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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마을탐방 [227] 동이면 우산1리 안마, 메쥐골
신마을탐방 [227] 동이면 우산1리 안마, 메쥐골
  • 정순영 기자
  • 승인 2007.07.12 17:44
  • 호수 8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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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가 내려다보는 조용한 산골마을

옥천에서 대전 방향으로 금강휴게소를 지나 폐고속도로로 들어서면 ‘우산2리’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먼저 만나게 된다. 으레 2리를 지나 1리로 갈 수 있겠거니 그 길로 들어섰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 인내심을 가지고 우산2리를 지나 조금 더 가다보면 우산1리로 들어가는 좁은 내리막길이 나온다. 내리막길을 내려가 작은 굴까지 지나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곳, 산골 마을 ‘우산1리’를 만나보자.

▲ 우산1리의 큰 마을 안마.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든 지형이라 대부분 자급자족 수준 정도의 농사를 짓고 있다. 골짜기 안에 들어 있다 해서 `안마'라 불린다.
황소가 내려다 보는 마을 우산리
우산리는 1914년 이남면 우두미리(牛頭尾里)와 산서동(山鼠洞)이 합쳐져 이원면에 편입될 때, 우두미리의 우(牛)와 산서동의 산(山)이 합쳐져 생긴 이름이다. ‘우두미’란 이름의 유래는, 지금의 우산리와 이원면 지탄리 사이의 산이 큰 황소가 누운 것 같다 하여 ‘우두미’라 이름 붙였다 전해진다. 산서동은 옛말로 ‘메쥐골’인데 이를 한자화 하면서 ‘뫼’를 산(山)으로 ‘쥐’를 쥐 서(鼠)로 써서 ‘산서동’이라 이름 붙였다. 이원면이었던 우산리는 1973년 행정구역 개편 시 동이면에 속하게 되면서 1,2리로 분리된다.

지번이 먼저니 당연히 우리가 1리지
우산 1,2리를 정하던 당시 두 마을 사이에는 어느 곳을 1리로 할 것이냐를 두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두 마을 주민들은 토지대장을 싸들고 동이면에 가서 결판을 냈는데 지번이 먼저 시작되는 곳을 1리로 하자는 우산1리 주민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지번이 정해지던 당시만 해도 동이면을 통해 우산리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이원면 지탄리를 거쳐 가는 것이 유일한 길. 그러다 보니 지번도 이원면에서 넘어 오는 곳부터 먼저 시작되었고 그 덕에 지금의 1리가 1리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이면에서 들어오다 보면 먼저 나오는 마을을 흔히 1리라 여기기 쉽지만, 마을로 들어오는 옛 길을 먼저 따졌던 남다른(?) 사연으로 우산리만은 2리가 먼저 나오게 됐다. 우산1리는 다시 안마와 메쥐골이란 두 개의 자연마을로 나뉜다.

훈훈한 인심에 물맛도 꿀맛
안마에 있는 우산1리 마을 회관 앞 정자에서 담소를 나누던 주민들이 인사를 건네는 낯선 젊은이를 오랜만에 만난 손녀 대하듯 반갑게 맞아준다.

우산1리 부녀회장 임춘조(65)씨는 “워낙에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새댁일 때는 무서워서 화장실도 못 갔다”며 “그래도 외지와 동떨어져 그런지 마을 주민들 간 단합은 더욱 잘 된다”고 말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김은자(64)씨가 국수를 좀 삶았다며 회관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안마의 물맛이 유난히도 좋은 것인지, 멸치국물이  아닌 냉수에 면을 말아 간장을 넣었을 뿐인데도 국수 맛이 꿀맛이다.

▲ 일부러 모은 것도 아닌데 어느새 열명이 넘는 주민들이 회관 앞 정자에 모였다. 척박한 자연 환경과 싸워 온 역사 덕에 주민들끼리의 단합은 어느 마을 못지 않다.
길은 좋아졌지만 주민은 많이 줄어
국수를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마을 이장과 주민 몇몇이 회관으로 들어온다. 올해로 3년째 마을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는 박영열(67) 이장.

“제가 젊었을 때만 해도 메쥐골과 안마를 합쳐 80호가 넘게 살았지요”라며 우산1리의 근황을 들려준다. “지금은 메쥐골에 2호, 안마에 32호 정도 살고 있으니 참 많이도 줄었죠? 두 마을 합쳐도 주민이 40명을 겨우 넘을 겁니다. 여기가 1리이긴 하지만 우산2리가 평지이고 사방으로 트여 있어 학교도 보건진료소도 다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마을은 워낙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라 오가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안마라는 마을 이름도 ‘안에 들어와 있는 마을, 즉 내촌(內村)을 의미합니다.”

박 이장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주민들의 애환이 참 많았다”며 “특히 교통 문제는 말로  다 못한다”고 말했다. 폐고속도로와 이어진 마을 진입로가 생기기 전까진 우산1리로 오기 위해서는 금강유원지의 소수력발전소를 건너야만 했다. 박 이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슬비만 내려도 발전소 둑이 물에 잠기는 탓’에 주민들은 꼼짝없이 발이 묶여야 했다.

다행히 폐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길이 생겨 더 이상 비가 내려도 마을이 고립될 일은 없어졌지만 요즘도 주민들은 1시간을 걸어 금강휴게소까지 가서 옥천 가는 직행버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금강휴게소에서 일해 자식 공부시켰어
“70년대까지 누에로 생계를 꾸리다 그게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못할 즈음부턴 금강휴게소에서 조리사, 청소, 관리요원 등의 일을 하기 시작했어. 마을 사람들 사이엔 ‘누에로 자식 중학교 보내고 금강 휴게소로 자식 대학 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을의 생계에 금강휴게소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서대연(72) 노인회장은 “우산1리 주민들과 금강휴게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금강유원지가 생기면서 비로소 마을에는 동이면 쪽으로 들어오는 길도 생겼고 마을의 도로도 포장되기 시작했단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금강휴게소라는 새로운 일터가 생긴 것.

너른 평지가 없어 큰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농사를 지어도 비만 오면 ‘섬’이 되어 버리는 우산1리에서 예전부터 ‘농업’은 주민들에게 큰 소득원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 현재도 대부분의 젊은 남성들은 외지로 일자리를 찾아 나가 있고 젊은 여성들은 금강휴게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농사는 마을에 남은 노인들이 자급자족 수준으로 조금 짓고 있을 뿐이다.  

마을회관도 주민들의 정성으로
지금의 마을 회관에서 300m 쯤 더 가다보면 시멘트로 반듯하게 지어진 예전 마을회관이 나온다. 1978년 주민 박정운씨가 땅을 내놓고 김창종씨가 내부시설을 기증해 회관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사용하는 신마을회관도 주민 황영기씨가 기증한 땅 위에 지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마을회관은 우산1리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어 척박한 환경에 맞서 살아 나갈 수 있는 힘을 모아주는 곳이다. 일년중 어버이날, 보름날, 복날에는 마을회관 앞에서 큰 잔치도 벌어진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한참이 지나도 해가 떠 있는 여름이지만, 우산1리는 오후 5시쯤 되자 벌써 저녁의 어스름이 느껴졌다. 일찍 해가 지는 산골 마을의 하루가 그렇게 또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한 10년 후면 마을에 더 이상 남아있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고 지금 마을 주민들이 더 나이가 들면 말이죠. 어쩔 수 없죠. 그게 자연의 순리이니까요.” (박영열 이장)

“이게 누구여, 이장님 오셨네”


▲ 오랜만에 메쥐골을 들른 우산1리 박영열 이장과 안마 주민들이 메쥐골 유복순, 손길애씨와 포즈를 취했다. 사진 뒤로는 언덕 위에 우뚝 서서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메쥐골은 여기서 멀리 있냐고 안마 주민들에게 묻자 손사래를 치며 거길 어떻게 가려고 하냐며 걱정을 내비친다. 메쥐골. 우산1리의 또 다른 자연마을로 ‘산서동’이라고도 불린다. “메쥐골에 요즘 사는 사람이 있나? 워낙 발길 닿기가 쉽지 않은 곳이라.”

“왜, 그래도 할머니 두 분이 마을에 살고 계시잖아. 지난 봄 잔치 때도 내려 오셨는걸.” “기자 양반, 나랑 같이 가봅시다. 할머니들 어떻게 지내시는지 나도 한 번 들러봐야겠소.”

박영열 이장과 서대연 노인회장의 길 안내로 메쥐골을 찾아갔다. 안마에서 폐고속도로로 다시 나와 4km 쯤 달리면 도로 옆으로 까딱하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샛길이 나오고 그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메쥐골이 나온다.

한 때는 20호 정도 살았다지만 지금은 가끔 들리는 사람들을 빼곤 손길애(77), 유복순(80)씨 두 가구가 거의 유일하게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손길애, 유복순씨가 박 이장을 보자 등을 얼싸안으며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메쥐골 주변으론 험한 산들이 마치 가마처럼 둘러쳐져 있고 마을은 그 가마 안에 들어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동전화도 전혀 터지지 않고 마을로 진입하는 길도 3년 전 박 이장이 도로를 포장하면서 그나마 차 드나들기가 쉬워졌다. 안마에서 마을 잔치라도 있으면 박 이장이 할머니들을 모시러 온다고. “겨울에 눈이라도 많이 오면 완전 징역살이 하는 거지. 가물면 식수가 부족해 걱정이고 비가 많이 오면 산사태 날까봐 걱정이여. 그려도 워쪄. 평생을 여기서 살았는데.”(손길애 할머니) 

“여기는 꼭 절간 같어. 명절에 자슥들 올 때 말고는 사람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야지. 생각지도 못혔는데 오늘 이장님이랑 기자 양반이 와서 내가 월매나 반가운지 몰러.”(유복순 할머니) 서대연 노인회장은 “메쥐골이 바로 옥천과 영동의 경계라 우산리 사람들은 영동군의 심천장을 더 자주 보러 다녔다”며 젊은 시절의 추억을 들려준다. 

“한참 나이일 때, 심천에 7월 백중장이 서면 보리 한 말, 밀 한 말 싣고 메쥐골 저 산을 넘어 가서 내다 팔았지. 그 돈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무들하고 술 한 잔 하는 것이 어찌나 재밌었던지. 지금은 영동 가는 길도 포장이 되었지만 그 시절엔 그 험한 20리 길을 짚신을 신고 걸어 다녔어.”

이제 그만 내려 가봐야겠다며 박 이장이 일어서자 왜 벌써 가냐며 두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듯 했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는 두 할머니의 모습에 기자의 콧등도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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