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89] 동이면 남곡리(1) 목사리 마을
신마을탐방 [189] 동이면 남곡리(1) 목사리 마을
산자락에 의지한 아늑한 마을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2.03 00:00
  • 호수 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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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곡리는 원래 군동면의 수남리와 행곡리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군동면의 수남리, 행곡리, 지석리 일부를 병합, 수남리의 남자와 행곡리의 곡자를 취하여 남곡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개미재, 살골, 목사리가 있고 대청댐 수몰지역 이주민이 마을을 이룬 새동네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목사리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마을 초입을 지키고 선 느티나무는 400년이 넘도록 한 자리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옥천향지(沃川鄕誌)에 따르면 목사리를 한자화 해 목금리라는 마을 이름을 한 때 사용하기도 했다. 목사리의 어원을 목쇠리로 보고 나무 목(木)자와 쇠금(金)자를 쓴 것이다. 마을 주민인 오현상(73)씨는 마을 이름과 관련해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재 마을 이름은 한자로 칠 목(牧)자와 벼슬 사(仕)자를 쓰고 있지만 마을 주변의 오래된 비석을 보면 나무 목(木)자와 모래 사(沙)자를 썼어. 소를 많이 기르는 마을이어서 목사리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잘못된 얘기야.”

오현상씨는 옛날 한학을 오래 공부한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모래 위에 나무라는 마을 이름이 좋지 않아 칠 목자와 벼슬 사자를 써서 다시 마을 이름을 명명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목사리가 소 굴레의 일부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니 소를 많이 기르던 마을로 잘못 추정할 만도 하다. 또 목금리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목쇠리라는 추정에 대해서도 명확한 논거가 없다. 그렇다고 오현상씨의 증언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내용도 당장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런 목사리는 의기양양하게 양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 사이, 좁은 골짜기를 따라 형성돼 있었다. 그 흘러내린 모양새가 소 굴레의 목사리를 닮아 그리 부른 것은 아닌지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한다.

◆100년 된 집, 세월의 더께 푸근해
옥천에서 동이방면으로 501지방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편으로 오소리연구소가 보인다.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곡리로 갈 수 있다. 가면서 만나는 첫 마을이 바로 목사리다. 현대식으로 지은 3층짜리 절 건물이 마을 입구에 떡 버티고 서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 100년은 족히 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영식(76)씨네 고택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옛 향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그 건물 덕분에 자칫 마을초입을 가리키는 둥구나무를 그냥 지나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 마을의 둥구나무로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튼실한 밑둥에서 죽죽 뻗어 오른 가지들이 하늘 넓은 줄 모르고 시원하게 뻗어 위세를 뽐낸다.

그 나무 밑에서 시작해 골짜기를 따라 차곡차곡 집들이 들어서 있다. 두 갈래 마을 초입길은 1/3 지점에서 하나로 모여 골짜기 꼭대기로 죽 이어진다. 목사리 마을은 집집마다 대문과 담장이 없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집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맘만 먹으면 집 마당을 가로질러 다른 집으로 옮겨 갈 수도 있다.

“그냥 이렇게 울도 담도 없이 살아요. 서로 믿고 오순도순 사는 거죠. 다른 데서 누가 들어와 해코지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대문이 없어 그냥 불쑥 마당으로 들어선 낯선 방문객에게 민병연(73)씨가 시원한 식혜 한 그릇을 내 놓으며 말한다.

민병연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지붕의 초가만 걷히고 다른 것은 그대로인 오래된 집 한 채였다. 벽에 바른 황토흙빛은 오랜 세월을 그대로 담고 주춧돌과 기둥, 마루, 방문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집이 올라선 기단이 마당으로부터 꽤 높다. 흘러내린 골짜기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집을 짓다보니 그리 된 것 같다. 그 모습이 고택을 좀 더 무게 있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은 보기 힘든 선조들의 흔적과 만난 것 같아 감탄과 미소가 절로난다.

“그렇잖아도 서울에서 내려온 친척들이나 이웃들이 부수지 말고 그냥 잘 두라고 그래요. 문화재감이라고….”

호기심으로 집을 구석구석 살피는 기자에게 민병연씨가 말을 건넨다.

“한 100년은 됐을 거예요. 그 때 목재는 저기 무주구천동에서부터 짊어지고 와서 지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불편해서 거기선 안 살아요.”

   
▲ 100년 된 고택에서 주민들과 오순도순 살고 있는 민병연(73)씨.
민병연씨와 남편인 신영식(76)씨는 오래된 집 대신에 마당 한쪽에 새로 집을 짓고 생활하고 있었다. 마을 꼭대기에 새로 터를 닦고 멋진 전원주택이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 어떤 모습의 집이 들어설지 모르겠지만 신영식씨의 오래된 옛집도 잘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참외와 포도로 한 시대 풍미한 마을
한바탕 흥겨운 설을 치른 뒤끝의 분위기가 마을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아직도 그 분위기를 이어가는 오현상씨네 마당이 시끌벅적하다. 덕분에 평소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마을골목에는 축구공을 차며 왁자지껄 떠드는 꼬맹이들의 함성으로 그득하다.

“이렇게 조그만 마을에 뭐 자랑할게 있나? 이제 한 20호도 채 안되지. 최근에도 한 대여섯 집이 헐렸어.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아무 것도 안 남을 거야. 누가 이렇게 조그만 마을에 들어와 살려고 하겠어.”

자신의 집 마당 한쪽에 심어 놓은 1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 아래서 오현상씨는 한 농촌마을의 암담한 미래에 대해 말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더욱 가슴 절이다. 마을 양쪽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에 기대어 형성된 마을은 아늑하긴 하지만 농지가 적어 예부터 살기가 녹록치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벼대신 특수작물을 많이 했다.

해방 무렵에는 이웃 매화리와 함께 참외농사를 많이 지었다. 지게로 지어다 물건을 내던 그 시절에 옥천에서 매화리와 목사리의 참외는 유명했다고 한다. 그 뒤로 60∼70년대에 들어 포도농사도 많이 지었다. 지금은 물론 참외밭은 보기 힘들고 포도밭이 조금 남아 있는 정도다.

“정부시책 자체가 농촌을 살리는 게 아니잖아. 정부수매도 안하는데 비료값은 올라가고. 솔직히 말하면 이제 희망이 없어.”

한 때 남곡리 본 마을과 1km 가까이 떨어져 있는 목사리의 분구 목소리도 있었다. 또 경로당 건립도 숙원으로 이야기도 오고갔지만 이제 그도 시들해졌다. 분구 얘기는 자꾸 가구가 줄어드니  더 이상 나오지 않고 경로당은 이용할 사람도 없는데다가 유지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보니 그리 되었다고 한다. 대신, 가능하다면 10분 이상을 걸어 501지방도까지 나가야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주민들을 위해 마을 근처까지 버스가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을 민병연씨는 얘기했다.

“나같이 두 다리 튼튼한 사람들은 괜찮은데 다리 불편한 사람들은 고역이거든요.”

설 명절 맞아 5남매 특별한 잔치
`오현상씨네 잔치 열렸네'

 

   
▲ 오현상씨네 집에 모인 6남매와 그의 식구들이 마당에 모여 고기를 구우며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 훈훈한 정이 가득했다.
설 명절, 은행나무집 오현상씨 네에는 특별한 잔치가 열렸다. 5남매가 짝꿍과 아이들까지 데리고 모두 모였다. 집 마당에 모여 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린다.

명절이기도 하지만 막내아들 오병완(44)씨의 아내인 이영희(41)씨가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가족들이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다. 그 틈바구니에 잠시 들어가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고향 얘기를 들었다.

“옛날엔 산등성이나 저 윗동네 저수지에서 많이 놀았어요. 가끔 찾아와 보면 안타까운 게 많죠. 발전은 안 되더라도 그냥 자연마을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오병현(45)씨의 얘기에 큰 형인 오병길(47)씨도 거든다.

“지금은 마을 주변에 공장이나 축사가 참 많이 들어와 있어요. 옛날 우리 어렸을 때 놀던 그 모습이 지금은 아니죠.”

오병길씨는 아내 정군자(43)씨와 함께 옥천에서 진해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어차피 옥천에 살고 있는데 나중에라도 고향에 들어와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물었더니 오병길씨를 비롯한 형제들은 그냥 웃는다. 오히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오현상씨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손사래를 친다.

“이 조그만 마을에 들어와 무얼 먹고 살라고….”

노후에 먹고 살 것을 다 마련하면 조용하니 살기 괜찮지 않겠느냐는 반문에도 여전히 오현상씨는 부정적이다.

“도시생활에 찌든 사람들이 며칠은 좋을지 몰라도 조금만 지나면 외로워서 못살아.”

듣고보니 지금 농촌의 어려움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데 ‘외로움’이라는 낱말이 가장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군동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니던 이야기를 하며 지금은 폐교가 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자니 오병임(48)씨의 남편인 둘 째 사위 한순대(52)씨가 고매를 가져다 달란다.

고매는 경상도 사투리로 고구마란다. 한순대씨의 사투리에 모두 한바탕 웃고는 큰 딸 오병일(49)씨가 고기를 얹어 쌈을 싸가지고 내민다. 동이치안센터에서 근무하는 남편 김주경(52)씨도 음료수를 건네며 손을 잡아끈다. 오병현씨의 아내 조영숙(41)씨가 내어준 자리에 끼어 앉아보니 오늘 만큼은 목사리도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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