에서 곶감 기술을 배웠어요. 지금은 마을 곶감 중 절반가까이를 외부에서 사오지만 예전에는 마을에 감나무가 참 많았습니다. 곶감하는 때가 벼 수확기하고 겹치니까 곶감을 하셔도 많이 하시는 농가들이 예전 같지 않지만 아직도 많이 하는 집들은 한 집에 네다섯 동(곶감 1백 접이 1동, 한 접은 1백 개)씩 하십니다."

곶감 말고 하서리 하동, 서원마을이 생산하는 농산물은 다양하다. 비 가림 포도, 복숭아, 고추까지, 물론 마을 앞 비옥한 옥토에서 하는 벼농사는 대부분 농가의 일터다.

◆사람에게도 종자가 있더라

19호선 국도변에 있는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마을회관과 마을공동식당으로 사용되는 '행복이 가득한 집'을 볼 수 있다. 이즈음부터 시작되는 마을은 사람들이 백골재라고 부르는 마을 뒷산까지 쭉 늘어서 있는데 나무를 때어 밥을 짓던 시절이라면 틀림없는 장관이 연출됐을 법 하다.

▲ 입담 좋기로 유명한 하서리 변호사 박영조씨의 모습.
마을 가운데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사슴농장이 있고 왼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글방이 있던 마을 서원이다. 서원마을로 넘어가는 길에 우연히 '하서리 변호사'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박영조(60)씨를 만났다. 맛깔나게, 또 조리 있게 말 잘하는 농사꾼으로 통하는 박씨. 평생 땅을 일구며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박씨의 이야기는 역시 혼자듣기 아깝다.

"내가 말이여. 요즘서 깨닫는 것인데 씨앗에만 종자가 있는 줄 알았더니 사람에도 종자가 있더란 말이지? 농사꾼 집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절대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이 되고 있는 거 맞지? 그게 뭐여. 가난한 종자, 부자 종자…. 사람도 종자가 되는 세상이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어리석은 세상은 하서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농군의 냉정한 눈으로부터 숨지 못하고 있었다.

◆서원마을에 심어질 감나무 600주

마을에서 가장 젊은 농업인이 보는 농촌과 마을의 전망은 어떨까. 박영조씨의 포도밭을 떠나 자신의 복숭아밭에 거름을 놓고 있던 마을에서 제일 젊은 농군 박관옥(46)씨를 찾았다.

"도시에서 노동을 해서 벌어도 그 돈은 남는데 농사일은 달라요. 아내랑 맞벌이로 고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세 아이 겨우 가르치는데 자꾸 빚만 느네요. 농사 일 하다가도 차라리 어디 가서 운전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 자주하니까요.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있어야 뭐라도 해 볼 텐데 지금은 마을에 초상이 나도 상여를 맬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서리만 알고 있는 좋은 소식을 찾아온 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청산 119안전센터를 지나 서원마을을 둘러본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동네는 적막하다. 이때 반가운 인기척, 곶감마을 하서리 서원에 감나무가 심어진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나타난 박칠성 반장이다.

"마을소득사업으로 서원에 감나무 600주를 심게 됐어요. 3년 뒤부터는 수확해서 마을공동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하모연으로 기억되는 아름다운 마을 하서리. 하서리에 새로 심은 감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날이 기다려진다.

▲ 하서리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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