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가랜여울·터골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가랜여울·터골여울
여울 주변에 고인돌·선돌, 효자·열녀도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6.02.24 00:00
  • 호수 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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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붙은 대청호를 건넌 일행. 왼쪽부터 정수병, 백천수, 김병백씨가 오대리 옛 가랜여울이 시작되었던 지점에 섰다. 멀리 가운데 보이는 옛 취수탑은 물레방아가 있던 자리다.

금강물은 이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인공호수 대청호로 들어서 있습니다. 지난해 말 안남 연주리 비둘목재를 넘어 피실 마을로 가기 위해 대청호 얼음을 건널 때의 덜컹했던(?) 느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여울은 그 아래쪽입니다. 피실여울과 덩기미여울을 지난 물줄기를 옥천읍 오대리 앞 가랜여울에서 만났습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던가요? 물길은 동정자 터를 바라보며 진로를 급하게 오른쪽으로 꺾었습니다. 2월3일 여울지기 정수병씨와 김병백(74·동이면 남곡리)씨와 백천수(70·동이면 남곡리)씨가 함께 여울을 찾으러 나섰습니다.-편집자

오늘 함께 나서기로 약속한 김병백씨와 백천수씨는 오대리가 고향인 사람들이다. 김씨는 수북리 쪽에서 보면 빤히 보이는 오류티, 백씨는 한 구비를 더 가야 나오는 터골이다. 옛 옥천상수도 취수탑이 있는 장소에 이르러 차에서 내렸다. 얘기가 풀리기 시작한다. 군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부면장으로 퇴직한 백천수씨.

“이 취수탑 있는 자리가 물레방아가 있던 자리였어. 물레방아를 하려면 물길을 비스듬히 막아서 물살이 세게 나오도록 하는 곳에다 방아를 설치하잖아. 전기가 들어와서 더 이상 수지를 맞출 수 없었지만 김용호씨라는 분이 아버지 대부터 그곳에서 물레방아를 돌렸지. 물레방아 찧는 걸 구경했는데 무섭더라고. ”

■대청호 한복판이 된 여울
취수탑은 광역상수도가 지난 1992년 이원면 용방리로 옮겨가기 전까지 우리 고장 사람들이 마시던 물을 퍼올렸던 곳이다. 지금은 수면 위에 우뚝 솟은 둥그런 건물 하나로 15년을 버티고 있다.

“저∼어기가 여울 자리여.”

취수탑을 비껴 가리키는 손을 보자니 대청호 한복판이다.군데군데 얼음을 깨고 빙어낚시에 열중인 사람들은 그곳이 옛 길 여울 자리였는지를 아는지. 아무튼 한겨울에도 바지를 걷고 살얼음이 떠다니는 여울을 건넜을 옛 사람들을 생각하자면 ‘지금은 천국이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여울 얘기가 이어진다.

“오대리 사람들은 건너편에 농토가 없으니 이 건너로 와서 농사를 지었어.” 김병백씨의 한 마디. “옛날에야 순전히 소 등허리로 농사를 짓는다는 말 있잖어. 왜!”

농사꺼리가 강 건너 동이면 남곡리, 더 멀리는 옥천읍 쪽에 가깝던 남곡리 목사리 마을에까지 가서 농사를 지었던 주민들은 수확철이면 소로 실어 날랐다. 어디서든 여울이 있는 곳이라면 한 번쯤 볼 수 있던 낯익은 가을풍경.

“새벽 컴컴할 때부터 나와서 해야 다섯 바리를 할 수 있는 거여. 소 한 마리가 하는 양이 서너 사람 몫을 하게 되지. 그러면 강가에 생나락이 쫙 깔려. 별보고 벼베러 나와서 별보고 들어가는 거지.”

그때는 오대리 강변에 자갈이 무척 많았다. 수몰된 탓에 그 많던 자갈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으나 아직도 기억하는 백천수씨에게서 오대리 노랫가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칭이나칭칭 노래 할 때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오리티 강변에 자갈도 많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칭이나칭칭 나네’라고 했지. 그렇게 강변에서는 흔히 자갈 많다고 매겼어.”

■‘오리티 강변에 자갈도 많다, 칭이나칭칭 나네’
또 하나 볼 수 있는 오대리 여울만의 특징이 있었다. 가을 수확이 끝나면 오류티와 터골 사람들이 모여 여울에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짚으로 둥그런 섬(가마니)을 짜는 거여. 그리고는 자갈을 채워 넣는 거지. 마을 앞에서부터 하면 아마도 100개는 더 만들었지. 그렇게 한 해 겨울 쓰고 나면 큰 물 들어서 떠내려가 버리고 또 만들고 했는데 인력이 많이 들어가니 자주는 못했고, 해방 전후에 했던 걸로 기억해요.”

백천수씨의 기억이다. 강만 건너면 보은을 가는 국도(당시 국도는 현재도 어렴풋이 흔적이 남아 있는 수북리-장계리간 도로)여서 상대적으로 교통이 좋았던 오대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게 김씨와 백씨의 기억이다.

오류티에 50여 가구, 터골에 많을 때는 11가구, 버들개에 20∼30가구 등 적어도 80∼90가구에 달했다. 안남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던 백씨는 학구가 변경되면서 죽향초등학교 1학년으로 재입학을 했다. 이때도 여울을 건너 학교를 다녔다.

한국전쟁 때는 오대리에서 수북리 동정리로 피난 나왔다가 하루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인민군이 예상했던 진로보다 대전 쪽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란다. 당시에는 국도였던 이 도로에서 미군과 처음 보았던 탱크 하며 온 마을이 하마터면 전쟁터가 됐을 뻔한 아찔한 순간들을 기억해 냈다.

■다시 ‘쩡쩡’ 소리 들으며 대청호를 건너다
오대리에 고인돌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일행은 자연스레 대청호 얼음 위로 내려섰다. 내려서자 대번 바람이 다르다. 쩡쩡 얼음 숨쉬는 소리가 난다. 얼음이 얼면서 나는 소리란다. 오대리 주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겨울 동안 얼음 위를 걸어다닌다. 오대리까지 긴 줄을 매달아 놓았다. 건너가다 얼음이 깨지면 줄이라도 잡으려는 주민들의 몸부림이다. 오대리는 이제 11가구에 10여명이 살고 있다.

한 차례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강바람이 차다. 오대리에 올라서 조성택 이장을 찾으니 집에는 없었다. 끝내 고인돌이 어디에 있는 지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 대청호 얼음 위에서 또 한 차례 눈보라를 만났다.

그리고는 올라선 옛 장계리 가는 길. 눈보라가 그치고 강에서 올라오니 훨씬 온화해졌다. 그때 문뜩 눈앞에까지 봄이 왔다. 입춘을 하루 앞둔 하얀 버들강아지가 강쪽으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여울 둘러싼 3명의 효자·열녀

   
▲ 남편을 대신해 감옥살이까지 했던 밀양 박씨 절부문.

여울을 둘러싼 오대리와 수북리, 석탄리에는 세 명의 이름난 열녀와 효자가 있다. 수북리 화계리 마을에 있는 정윤세의 처 밀양박씨 절부문. 박씨 부인은 남편이 영동 처가에 다녀오다 살인 누명을 쓰고 관가에 잡혀 갔을 때 남장을 하고 관가에 들어가 남편 대신 감옥살이를 했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살인범이 잡혀 남편도, 자신도 살게 되었다.

박씨의 나이 스무살 때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같이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부모 때문에 죽지 못하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셔 고을에 효행과 열녀로 칭찬이 높았다. 1723년 조선 경종 때 절부문(節婦門)을 세워주고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옥천읍 오대리 오류마을 앞에는 조유원의 처 옥천육씨 효열문이 있다. 옥천육씨는 자신이 직접 길삼이나 품팔이를 하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시부모를 봉양했고, 남편이 병석에 눕자 자신의 약지를 잘라 10여일을 더 연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19세 때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남편을 따라서 죽으려 했으나 태기가 있어 죽지 못했다. 남편없이 낳은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이에 1846년 조유원의 8세손인 조상빈 등이 효열문을 세웠다.

동이면 석탄리 안터에 있는 김상기 효자는 아홉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두부를 먹고 세상을 떠나 평생을 두부를 먹지 않았다고 하며 계모에게도 극진한 효도를 한 것은 물론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매일 강에 나가 잉어를 잡아 병을 쉽게 낫게 하는 등 천수를 누리게 했다. 또한 인정도 많아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어 효행과 선행에 대한 칭송이 높았다. 1904년 고종이 정려문을 세워 주었다.

동정자 터 아래 지명 '가마뜯기'

   
▲ 조선중기 유경 공이 세운 동정자 터에서는 대청호의 절경이 펼쳐진다.

각 지역마다 ‘가마뜯기’란 지명이 있는 곳이 있다. 대청호변 낮은 구릉에 있는 동정자를 얼마 남기지 않은 곳. 옛 물레방아가 있던 곳에서 조금더 나아간 지점을 가마뜯기라고 했단다.

가마뜯기란 예부터 양반들의 권세가 한 단어에 응집돼 있는 지명이다. 동정자(옥천 관아의 동쪽에 있는 정자라고 해서 동정자라고 이름이 붙었으며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높이가 그리 높지는 않으나 이 터에 올라서면 휘도는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 중기 유경(庾京) 공에 의해 명종 때인 1550년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정수병씨와 무송유씨 문중 등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는 선비들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논했던 곳이다. 선비와 양반들의 위세가 있는 곳이기에 이곳을 지나려면 가마를 타고 가다가도 내려서 걸어 갔다는 것이다. 가마를 뜯어서 들고서. 그래서 가마뜯기가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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