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234] 이원면 수묵리…수영골
신마을탐방 [234] 이원면 수묵리…수영골
마르지 않는 샘을 간직한 옥천의 관문
  • 정순영 기자 soon@okinews.com
  • 승인 2008.01.24 14:16
  • 호수 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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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방과 새별을 먼저 들른 것에 대한 심술인지, 수영골을 찾은 날은 마을을 휘감는 매콤한 겨울바람이 가장 먼저 기자를 맞았다. 수묵리에서 왼쪽 묵방으로 빠지지 않고 포장된 길을 따라 500미터 정도만 더 가면 수묵리의 마지막 자연마을인 수영골이 나온다. 월이산을 등 뒤에 하고 마을 앞에 펼쳐진 계단식 논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는 수영골은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를 바로 이웃에 두고 있는, 말 그대도 '경계에 선 마을'이다. 마을입구 버스정류장에 수영골을 종점으로 하는 옥천버스가 서 있다.

생각해보면 수영골은 종점이자 종점이 아니다. 수묵리 수영골까지 운행하는 버스 중 하루 4대는 고개 넘어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를 찍고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마곡리 입장에서 보면 수영골은 종점이 아닌 옥천의 시작인 것. 예전에는 버스정류장이 있던 곳에 우편물취급소도 있고 마을 주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었을 구판장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줄어든 인구와 함께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있어 조금 쓸쓸해 보인다.

▲ 옥천의 남쪽 경계에 서 있는 이원면 수묵리 수영골의 전경. 현재 25가구 4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예부터 지금까지 지하수가 풍부해 가물 일이 없는 마을이다.


"마곡리 어르신들 병원이나 장날엔 늘 이 버스를 타고 이원으로 오시지요. 전에는 그곳 학생들도 이원중이나 옥천고를 가느라 늘 이 버스를 탔는데 이젠 어디 젊은 사람이 있어야죠. 어쨌든 이 마을은 옥천과 영동을 이어주는 중요한 샛길입니다."

수영골 버스정류장에서 옥천읍으로 나갈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옥천버스 이진흔(43) 기사가 수영골의 '입지적 중요성'을 알려준다.

◆"땅을 놀려야 하는 게 참 안타까워"

날씨가 쌀쌀한 탓인지 마을을 둘러 봐도 나와 있는 주민은 없고 제 임무를 충실히 하는 동네 강아지들만이 낯선 이를 보고 '왕왕' 짖어댄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경로당 밖을 나와 본 한 주민을 발견하곤 "계세요?"라며 경로당의 문을 두드려 본다.

"보건소에서 나왔는가? 우리 마을에 조사할 게 있어 온겨?"

수묵리 수영골을 신문에 소개하고 싶어 왔다는 기자의 말에 경로당을 지키고 있던 김정자(72), 김일성(80), 육분임(73), 이분남(73) 할머니가 "시골에 뭐 쓸 게 있다고"라며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자리를 잡고 마을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으려는 찰나, 마침 마을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수영골 노인회장 박대섭(70)씨가 경로당으로 들어선다.

"수영골이 요렇게 산 날망에 딱 붙어 있어도 예부터 물이 많은 곳이야. 묵방은 같은 수묵리라도 물이 곤란해 어려움이 많은 곳이지. 가물 걱정도 없고 참 좋은 곳인데 워낙 오지 마을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남아있을 수가 있나."

박대섭 노인회장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70년대까지만 해도 수묵리 전체 인구가 40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반에 반도 남지 않았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수영(水營)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연중 마르지 않는 물을 잘 다스리며 땅을 일구고 살아 온 수영골이지만 마을을 힘차게 이끌어 갈 젊은 사람들이 고갈되는 것은 농촌 마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걱정거리임을 이 곳 주민들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농사가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 건 당연한 거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그래. 우리가 농촌을 지키고 있는 만큼 노인이 살기 좋도록 좀 해줘야하는 거 아녀? 농사 지어 남기기는 애당초 힘들고,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노인들이 살아가는데 난방 기름도 면세 좀 해주고 말이야. 마을에 땅이 남아도 붙일 사람이 없어 그냥 두는데,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만한 여건을 나라에서 좀 적극 마련해주고 그러면 참 좋겠어. 그래야 마을에도 활기가 돌지."

▲ 18일 늦은 오후, 수영골 주민들이 경로당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주민들은 입을 모아 젊은 사람이 한둘이라도 있어 마을에 활력이 넘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옥천의 얼굴로 수영골 가꿔지길

10년 가까이 수묵리 이장을 맡았고 지금은 또 수영골 일을 돌보고 있는 최판기 수영골 반장은 "'예전엔 수묵리 사람들이 벼농사 지어 이원 사람 다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며 수영골을 소개한다.

"영동이랑 경계이기도 하고 지역의 맨 끝에 있다보니 도로 포장도 제일 늦고 농로 정리가 안 된 곳도 많아 솔직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농촌 마을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노인들이 많아 집수리를 별로 안하니 마을의 첫 인상이 썩 좋지는 않죠. 그래도 수영은 끝이자 옥천의 제일 처음 아닙니까? 수영골을 지나 영동을 오가는 차들이 참 많은데 마을외관 정비를 잘 해놓으면 옥천의 이미지가 한결 좋아지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이 많이 듭니다."

경관은 둘째치고라도, 마을이 영동과 경계에 있다 보니 실제 상당수 주민의 농지가 영동 마곡리에 있는 것도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단다.

농로 포장부터 비료 지원 등등, 주인은 옥천 사람인데 땅은 영동에 있다 보니 가끔은 옥천과 영동의 행정 기관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수영골 주민들을 오갈 데 없게 만드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지만 최 반장은 "그래도 수영골이랑 마곡리 주민들은 웬만해서 주민들 간에 다 알 정도로 가까이 지낸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영동군에서도 역시 최고 오지 마을로 꼽히는 마곡리의 이장 김정근씨도 원래 고향은 옥천읍 성암리라 수영골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게다가 마곡리 주민 대부분이 그렇듯, 김정근 이장 역시 학교는 이원면의 대성초, 이원중을 나왔기 때문에 '군을 초월한 우정'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최 반장과 마을을 돌아보다 '이원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5년이라는 긴 옥살이를 치러야 했던 수영골 출신 김용이 선생의 묘소를 찾게 됐다.

마을 옆 야트막한 동산에서 수묵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선생의 묘소 옆에는 '애국지사 김용이'라는 새김이 햇빛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나는 기념비도 서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묘소가 여기 있다는 것도, 선생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이 지금 우리 고장의 현실이다.

수묵리 이장을 맡는 동안 마을에 항일운동 기념비라도 세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는 최판기 반장이 김용이 선생의 묘소를 둘러보며 기자에게 말을 건넨다.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이원독립만세운동의 근거지인 수묵리 묵방, 수영골의 역사적 의의를 군 차원에서 좀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기념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몇 번이나 그런 이야기가 나왔지만 비석 하나 세우려 해도 마을 자부담을 이야기하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뜻 깊은 역사의 현장입니까? 우리 마을에서 매해 3.1절마다 기념행사도 열고 지역 주민들이 독립운동의 역사도 배워갈 수 있는 그런 곳이 되길 정말 바라봅니다."


1919년 3월27일 정오, 이원 장날 맞아‘조선독립만세’ 가 함성으로 울려퍼졌다

"탕!탕!탕!"
어디선가 쏜 총알이 하늘을 가른 가운데, 총소리의 굉음에 놀란 만세 대오가 순간 질서 없이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칠세라 일본 헌병은 주동자인 수묵리 육창주, 허상기, 김용이를 헌병주재로소 끌고 갔다. 곧 대열을 정비한 수백 명의 주민들은 그 길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주재소를 찾아가 시위를 벌였다. 헌병의 무차별한 발포에 2명의 주민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 불과 4시간 전인 1919년 3월27일 정오. 장날을 맞아 유난히 붐비는 이원시장이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술렁이기 시작했다.

▲ '애국지사 김해김공휘용이공적비' 수영골에서 잠드신 김용이 선생의 묘소 옆에는 이원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선생의 공적을 기린 비가 서 있다.

"조선독립만세! 일본은 지금 당장 조선을 떠나라!"
"조선은 자주 독립 국가이다! 조선의 독립은 정당하다!"

3월1일부터 전국을 휘감기 시작한 독립만세의 열기가 드디어 이곳 이원 땅에도 닿은 것일까. 장터에 모인 주민들은 거대한 구름이 되어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를 이끌던 33살의 청년 육창주가 주민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주민 여러분, 지금 나라 곳곳에서는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경성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보고 조선이 머지않아 독립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조선의 주권을 우리가 찾아옵시다!"

육창주의 힘찬 외침이 잦아질세라 20살을 갓 넘긴 허상구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창주 형님, 상기(허상기, 허상구의 형) 형님과 함께 그 만세 현장을 보았습니다. 타 지역에서 이렇게 조선의 독립을 외치고 있는데 같은 민족인 우리가 가만히 있는 다는 것은 부끄럽고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난 수묵리 사는 김용이인데, 이대로 가다간 굻어죽든, 맞아죽든, 억울해 죽든 왜놈 등쌀에 너도 나도 살아남질 못할껴. 오는 길에 주막에서 술도 한 잔 걸쳤겠다, 오냐 그래 조선놈이 센가 쪽발이가 센가 한 번 붙어보자고!"

짧지만 강렬했던 4시간여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는 충분했으나 운동을 이끌었던 육창주 외 7명이 결국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특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수묵리 육창주, 허상기, 김용이는 5년이라는 긴 형을 살며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묵방과 새별이 소개됐던 지난 호 이야기에도 언급됐지만, 수묵리는 우리 고장에서 가장 많은 항일애국지사를 배출한 마을이다. 현재 국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라있는 34명의 옥천 출신 애국지사 중 육창주, 김용이, 허간, 허상기, 허찬, 허상구 선생 등이 수묵리(1919년 당시 이남면 수묵리) 출신인 것은 물론, 당시 수묵리 주민들의 굳은 결의가 없었다면 이원독립만세운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 어디에서도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독립운동사 문헌과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만세운동의 기억이 전해지고 있다.

내년이면 이원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0년. 늦었지만 이제라도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해 100년이 되는 2019년에는 지역 주민이 다함께 수묵리에 모여 뜻 깊은 행사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 이원면 수묵리 수영골

▶지난주에 소개됐던 , 가로등이 없어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은 수묵리 새별마을에 이원면이 가로등을 달아주기로 했다고 주민들이 전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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