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빵빵한 스카우트 제의 마다했냐고요?"
"왜 빵빵한 스카우트 제의 마다했냐고요?"
OhmyNews 이정희(hee8861) 기자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2005.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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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새끼는 한양으로 보내고, 마소의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큰물에서 놀아야 된다는 말이다. 실제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 말은 곧 '진리'로 통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대학생들은 소위 '언론고시'라는 것을 준비하며 중앙언론사로의 진출을 꿈꾼다. 신문기자를 하려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그런 바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작은 지역'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웃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는 '큰 뉴스'보다 이웃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작은 뉴스'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지는 못하더라도 지역에서만큼은 '유명인사'다.

"나는 10년차 지역신문 기자"

조주현(41). 그의 40년 인생은 날카로운 칼날 위에 놓인 채 흘러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카로리씨(간에 복수가 차서 사망에 이르는 병)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병원과 시설을 오가며 수술과 좌절을 반복했던 그이지만 그의 얼굴표정에서 ‘어두움’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목발에 실린 가냘픈 몸을 통해 그의 단순치 않았던 삶을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옥천’과의 인연은 그런 그의 희귀병 덕에 맺어졌다. 95년, 부모의 반대를 피해 사랑하는 여인과 야반도주를 감행했다가 택한 곳이 바로 옥천이었던 것. 그리고 그는 지역신문 기자가 됐다.

   
▲ 조주현 <옥천신문> 편집국장

"우린 옥천 사람들 얘기를 그들 입장에서 씁니다. 촌지나 광고에 따라 가는 기사가 아니라 주민 생활의 중심에서 기사를 쓰는 거죠."

옥천 군내 한바퀴를 도는 데는 좌회전도 우회전도 필요 없이 좁은 2차선 도로를 직진으로 5분만 가면 된다. 그만큼 옥천은 이름만 대면 누구누구를 다 알 수 있는 인구 6만에 불과한 좁은 지역이다.

<옥천신문>은 이곳에서 16년째 발행되고 있는 신문이다. 매주 20면 발행, 유료구독자 3500명에 월 구독료 5천원, 취재편집기자 7명에 광고경리직원 2명의 소규모 신문이지만 이들에게 '사이비 기자'나 '임금체불' '발행 차질' 등의 용어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조주현씨는 이 곳 옥천에서 신문사 홈페이지를 만들고,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면서 10년간 지역신문 기자로서의 노하우를 쌓았다. 그리고 지난 4월 초 신임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사실 <옥천신문>은 '옥천전투'로 대표되는 군내 조선일보 구독반대 운동으로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 국장은 '옥천전투'의 성공 이면에 있는 옥천신문의 10여년간의 활동을 먼저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티조선운동이 외부적으로 우리 신문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신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군민들 속에 확실하게 신문이 자리 잡은 상태에서 그런 활동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따라왔던 것이겠죠."

<옥천신문>이 16년을 맞을 수 있었던 이유

   
▲ <옥천신문> 홈페이지.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신랑: 전OO의 막내 OO군 신부: 주△△의 차녀 △△양(금구리)
옥천농협 예식장 O층 홍실
일자: 2005년 O월 OO일 13시 00분 피로연: △△농협 5층 난실식당"

<인터넷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메인 화면에는 이런 광고가 뜬다. 물론 공짜다. 전화도 신문도 없던 시절 그저 바람에 실려 오던 이웃사람들 살아가는 소식을 확인하던 '옥천 5일 장날' 같은 훈훈한 풍경을 <옥천신문>이 만들어 내고 있다.

   
▲ <옥천신문> 조주현 편집국장
"지역 신문은 벤처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능력과 의식 수준이 성공의 관건이지요. 여기에는 개인의 헌신과 희생이 상당히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 요인들이 오늘의 우리 신문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옥천신문>은 신문방송학 전공자들의 단골 논문 주제가 된 지 오래며 새로운 매체 창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단골 벤치마킹 대상이 될 정도로 성공한 언론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제는 '성공'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조주현 국장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 신문이 성공했다구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성공은 아니고요, 아직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좀 탔다고 성공한 건 아니지요."

그가 생각하는 성공한 언론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는 '발행(유료독자) 부수' '사원 복지' '사회봉사'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초기에는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 벤처 정신으로 이끌어 갈 수 있지만 그런 방식은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게 조 국장의 생각이다. 때문에 사원 복지나 사회 기여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만 잘 만들면 되지 뭐가 문제야?

   
▲ 기자들과 편집회의를 하고 있는 조주현 편집국장. 실제로 편집국장 권한은 거의 없다며 너스레.

요즘 인터넷 신문은 대부분 무료다. 로그인하지 않고도 누구나 기사를 마음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 옥천신문>은 정기구독을 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타 매체들이 광고 관련 직원을 많이 두고 있는 데 비해 옥천신문은 단 두명, 그나마 외부에 나가 광고를 수주하는 직원은 단 한명이다.

대부분 언론이 광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봤을 때 이정도면 강심장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조주현 편집국장의 고집 센 철학이 낳은 결과다.

"신문 잘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독자가 늘어나고 독자가 늘어나면 당연히 광고도 들어옵니다." 그다운, 명쾌한 대답이다.

그에게도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법 잘 나간다는 매체에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도 여러 번 받았다. 박봉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그런 제안은 그를 며칠 동안 고민에 빠져들게 했다.

"솔직히 왜 안 흔들렸겠어요? 남들은 언론고시다 뭐다 하면서 기를 쓰고 들어가려고 하는 판인데…. 그 유혹에서 저를 해방 시킨 건 우리 가족과 청춘과 열정을 불사를 수 있게 해 준, 끊을 수 없는 동료들의 애정이었죠. 아마 그때 소위 잘나가는 곳으로 옮겼으면 아마 나 스스로 배신자라고 생각했을 걸요. 우리 가족들도 그랬을 거구요. 허허."

그의 뒤에는 뭔가 든든한 것이 있다

   
▲ 왼쪽부터 조주현 편집국장, 아들 은석군, 아내 이정애씨.

그의 뒤에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버티고 있다. 바로 부인 이정애(38)씨와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 은석(9)군. 지금도 조주현씨는 카로리씨병 때문에 한해에도 몇 번씩 피를 토하면 119에 실려 간다.

   
▲ 2000년 5월 8일 모두의 축복 속에 올린 결혼식. 이때 아들 은석이의 나이가 4살이었다.
"남편이 병원에 실려 갈 때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갈 때마다 병원에서는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하죠. 그러나 지금은 담담해요. 우리 은석이가 커가는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도 있구요. 그 길에 우리 남편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조주현 편집국장의 든든한 후원자인 부인 이정애씨의 말이다.

"이젠 무채색 같은 신문을 만들고 싶어요. 이슈로 가득한 형형색색의 화려한 신문이 아닌 우리 옥천 사람들의 일기장 같은 그런 신문 말이에요. 두 가구밖에 살지 않는 대청댐 섬 마을 사람들에서부터 외국에 나가 있는 출향인들도 모두 읽게 되는 그런 신문 말입니다."

이제 조주현 편집국장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충북의 작은 소도시 옥천군에서 만들어질 무채색 신문은 어떤 모습일까. 멀리 떨어진 오지의 지역 주민부터 해외에 나가 있는 출향인에게까지 지역 신문을 읽히게 하겠다는 그의 바람이 허황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서 그만한 희망의 증거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옥천 사람들, 그들이 인간 조주현을 계속 꿈꾸게 한다.  

OhmyNews  2005-04-27 02:06  /이정희(hee886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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