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211] 군서면 은행리(2) 아랫양심이
신마을탐방 [211] 군서면 은행리(2) 아랫양심이
그 넓은 광장엔 햇볕만 가득 들어차고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7.01.11 15:57
  • 호수 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은행리는 군서면 은행정리에 속해 있던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을 전면 조정할 때 사정리와 은행리로 구분되었다. 관성동호회에서 발간한 옥천향지에 따르면 1739년 기록에 군서면 은행정리라 하여 56호가 살았고 1890년에는 67호가 살았다고 한다. 은행리의 본디 이름은 양심이다. 그리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마을이름은 아니다. 아쉽게도 그 이름의 뜻이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대신 은행리로 불리게 된 연유는 전해 온다. 조선 초기 마을을 지나던 한 도사가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으니 ‘은행리’라 부르면 잘 살게 될 것이라 해 그 때부터 은행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개뿐인 자연마을도 상은과 하은으로 불린다. 물론 윗양심이와 아랫양심이라는 친밀한 우리말로 부르기도 한다. 이번호에는 아랫양심이(하은)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 아랫양심이 마을 경로당 앞에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 내려 앉았다. 해바라기를 하던 마을 주민들은 낯선이에게 마을과 관련한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놓고는 막걸리 한 잔 하러 가자며 자리를 옮겼다.
아랫양심이는 참 넓다. 두 개로 나뉜 마을의 면적으로 볼 때 아랫양심이가 은행리의 본 마을이라 할 수 있다. 70호가 넘는 마을은 어지간한 면소재지에 버금갈 정도다. 마을초입엔 널찍한 공동 광장이 펼쳐져 있고 노인정과 보건진료소, 농기계보관창고도 갖추고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좌우로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주요 소득 작목은 포도라고 한다. 칠레와 FTA가 체결되고 많은 농가들이 폐농신고를 한 후 보상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여전히 포도는 아랫양심이의 중요한 작목이다. 40호가 넘게 포도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큰돈이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나락농사보다는 낫다. 

“요즘엔 수매도 안하니까 그냥 우리 먹을 거나 짓고 남으면 내다 파는 거지 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경로당 마당에 나온 주민들의 얘기다.

▲ 골칫거리가 된 새마을 회관. 주민들은 건물을 철거하고 찜질방이라도 짓기를 희망하고 있다.
◆마을에 찜질방 들어섰으면 

너른 마을 광장엔 크고 작은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마을소개비 곁에는 고인이 된 육완득씨의 송덕비와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는 김재덕씨의 공적비가 서 있다. 둘 모두 아랫양심이가 고향인 사람들로 고향을 위해 따뜻한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고마움을 담아 비석을 세웠다. 

그 지척에 큰 건물 하나가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다. 일명 ‘새마을 회관’이다. 이미 20여 년 전 이야기지만 정부에서 특수시책으로 이장사무실을 포함한 다양한 시설이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기억으로는 정부에서 5천만 원 정도를 지원했고 나머지 4천만 원 정도는 주민들이 자부담으로 보태야 했었다. 

“그 때 4천만원이면 정말 큰돈이었어. 동네에 가지고 있는 돈이 없으니까 자부담분을 모으려고 주민들이 고생 많았지. 그때 밖에 나가 있는 출향인들이 도움을 많이 줬어. 그렇게 고생해 지은 건물이 저 모양이니. 건물 지붕이 다 내려앉아서 고쳐서 쓸 수가 없어” 

한 20년 밖에 안 되었다는데 그 모양이었다.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는 건물에 대한 대책마련이 필요했다. 주민들은 벌써 그 공간에 무엇이 들어섰으면 좋겠는지 어느정도 의견을 모은 모양이다. 

“우리 동네가 자연마을 중에서는 무척 큰 동네라고. 근데 찜질방이 없어서 주민들이 많이 섭섭해. 이장이 추진 중인 거 같기는 하던데. 빨리 생겼으면 좋겠어. 일하고 들어온 주민들이 찜질도 하고 목욕도 하면 좋잖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면서 그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주민지원사업비가 집행이 되었는가 보다. 주민들은 그 예산의 대부분이 마을 진입로 등 도로 개설에 들어간 만큼 앞으로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쓰였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 재원을 활용해서라도 빨리 찜질방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그 맞은편으론 농구대 하나가 농기계보관창고 벽에 붙어 쓸쓸하게 서 있다. 링에 달려 있어야 할 그물망도 떨어진 채 말이다. 이젠 그곳에 농구공을 던져 넣을 아이가 동네엔 거의 없다. 방학이나 되어야 할머니 집을 찾아온 아이들로 조금 소란스러울 뿐이다. 아이들이 맘껏 뛰어다닐 수 있는 넓은 동네 마당이 더욱 쓸쓸하다.

◆경로회 운영도 자랑거리 

양심이 마을 한 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산이다. 산들이 강원도의 험한 산처럼 높지 않아서 그렇지 분지형태를 이룬다. 망덕산과 말목재, 닭재 등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있다. 주민들의 과거 삶은 이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와 무관하지 않다. 

▲ 마을 위치도
교통편이 좋지 않았던 시절 주민들은 대전까지 장을 보러 다녔다.  대전을 지척에 둔 경계마을이니 그럴 수밖에. 지금은 터널이 뚫린 곤룡재가 주요 통행로였다. 그 재를 넘어 다녔다. 새끼줄을 꼬고 가마니도 짜고 땔감을 해서 대전으로 넘어갔다. 

대전 인동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기 위해서였다. 시계도 없던 그 시절 새벽닭이 우는 소리에 등짐을 메고 산을 넘기 시작해 대전 경계에 들어설 때쯤이면 여명이 되었다. 

“그때야 어디 버스가 있어. 옥천만 나가려고 해도 걸어가야 했는데.” 
“보리쌀 짊어지고 넘어가면 나는 빨리 팔고 넘어 왔으면 좋겠는데 어른들은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한참을 세워 놓고는 했지. 겨울이면 춥고 얼마나 고생스러웠던지.” 
“그게 그렇게 오래된 얘기가 아니야. 우리가 쌀밥 먹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정겹다.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친밀감을 더욱 높여주는가 보다. 그런 이야기를 건넸더니 마을의 경로회 이야기를 해준다. 어디다 내 놓아도 안 빠질 정도로 운영이 잘 되고 있다는 얘기다. 환갑을 지나면 가입할 수 있는 마을 경로회에는 지금 45명 정도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하긴 뭘 해, 회비 모아서 경로당 유지 보수 관리하고 일 년에 한두 번 바람 쐬러 밖에 나가고, 간혹 맛있는 거 해먹고 그런 거지.” 

별 것 아닌 것처럼 얘기하지만 경로회 모임을 통해 주민들이 갖는 즐거움이 무척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쑥 찾아온 낯선 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던 주민들은 마을에 있는 조그만 담배가게로 막걸리를 마시러 간다며 자리를 뜬다. 주민들과 헤어진 후 마을을 돌아본다. 무척 넓다. 

군서면에서는 드물게 천석꾼 김씨가 살았다는 동네다. 그런 큰 동네가 텅 빈 것처럼 고요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볕 잘 들고 인심 좋은 아랫양심이의 그 너른 광장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찰 날을 기다려 본다.

[마을 이름 유래가 된 은행나무]
“은행나무를 보면 왜 효자목인지 안다”


▲ 마을이름 유래가 된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마을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논밭이 주변에 있지만 과거엔 그곳이 마을의 초입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은행나무가 영 생뚱맞다. 위치도 그렇고 수종도 그렇다.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고 지금 포장된 마을의 진입로를 고려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니 그곳이 마을의 초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보호수 안내판을 보니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수령은 대략 320년(지금은 344년) 수고는 16m라 기록되어 있다. 큰 나무는 세 그루지만 뿌리에서 올라온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줄기들이 꽤 많이 뻗어 마치 은행나무 군락을 보는 듯하다. 꽃눈을 달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건강상태는 아직 좋은 것 같다.

도사가 이 나무를 보고 마을의 이름을 바꾸라 제안했다는 전설 말고도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온다. 마을이름을 바꾸라고 제안한 도사는 무학대사로 당시 은행나무를 살펴보다가 ‘나무가 곧 죽을 텐데 의로운 사람이 지나게 되어 괜찮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예언 후에,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조헌 선생이 의병들과 함께 이 나무 밑에서 쉬어 가는데 한 의병이 실수로 나무 둥치를 태웠다.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은행나무의 뿌리에서는 새줄기가 올라와 쓰러지는 둥치를 지탱해 주었다고 한다. 

그 은행나무가 왜 효자목으로 불리는지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유래를 떠올리며 은행나무 군락을 다시 살펴보니 한 가족 같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힘든 시간에 맞서고 있는 모습이다. 무학대사 전설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수령은 600년이 넘은 나무인데…. 

여하튼 보호수의 관리는 너무 아쉬웠다. 보호수 안내 표지판은 녹이 슬어 군데군데 글씨가 벗겨져 있었고 나무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보다 수백 년을 더 살아낸 은행나무에 대한 예우치고는 좀 섭섭하다. 관심이 필요하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