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94] 안내면 현리
신마을탐방 [194] 안내면 현리
오일장 풍성함 가득하던 곳엔 고요함만...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4.21 00:00
  • 호수 8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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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현리는 신라 때부터 고려 때까지 현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현리다. 자연마을로는 창말과 신촌, 탑산이동이 있다. 신촌마을은 현재 대청댐 밑으로 가라앉았다. 현리를 옛 어른들이 창말이라고 부른 것은 안읍창이라는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옥천향지는 안읍창이 근방에서 거둬들인 각종 조세와 물품을 보관했던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안읍창과 불과 2km 떨어진 곳에 화인진이라는 금강나루가 있었기 때문에 강에 물이 불면 이를 서울등지로 운반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한때 현이 들어설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했던 현리가 지금은 고요함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 편집자 주

▲ 안내면 현리 중심가 전경
깜짝 놀랐다. 안내면 현리로 들어서면 한동안 장이 섰던 곳을 중심으로 상가들이 형성돼 있다. 덕분에 조용하지만 역동적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마을탐방을 위해 마을 안쪽을 돌아보니 사정이 영 그렇지 않았다.

처음엔 안내소방파출소 옆 골목을 따라 정곡방향으로 올라섰다. 축사와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는 그곳은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규모 주거지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돌아 나와 면사무소 앞을 지나 정방 쪽으로 가다 좌측을 보니 계획적인 주택지가 보였다.

주민들에 따르면 1970년대 주택지를 조성해 농민들에게 저리로 주택 건축 자금을 융자해 주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농촌 주거환경 개선사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에 아무리 저리융자라 해도 선뜻 자금을 받아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형편이 되는 농민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 공무원들이 많이 살았어요. 당시엔 다들 나무를 해다 땔 때 거기는 연탄을 땔 수 있었죠. 그래서 부엌이 굉장히 깊어요. 그 당시엔 나름대로 현대식으로 지은 거죠.”

최근 그 주택지로 이주한 한 주민의 얘기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20여 호 정도 늘어선 근대 주택이 나름대로 현리의 신주거지역이다.

◆빈집 세월에 허물어져 가고
다시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눈에 봐도 오래전부터 형성된 마을이라는 느낌이 쉽게 들 정도로 꽤 넓은 면적의 주택지가 형성돼 있다. 골목은 모든 주택들을 휘돌아 얼기설기 엉켜가며 서로서로를 연결시켰다.

▲ 윗말 곳곳엔 빈집들이 많았다. 지금 현리의 상황을 제대로 얘기해주고 있었다.
마을이 기대고 있는 야트막한 뒷동산에서 한 바퀴 크게 휘돌아 나가는 골목길은 정방형으로 계획된 요즘 도시의 모습과는 분명 달랐다. 텃밭도 있고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는 집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우리의 골목길이 담고 있는 더불어 사는 모습이 물씬 묻어나는 골목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골목 곳곳에 묻어 있던 그 흔적은 이제 찾기 힘들 정도로 옅어지고 있었다. 고요한 골목길의 적막을 깨는 것은 까르륵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집에서 기르는 개만 요란하게 짖어댔다.

골목마다 주인을 잃고 세월을 이기지 못한 집들이 힘없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한바탕 전쟁이 끝난 후 방치되어 있는 지뢰밭처럼 그렇게 빈집이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드문드문 집이 있는 마을에 빈집이 생기는 것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조밀하게 많은 집들이 어깨를 걸고 늘어서 있다 한 두 개가 비어버리니 그 상실감은 더욱 컸다.

“살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렇지. 젊은 사람들은 다 외지에 나가서 살고 초상이라도 나면 그대로 빈집이 하나 느는 거지.”

방에서 홀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인기척에 문을 연 노인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퉁을 놓는다. 안내면 현리의 빈집은 지금 마을의 사정을 설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기호였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골목길에 다시 사람온기 가득한 집들이 들어서고 아이들의 파란 웃음소리가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누구보다 주민들이 더욱 간절할 것이다.

◆“다 대청댐 때문에 그렇죠. 뭐.”
최영규(50) 이장을 만났다. ‘윗마을에 빈집이 왜 저리도 많은지’ 묻자 최 이장은 잠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대청댐 얘기를 꺼낸다. 지금도 150세대 정도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이지만 대청댐이 들어서고 수변구역으로 묶이면서 아주 고약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장계, 장사리 없어지고, 인포리나 신촌도 몇 가구 안 남고, 그 영향이 큰 거지. 수백 호가 수몰됐는데 오죽하겠느냐고?”

함께 있던 육원근(51)씨도 곁에서 거든다. 인근 수백 호 마을의 중심구실을 하며 영화를 누렸던 현리가 그 주변 마을의 상당부분을 잃었으니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그 직접적인 예로 번창했던 5일장 얘기가 나온다.

▲ 오일장 번성했던 시절 현리의 모습을 얘기해주고 있는 주민들.
지금은 유난히 도로가 넓다는 것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아무럴 것도 없는 현리 삼거리엔 80년대 초반까지 오일장이 섰다. 대청댐 수몰 후 3∼4년 정도 힘겹게 장이 섰지만 결국 상황의 변화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때는 정말 대단했지. 우시장은 더했어. 원남, 안남에서는 물론이고 맥기나 동정리 일부에서도 장을 보러 왔으니까. 그 때는 여기저기서 싸움판이 벌어져야 장이 끝났어.”

“시네마스코프라도 들어오면 진짜 재미있었는데. 동네 애들이 빠방(천막에 구멍을 내는 것을 이렇게 얘기했다)뚫고 들어가서 보다가 걸려 혼나고 말이야.”

“그 때 본 영화가 빨간마후라, 지옥문, 팔도강산 같은 거였구. 김희갑, 박노식, 신영균, 황해 같은 배우들이 날렸지.”

“재밌었어. 먹고살기가 그 때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았지. 담배 수매장이 정방리 쪽에 있어서 수매 때면 북적거리고 인포리 앞쪽 논은 또 얼마나 좋은 옥답이었어. 지금은 다 잠겼지만.”

지금 마을의 모습에 한동안 풀죽어 있던 분위기가 옛 기억을 더듬으며 금방 활기를 되찾는다. 오일장 막걸리 집에 들어선 착각이 일 정도로 서로 장단을 맞추며 주고받는 대화에 호쾌한 웃음소리도 추임새로 들어간다.

최 이장과 함께 있던 주민들은 대청댐 때문에 많은 집과 문전옥답을 잃고 이제는 수변구역으로 묶여 생활의 불편을 겪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어 보인다.

◆그래도 희망의 씨앗을 심는다
안내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외국인주부 한글교실이나 샘물공부방에서 주민들의 희망에 대한 의지가 읽힌다. 면소재지로서 현리의 기능을 되찾기 위한 작은 움직임이다.

“사람이 없다가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엔 어떻게 하나 생각했는데 결국 자리를 만드니까 사람이 있더라구요. 지역의 문제는 지역에서 풀어야 정석이겠죠.”

안내면 주민자치위원회 한 관계자의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당장 가시적인 결과물들이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척박해진 땅에 다시 씨앗을 뿌리는 작지만 소중한 시도가 면소재지로서의 현리에 새로운 희망을 약속하고 있었다.

·최고령 전순태 할아버지에게 들은 현리 이야기·
“옛날엔 목화도 많이 심었지”

“그리 옛날에도 잘 사는 동네라고는 할 수 없었지요. 광작을 하는 집은 몇 안 되고 나머지는 소작을 붙였으니까. 그러다 해방되면서 토지개혁이 일어나고 조금 괜찮았지요.”

   
▲ 안내면 현리 최고령자 전순태 할아버지
안내면 현리 남자 중 최고령인 전순태(83) 옹은 창 건너에 살고 있다. 옛 어른들은 현리를 안읍창말, 지금 전 옹이 살고 있는 37호 국도 건너편을 창 건너라 불렀다고 한다. 아주 옛날에는 수리시설이 변변치 않아 보리를 주로 갈아 먹고, 목화도 꽤 했던 것으로 전 옹은 기억하고 있었다.

“땅도 그리 좋지 않아 어른들이 녹두밭 웃머리라고 했죠. 녹두밭 웃머리는 띠알밭(산자락 등 비스듬히 기울어진 곳을 일군 밭을 이렇게 말했다)같이 곡식이 잘 안 되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제일 안 좋은 땅에 녹두를 갈았었거든요.”

전 옹의 입에선 과거도 한참 과거의 현리 모습이 흘러나왔다. 지주가 생산물의 반을 가져가는 병작으로 농사를 짓고 보릿고개를 경험했던 힘들었던 그 시절. 그나마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모두 보국대나 군으로 끌려가고 지금처럼 노인들만 남아 농사짓던 기억도 끄집어냈다.

“그 때는 왜 그 비싼 장리쌀을 얻어먹나 했어요. 근데 내가 농사지으면서 자식을 키워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우리는 고생 한 것도 아니죠. 우리 어른들이 고생한 것에 비하면….”

평생을 살았어도 맘 편히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제 강점과 전쟁, 댐으로 인한 수몰 등이 가만 놔두질 않았다. 정직하게 땅을 일구며 살아가려 했던 전순태 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 저리 휘둘리며 고된 삶을 살아 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현리주민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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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2006-06-14 20:32:43
아직도안내을 이끌어갈젊음이 있어마음이 흡족하다 하기야50초반이면 옛날에는 노인취급받았겠지만 아무튼젊은사람 들의 노력으로 안내가더욱발전되길바라며 대청땜때문에오는 피해가 없었으면하는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