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90] 동이면 남곡리(2) 개미재
신마을탐방 [190] 동이면 남곡리(2) 개미재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주는 `개미재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2.24 00:00
  • 호수 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곡리는 원래 군동면의 수남리와 행곡리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군동면의 수남리, 행곡리, 지석리 일부를 병합, 수남리의 남자와 행곡리의 곡자를 취하여 남곡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개미재, 살골, 목사리가 있고 대청댐 수몰지역 이주민이 마을을 이룬 새동네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호 목사리에 이어 개미재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수몰지역을 향해 길게 늘어선 개미재 가옥들은 옛 추억을 더듬는 듯 하다.
입춘을 시샘하는 추위로 개미재에 흐르는 공기도 싸늘하게 얼어있었다. 날카로운 송곳을 툭 들이밀면 쨍하며 부서질 것 같은 그 추위 속에 마을이 길게 형성돼 있다. 마을 건너편에서 한참을 지켜보다 도착한 남곡리 마을회관에는 그 와중에도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한 무리의 주민들이 게시판을 살피며 왁자지껄 떠든다. 게시판에는 걷기팀 출석부가 걸려 있고 참가한 사람에게 스티커를 붙여 놓고 있었다. 2시, 경로당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개미재에서 놀러온 주민들이다.

“이게 보통 좋은 게 아니여, 별 데 다 다녀, 저 위에 산에도 올라갔다가 매화리까지도 간다니께. 힘들긴 해도 이렇게 걸어다니니까 다리도 들 아프고 아주 좋아.”

출석률이 100%에 가까운 조안대(73)씨가 수북보건진료소에서 운영하는 걷기운동 자랑을 한참 늘어놓는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햇살은 내리비쳐도 골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싸늘하다. 개미재 할머니들을 따라 따뜻한 경로당에 들어섰다. 설 명절에 누군가 갖다 놓았을 한과를 내 놓고 미지근한 음료수도 컵에 따라 준다. 따뜻한 커피를 타주겠다는 호의를 말리고 마을이야기를 청한다.

“난 처음에 시집올 때 개미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길래 동네 이름이 개미재인가 했다니까. 근데 그게 아닌가 보더라구.”

◆감이재? 개미재?
할머니들 말마따나 개미재에 유별나게 개미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로 확인이 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이 의지하고 있는 산세의 생김 때문에 지명이 유래했다고 말한다. 마을이 의지해 있는 산자락이 길쭉하니 개미의 생김을 닮았기 때문에 그같은 마을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7∼8년 전까지만 해도 산제를 지냈던 야트막한 마을 뒷산이 홀쭉하니 개미의 허리부분인 셈이고 마을은 그 허리부분에 진입로를 만들어 형성되어 있다. 또 다른 설명은 관성동호회에서 발간한 옥천향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야산 속에 깊숙이 잠겨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감이골, 즉 장동(藏洞)이었으나 음운변화에 따라 감이재, 갬이재, 개미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장지비(天藏地秘)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준다는 뜻이다. 그처럼 ‘감추다’라는 말은 때론 도피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신령스럽고 소중한 무엇인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 걷기팀 출석부를 들여다 보며 흐뭇해하는 개미재 할머니들.
옥천향지의 해석이 맞다면 개미재는 하늘이 숨기고 땅이 감춰둘 만큼 소중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옥답에 대한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특히 열두 마지기 한 배미 얘기는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그 넓은 논이 툭 트여 한 배미를 형성하고 있었으니 어디 평야가 부러웠겠는가? 물론, 지금은 대청댐을 만들면서 수몰돼 그 좋던 열두 배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살기 좋은 개미재
대청댐 건설로 마을 전체가 수몰된 것은 아니다. 수몰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마을의 높은 지대에 집을 새로 짓고 이주하는 것으로 아픔을 달랬다. 

“보상받은 거로는 집짓는 것도 모자라서 융자하고 그거 갚느라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태근성(71)씨의 얘기대로 당시 보상이 그리 넉넉지 않아 집 한 채 짓는 것도 빚을 얻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농토까지 줄어 고단한 삶이 뻔히 예고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집이 물에 잠긴 고향을 두고 떠난 가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청주나 평택, 서울로 네 가구가 이사 간 것으로 조기환(75)씨는 기억하고 있었다. 일부가 이사를 갔지만 이웃 수몰지역에서 이사를 들어오기도 했다. 최순이(76)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처음에 이사 왔을 때는 모든 게 낯설고 밖에서 고향사람만 만나도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더니 이젠 여기도 좋아. 사람들도 좋고.”

조희순(85)씨는 목사리에서 최근에 이사 온 경우다. 그냥 개미재가 살기 좋다는 얘기에 이사를 왔고 말대로 아주 편하다는 얘기를 한다.

“수몰되기 전부터 마을에 인심이 좋고 단합이 잘 된다고 소문이 자자했어. 그 때는 마을 한가운데 연자방아도 있었는데. 여하튼 돈은 많지 않아도 살기는 참 좋은 동네였어.”

안오견(80)씨의 얘기 끝에 버스나 좀 자주 다니게 해달라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솟아난다.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 중에 하나다. 하루에 다섯 대밖에 다니질 않아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웃동네인 지장리까지 들어오는 버스가 남곡리를 들려 가면 좋겠는데 그리 안 된다고 섭섭한 눈치다.

버스가 다니기 힘든 오지마을도 아닌데 생필품을 싣고 마을을 찾는 트럭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병원에라도 가려면 택시를 불러야 하는 주민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산제 멈춘 참나무 여전히...
마을회관에서 나와 개미재로 들어가는 길,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둥구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는 특이하게 검은 빛을 띠는 비석 하나가 서있다. 둥구나무를 식수한 사람의 이름과 심은 해를 표시한 비석이다. 조장옥씨가 지난 84년도에 심은 느티나무다.

“옛날 수몰되기 전에도 저 뒷산에 산제를 지내는 참나무 말고는 둥구나무는 없었어요. 그래서 둥구나무를 심은 사람이 누구고, 언제 심었는지를 후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세워 놓은 비석이에요.”

주민들의 마을에 대한 애정이 한껏 읽힌다. 잡목이 우거진 마을 뒷산(개미 허리)에는 참나무 한 그루가 삐죽 솟아올랐다. 마을에 노인들만 살게 되면서 7∼8년 전부터 산제를 지내고 있지 않지만, 맘으로는 신성시하는 나무여서인지 그 위세는 여전하다.

길쭉하게 생긴 마을을 둘러보니 마치 수몰된 옛 고향땅을 기리기라도 하듯 수몰선 쪽으로 향한 집들이 많다. 고요한 마을에 무슨 반가운 손님이 그리도 많이 찾아오려는지 까치가 몰려다니며 겨울 논을 헤집는다.

“올해는 우리 쫑말이 장가 가야할텐데...”

마을을 둘러보다 따뜻한 양지에 앉아 톱을 벼리고 있는 윤달수(79)씨를 만났다. 어찌 톱을 벼리고 있는지 물으니 고개를 돌려 마당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쳐다본다.

   
▲ 개미재에서 만난 윤달수 할아버지.
“기름 값이 너무 비싸서 나무를 때요. 아들네가 주는 용돈은 아껴야지. 저기서 숯이 생기면 냄비로 밥을 해먹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광에 들어가 지난 설에 자식들이 사다 주었을 베지밀 하나를 꺼내다 주고는 다시 톱 앞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예상치 못한 낯선 이의 방문이 사적 공간을 침범한 짜증보다는 적적함을 달래줄 반가움인 듯하다.

“내 원래 고향은 수북리야. 거기가 수몰되면서 여기다 집을 지었지. 그 때 논 닷 마지기를 보상받았는데. 4만원씩 받았어. 근데 여기서 논을 사려니까 6만5천원이야. 그래서 결국 논 세마지기 밖에 못 샀지. 보상은 받았어도 더 못살게 된 거지.”

다행히 윤달수씨는 억척스럽게 일해 융자받은 것도 갚고 지금은 도로 닷 마지기로 농사꺼리를 늘려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힘에 부쳐 세 마지기는 남에게 주고 두 마지기만 소일 삼아 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이렇게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농사도 져야지. 안 그러면 심심하기도 하고 몸도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

마당에 앉아 윤달수씨의 얘기에 맞장구를 치며 주변을 둘러보니 문과 기둥에는 ‘입춘대길’이 부적처럼 정성스럽게 붙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 글자를 바라보는 낯선 이의 뒤통수에다 윤달수씨는 근심과 희망을 한 가득 풀어 놓는다.

“우리 쫑말이가 올해 40이여. 근데 아직도 장가를 못갔어. 그래서 그렇게 많이 붙였어. 쫑말이 장가좀 가게 해 달라구. 요즘 샥시들은 돈 많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면 시집도 안 올라고 하나벼. 올해는 꼭 가야 할 텐데...”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가득 담아 붙였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길...

톱과 줄을 한 쪽으로 미뤄놓고 기다란 장미 담배를 뽑아 무는 윤달수씨의 얼굴과 손에는 수몰민으로 손바닥만한 농토를 일구며 알뜰살뜰 자식들을 키워 온 인생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