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92] 동이면 남곡리(4) … 신촌
신마을탐방 [192] 동이면 남곡리(4) … 신촌
수몰민들 서로 의지하며 새고향 만들어 가는 마을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3.24 00:00
  • 호수 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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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호 건설로 고향을 잃은 수몰민들이 이주하며 형성된 신촌마을 전경이다. 햇살이 따뜻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남곡리 첫 마을로 소개했던 목사리 쪽에서 남곡리를 들어가다 보면 좌측으로 제일 먼저 보이는 마을이 신촌이다. 봉긋 솟은 언덕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따뜻한 양지에 놓여 있다. 때 아닌 3월에 내린 많은 눈으로 도로 곳곳이 희끗희끗한데 신촌마을에서는 눈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대청댐 쪽을 바라보며 길게 마을 안길이 놓여 있고 그 길 한쪽으로만 집들이 들어서 있다. 골목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벼 건조기가 들어가 있는 목조건물도 있고 이웃 간 정이 넘나들던 좁은 골목길도 이어진다. 한 때는 그 골목길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고요하다. 대청댐 수몰로 새로 생겨난 동네여서 이름도 신촌, 혹은 새동네다. - 편집자 주

◆수북·오대리 수몰민들 대부분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다. 남곡리 개미재로 들어가다 만나는 손바닥만한 저수지를 끼고 들어갈 수 있고 마을회관에서 들어설 수도 있다. 짙은 녹색 빛을 띠고 있는 저수지엔 낚시꾼 두엇이 낚시 줄을 던져 놓고 있다.

“물고기 좀 많이 잡혀요?”
“붕어 새끼는 정신없을 정도로 무네요.”

옆 길가에 세워놓은 자동차를 보니 대전에서 온 사람들이다. 평일이어서 얼마 없지 주말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저수지를 찾는다고 한다. 입소문이 나서다.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아이들이 잡아다 놓은 잉어와 향어가 잡히니까 그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붕어다.

▲ 신촌에 들어가다 만나는 조그만 저수지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붕어를 낚는 강태공들이 제법 찾는다.

각 농지마다 자가 양수시설을 갖춰 놓은 지금이야 이용도가 적지만 물 귀하던 때는 저수지 밑 농경지 경작을 위해서 없어선 안 될 저수지였다고 한다. 또 한여름이면 동네아이들의 수영장이나 목욕탕 노릇도 톡톡히 했던 것으로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수지를 지나 마을로 들어선다. 여든이 다 되어 기력이 없다는 노인이 마을 길가에 놓인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볕을 쬔다.

“자식들은 모두 객지에 나가 혼자 살아. 방안에 앉아 있다가 하도 심심해서 이렇게 나왔어. 사진 찍으러 다니는 사람이여? 나도 사진은 많은데. 다 늙었는데 뭐가 필요하다고 사진은 잔뜩 찍어 놓았는지 모르겠어. 마을회관에 누구 있어?”

햇볕을 가로막고 있는 낯선 젊은이를 경계하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풀어 놓았다. 사람냄새가 그리운 것이 틀림없다.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는 할머니를 따라 마을 안쪽을 살펴본다. 인기척이 드물다.

감자 파종시기가 되고 고추모를 이식할 때라 그런 듯싶다. 겨우내 들어앉아 있던 농기구에 다시 흙이 묻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면 마을도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신촌에서 산얼기로 가는 길가에 위치한 밭에서 육근태씨는 감자를 심기 위해 두둑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꽃샘추위가 몰고 온 눈을 밟으며 넓은 밭에서 홀로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수몰민들 80년대 마을 형성
신촌은 지금 스물두 집 정도가 모여 산다. 그중 세 집은 비어 있다. 80년대 대청댐의 담수가 시작되면서 고향집이 물에 잠긴 수몰민들이 모여 형성한 동네다. 원래 그 위치에 있던 집은 마을 북쪽 끝으로 있는 네 집 정도고 나머지는 80년대 즈음에 새롭게 지은 집들이다. 그렇게 뭉쳐 신촌을 형성하고 있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사를 와 지금도 그곳에서 반장일을 맡아보며 살고 있는 육근태(46)씨 역시 수몰민이다. 특이한 것은 이웃한 근처 동네가 아니라 대전에서 왔다는 것이다. 동구 세천동 안쪽에 있는 동면이 원래 고향이다.

육씨를 제외하고는 수북리와 오대리 등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나머지 마을 구성원들이다. 수북리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두 집 정도고 나머지는 대부분 오대리에서 고향집을 잃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논과 밭에 집터를 잡거나 산의 일부를 밀어붙이고 새 집터를 마련했다. 그 중 세 집은 지금 나갔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동네가 만들어진지는 얼마 안됐어도 그 때 이사 들어온 사람들 중에 조가들이 많았거든요. 다 일가들이니까 서먹서먹한 것도 없었지요.”

오토바이를 타고 감자밭에 다녀오던 조규영(63)씨를 따라 들어갔다.

“옛날에는 남곡리 전체에서도 이 동네가 일솜씨 좋기로 소문났었어요. 동네 남자들이 40대 정도 되었을 때는 그랬죠. 지금이야 다들 나이 먹고 남자들도 별로 없으니까 그런 소리 들을 일이 없지만….”

고향집을 잃은 서러움도 있었지만 당시 마을이 생겼을 때는 재밌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처지니 오죽했을까? 일솜씨 좋던 동네 청장년들은 당시 만나기만 하면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지금은 동네 마을회관이 주민들에겐 사랑방이나 주막 노릇을 하고 있다. 특수작물은 거의 없고 논농사나 감자농사, 고추농사를 주로 짓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대형 제과업체와 계약을 맺고 감자를 계약재배 하기도 했지만 그도 시들해져 지금은 계약을 하는 농가수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 주민들은 얘기했다.

수몰의 아픈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신촌을 제 2의 고향을 만들어가며 산지 30년의 세월이 다 되어간다. 일솜씨 좋던 청장년 이주민들이 이제 환갑을 지낸 세월이다. 세월을 보내며 푹 묵은 사람냄새가 마을 곳곳에 배어 마을에 가득 쏟아지는 따뜻한 봄 햇살만큼이나 정겨운 마을이 신촌이었다.

   
▲ 동이면 남곡리 신촌 약도.

육근태 반장 “마을 하수처리시설과 상수도 보급 됐으면…”

   
▲ 육근태 반장
신촌마을 젊은 반장 육근태 씨는 집에 없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 감자씨 파종을 하러 갔다. 산얼기 쪽으로 가는 산모퉁이 길을 따라가다 보니 밭에서 일하고 있는 육 반장의 모습이 보였다. 매서운 꽃샘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육 반장은 넓은 밭에서 혼자 묵묵히 밭두둑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감자는 병작을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심는 거죠. 계약재배도 한 동안 했는데 재작년부터는 안하고 있어요.”

열일곱 살에 지금 살고 있는 신촌에 들어와 2년 정도 떠나 있던 것을 제외하곤 줄곧 제2의 고향을 지키고 있다.
결혼도 이웃 집 처자였던 남승희(39)씨와 했다. 현재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마을 주민들 중에는 제일 젊은 축에 속한다.

“조용하지만 단합도 잘 되고 따뜻한 동네예요. 옛날에 손 모내기 할 때는 정말 그 진가를 발휘했는데.”

조규영씨가 얘기한 것처럼 일솜씨 좋은 마을 주민들이 모여 새 터전에서 논밭을 함께 일굴 때는 오죽 손이 잘 맞았을까 생각해 본다.

“젊은 사람들은 괜찮은데 교통편이 불편해서 어른들이 많이 힘들어 하시죠. 버스 노선이나 어떻게 좀 정비가 돼서 주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친김에 마을 걱정 몇 가지를 더 쏟아낸다. 우선, 급한 것이 마을 합병정화시설이다. 마을에 정화조 시설이 없어서 화장실을 제외한 나머지 허드렛물은 대부분 그대로 방류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동네 이장도 이를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데 아직은 좋은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다른 한 가지는 상수도 시설의 보급이다. 정화조 시설이 없는 것과 연결이 되겠지만 주민들이 좀 더 안전한 식수를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수도 시설 보급에는 동네에도 찬반이 있어요. 상수도요금을 납부하면 하수도요금까지 내야 하니까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있는 거죠. 허드렛물은 지하수를 쓰더라도 먹는 물은 안전했으면 좋겠어요. 그나마 우리 신촌은 지대가 높아서 덜 한 것 같은데 아랫동네로 가면 여름철에 지하수에서 냄새도 나는 것같고 좀 불안해요.”

육 반장의 생각이 정책입안 결정자에게 잘 전해져 남곡리가 좀 더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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