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222] 욱계·주막말·논골
신마을탐방 [222] 욱계·주막말·논골
  • 정창영 기자 young@okinews.com
  • 승인 2007.04.19 16:08
  • 호수 8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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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장계리는 옥천향지 1739년 기록이나 1890년 기록에 보면 장사리로 58호에서 60호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군북에 속해 있던 장사리와 욱계를 합하여 장계리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 또 다시,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그 관할구역이 군북면에서 안내면으로 소속 되었다.

장계리라 부르게 된 것은 두 마을을 합하면서 장사리의 `장'자와 욱계의 `계'자를 한자씩 합하여 장계리라 하였다. 욱계는 아주 옛날에 생긴 마을이 아니고 한자가 생활화한 후에 생긴 마을로서 마을이 언덕진 곳에 있고 마을 가운데 작은 하천이 있으나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고, 그 외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바닥이 마른 내(川)이었기 때문에 햇빛에 돌이 반짝이며 빛이 난다 하여 `욱계'라 이름지었다 한다.

장계리의 자연마을로는 진모래, 욱계 주막말, 개경주, 논골 등이 있었으나 대청댐 수몰로 인하여 대부분 인근 마을에 조금씩 옮겨와 살고 있다. 이번호에는 욱계, 논골, 주막말을 소개한다. 

▲ 욱계.주막말.논골 위치도
옥천에서 안내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따라가면 군북 소정리를 지나 장계교가 나온다. 장계교가 시작되는 지점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장사리가 오른쪽에는 욱계, 논골, 주막말, 개경주 등의 자연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레스토랑 ‘뿌리깊은 나무’의 안내판을 이정표 삼아 10여분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욱계가 나온다.

◆명절조차 외로운 마을
4월 봄바람이 살랑이기 시작하는 이 때 대다수의 평범한 마을은 농번기가 시작되며 일손이 달린다. 적은 인구일지언정 주민들은 논이며 밭이며 바쁜 걸음을 오가며 한 해 농사를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다. 보통의 시골 마을 모습이다. 하지만 욱계의 4월 풍경은 좀 다르다. 도통 인적이 보이질 않는다. 마을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느티나무 만이 낯선이를 반긴다. 

그저 한없이 고요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모습은 발견할 수가 없다. 안되겠다 싶어 무작정 아무 집이나 찾아갈 요량으로 마을을 다시 한번 둘러보니 영락없는 달동네 모양새다. 사람살이가 팍팍해 달동네가 아니라 느티나무 옆에 있는 집 한 채를 빼고는 모두 비탈을 따라 위로 한 채씩 차곡차곡 얹혀 있는 모습이 달동네의 구조를 닮았기 때문이다.
 
달동네 1층쯤 되는 위치에 있는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욱계 마을 반장 박찬웅(70)씨를 만났다.
 
“어렸을 적에는 그래도 23호 정도는 살았었어. 그런데 수몰되면서 이제는 7집 밖에 안 남았네. 허허허...”
 
박씨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인생이다. 산골에 자리잡은 욱계는 예전에도 그리 사람이 많이 산 마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합쳐보면 백명 이상 살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명절이면 아랫마을 논골과 주막말 어른들에게 세배도 드리고 멀리 장사리에도 나가고 밤새 윷도 놀고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고 한다.
 
“다 옛날 일이여. 그때는 명절만 되면 대단했지. 근데 요새는 어떤지 아는가? 마을에서 우리집만 명절을 쇠. 다른 집들은 다들 밖으로 나가. 서울로, 인천으로 자식들 집이나 큰집으로 명절 쇠러 떠나고 나면 동네가 스산하기 이를 데가 없어. 명절 때 오히려 사람이 더 줄어들어. 희한한 일이지.”

▲ 예전 욱계 마을에는 금씨가 제법 살았었다. 금씨 제실 마당가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사이로 대청호가 고요하게 흐른다.
◆둥구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하이킹의 추억
7집이 사는 욱계에는 마을의 중심인 둥구나무가 있다. 김진홍(77)씨는 둥구나무가 이제 환갑 잔치 할 때라고 말했다. 그 자신 젊었을 때 동무들과 함께 지금의 둥구나무를 심었다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둥구나무 바로 오른편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아래쪽으로 휘어있는 길을 따라가면 논골이 나오고 위쪽으로 굽어있는 길을 따라가면 주막말이 반긴다. 마을 사람들은 주막말을 종점이라고도 부른다. 마지막 마을이기 때문이다. 논골에는 두집, 주막말에는 셋집이 살고 있다. 

논골에 들어서니 김순애(51)씨가 돛나물을 다듬고 있다. 마당가에 널려 있는 이불 빨래가 강바람에 펄럭이는 것이 곧 떨어질 것만 같은데도 돛나물 다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 넌지시 한마디 건넨다.
 
“아저씨 맛난거 해드리려고 나물 하시나봐요?” 
“아니여, 아저씨는 벌써 밥 먹고 있는데... 근데 누구여?”
 
이래저래 왔노라 하니 이 동네에는 뭐 신문에 나갈 것도 없을 거라고 기를 꺾어 놓는다. 그래도 친절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아 천만 다행이다.
 
“우리 아저씨한테 물어봐. 여가 고향이니까 그래도 뭔가 좀 말해줄지도 몰라.”

남편 조동석(58) 씨의 고향은 주막말이다. 젊은 시절 잠깐 옥천에 나갔다 1985년 귀향하며 새로 터를 잡은 것이 지금의 논골이다. 논골에서 그는 주로 고기잡이를 한다.
 
“여가 왜 논골이냐면 저기 비탈 따라 옛날에는 논들이 좀 있었나벼. 그래서 골짜기에 논들이 죽 늘어섰다고 논골이라 불렀다지 아마. 근데, 그것도 다 옛말이여. 그나마 있던 비탈논들도 수몰되면서 많이 없어졌고 지금은 농사져서는 못 살아.”
 
조씨의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논골은 어땠을까? 욱계의 노부부와는 다른 힘찬 기운이 그의 앨범에는 남아 있었나보다.
 
“그러니까 그때가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수몰되기 전에 친구들하고 수북리로 자전거 하이킹도 가고 여기저기 많이 쏘 댕겼어. 100명도 넘게 살았으니까 이 좁은 동네에 그 정도 살았으면 얼마나 복작복작했겠나 생각해보라고. 남 부럽지 않았어.”
 
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의 회상은 잠깐, 그에게는 오히려 현실적인 고민이 더 가깝다.  지금도 고령화가 심각한 마을에 그나마 남아있는 노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나면 자연스레 마을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그것이다.
 
고향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큰 슬픔임에 틀림없다. 사람이 살지 않은 곳에 삶이 있을 수 없고 삶이 없는 곳에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기는 힘들다. 그래서 조씨는 쉽지 않은 줄 알면서도 소망을 품어본다.
 
“아직, 우리 동네에 상수도가 없어. 작년 가뭄에는 면에서 소방차로 물을 실어다줘서 먹을 정도로 물부족이 심해. 또 동네로 들어오는 길이 시멘트로 어설프게 포장된 상태로 몇 십 년째인지 몰라. 상수도도 들어오고 길도 포장도로로 잘 닦아 놓으면 그래도 사람들이 좀 오지 않을까 싶은데, 유권자가 적어서 그런가 신경도 안 쓰더라고.”

▲ 김진홍씨가 자신보다 한창 어린 둥구나무가에 앉았다. 김쓰는 스물예닐곱 되던 해에 동무들과 직접 이 둥구나무를 심었다.
◆학생이 방학하면 버스도 방학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보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찰랑이는 대청호의 잔물결이 햇볕에 반짝인다. 사람 살이는 힘들지 몰라도 경치 하나 만큼은 참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욱계 대식구 안주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3년째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이경희(44) 씨는 욱계 고원에서 평지로 내려오며 반평생을 살았다.
 
20년 전 이씨가 결혼했을 때 시댁은 달동네 욱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장을 보고 오면 비탈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아무리 젊은 새댁이라지만 매일 그 비탈을 오르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애들 학교 때문에 아침 7시에 딱 한번 버스가 들어와요. 그래서 애들이 방학하면 버스도 방학해요. 교통이 불편하지만 인구가 적어 노선을 늘려달라고 못하는 것이 우리 마을 실정이에요.”
 
새댁의 걱정이 단순한 기우가 아닌 정말 고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것이라면 산골 벽촌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일지라도 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갈비까지 물이 차서 '갈비봉' - 터줏대감 조선구씨가 들려주는 옛 이야기

▲ 조선구씨
“저기 왼쪽으로 보이는게 갈비봉이고 바로 옆에 있는게 이슬봉이여. 옛날에 어느 장군이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개벽이 일면서 비가 오더라는거야. 그래서 급히 산에 올랐는데 아, 물이 요 가슴팍 아래, 갈비있는 데까지 찼더라는 거야. 그래서 이름이 갈비봉이여, 그 장군이 옆산을 보니 거기는 딱 이슬 한방울 정도 높이 남겨놓고 물이 다 찼지. 그래서 이슬봉이여.”
 
터줏대감 조선구(72)씨는 70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아니 6대째 살고 있는 집안 경력을 더하면 그 세월의 내공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주막말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 또한 집안과 뗄려야 뗄 수가 없다.
 
“우리 할머니가 옛날에 강가에서 주막을 했었어. 일제 시대 때 왜정놈들이 토지측량을 하면서 주막이 있으니까 그 당시 지도을 만들때 주막마을이라고 기록을 한거야. 그때부터 주막마을, 주막말이 된 거지.”조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요 산봉우리 돌아서 가면 며느리재라고 골짜기가 하나 나와. 며느리가 처음 친정을 갈 때 옛날에는 시아버지가 따라 가는 풍습이 있었어. 아, 근데 해필이면 그날 비가 오는 바람에 며느리 옷이 착 달라붙더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 노망 난 시아버지가 동이 났던 모양이야. 며느리가 도망가다가 죽었다고 해서 거기 골짜기가 며느리재가 됐어.”
 
이 밖에도 용댕이 전설, 금강 여울에 관련된 옛 이야기 등 조씨가 들려준 동화들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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