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피실여울, 덩기미여울②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피실여울, 덩기미여울②
덩기미 편 [2] - 홑이불 덮고 자던 그 강변…빈 마을엔 보리만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6.01.13 00:00
  • 호수 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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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길인 석탄리 안터에서 임도를 넘어 덩기미와 피실을 가지 못했던 것은 지난해 12월에 내렸던 눈 탓입니다. 임도가 눈에 덮여 자동차가 임도를 쉽사리 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길을 돌아 안남면 연주리에서 비둘목재를 넘어 피실나루에 다다랐고, 예년보다도 일찍 얼어붙은 강을 건너 피실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습니다. 적어도 강을 처음 건너보는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용기를 얻었던 것은 ‘이 정도 얼음이면 경운기는 물론 경차 정도는 건널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경험과 연륜이 이래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계기였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피실 마을. 인삼을 재배했던 삼장이 있고, 밭으로 일구어 경작하고 있는 농경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 곳은 30여년 전 그 곳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마을이 복원되었습니다. “여기는 신씨네가 살던 집, 저것은 마을 사람들이 먹던 공동우물터”라고. 여울지기 정수병씨와 함께 덩기미 마을 탐방에 나선 조봉현(73·옥천읍 상계리)씨와 조영운(68·옥천읍 죽향리)씨는 석탄리 덩기미 마을이 고향입니다. -편집자

▲ 덩기미 마을이 있던 곳은 어느덧 버드나무가 대청호와 마을 터를 경계지워 버렸다. 마을터에 선 조봉현, 조영운씨의 감회가 새로워 보였다. 왼쪽이 정수병, 오른쪽이 조봉현씨.

길이 나 있다. 이미 석탄리 안터 마을에서 임도를 내서 덩기미와 피실까지 오는 길은 닦아 놓았던 터다. 이 길로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러 다닌다. 대청호와 잇닿아 있어 농약 살포 등이 문제가 되었던 농경지가 바로 이곳이다. 지금은 재배하고 있지 않지만 피실 옛 마을 터에 있는 인삼 재배포장이다.

인삼 재배포장을 지나니 임도로 연결된 제법 늘씬한(?) 도로가 일행을 안내한다. 두 번인가 임도 고개를 넘어 왔던 길을 이제는 거꾸로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피실나루를 배로 건넜거나, 피실여울을 건넌 옛 사람들도 모두 이 길을 걸었다. 강변을 따라 가다 보면 안터 마을에 다다랐고, 거기서 작은 개울처럼 나 있는 다리를 건너면 옥천읍 수북리였다. 수북리를 지나 죽향학교가 있는 구읍 소재지까지는 8km 정도. 이십 리 길이었다.

이 길의 역사는 깊다.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던 길이었고, 그 이전에도 자연스레 걸었던 길이다. 일제 때 안남면 연주리 비둘목재 길을 확장해 뚫었다고 했다. 그 길은 석탄리까지 이어졌고, 주민들로부터 수탈한 쌀과 곡식, 각종 전쟁물자를 옮긴 길이기도 했다.

피실을 빠져 나올 때까지는 일제 때 있던 길이 맞다고 했다. 마을을 빠져 나오면서 길은 새로 개설한 임도와 연결하기 위해 강 위쪽으로 났다. 이전 길은 수몰선 아래로 내려간다.
대청호 건너편으로 문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문처럼 생겨서 문골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유난히 다른 곳보다는 지대가 낮다.

◆사람들 드나듦이 많았던 문골
일제 때 문골을 뚫어 강 물줄기를 돌리려고 했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폭이 얼마 되지 않고 높이도 다른 곳보다는 현저하게 낮아 물길을 돌리기도 쉽다는 말이다. 문골을 끊어 물길을 돌리면 막바로 안내면 장계리로 연결된다. 물길을 돌린 후 하류 지역은 농경지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문골은 주위에서 높이가 가장 낮아 주민들의 주요 통행로였다. 강변에서만 막바로 올라서면 등성이 쪽은 평편한 길이었다. 덩기미 주민들은 마을 앞 덩기미 여울을 건너 강변길을 따라 문골을 넘었다. 문골을 넘어 안내면 인포리를 거쳐 안내장을 보았다. 안내장에 우시장이 섰으니 소도 문골을 넘어 장터를 향했다. 나무를 해나르던 주요 통행로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만 문골로 통행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국군이 이 문골을 통해서 후퇴했고, 북한군 역시 이 문골을 통해 내려왔다가 피실여울을 거쳐 남하했다. 이들이 후퇴할 때는 반대로 피실여울을 건넌 북한군들이 문골을 통해 북으로 올라갔단다.

그러고 보니 문골이라는 지명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닌 듯 하다.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을 문처럼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니 문골이라는 지명을 얻은 것은 아닐까?

문골 맞은편 쯤에 있는 말무덤 흔적. 그 유명한 석탄리 말무덤 유적이다. 대청호가 수몰될 당시 청주의 한 대학교에서 이 유적을 발굴했다. 조봉현씨도 발굴 당시 일꾼으로 참여해 말무덤을 파헤쳤다. 그러고는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한다. 말무덤과 관련한 전설이 있다.

▲ 피실여울, 덩기미여울 위치

◆이여송의 말 묻었다는 말무덤
우선 말이 되는 것은 이여송과 관련한 전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일대에 왔다가 자신의 명마가 빠른가, 화살이 빠른가를 시험하기로 했다. 말과 화살을 동시에 출발시켜 시합을 했으나 화살이 빨랐다. 이에 이여송은 말 목을 쳐서 죽이고 말을 묻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러나 이는 전설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말무덤이 아주 큰 무덤이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옛날 부족국가 시절 강대한 세력을 가진 족장 등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니 유적 발굴을 했던 것 아닌가.

한참을 걸었다. 마주부는 바람이 칼바람이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렵다. 해는 떠서 눈을 녹일 듯한데 그늘 쪽은 여전히 눈이 쌓여 ‘뽀드득’ 소리를 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약간 굽이진 길 모퉁이에 옛 성황당이 있었다는 터를 지난다. “옛날에는 성황당이 있어서 돌 한 번씩 던졌는데.” 작은 성황당, 큰 성황당이 있었다는게 조봉현, 조영운씨의 공통된 얘기다.

마침내 지금은 없어진 덩기미 마을에 다다랐다. 평범한 강변마을로 볼 수 있는 곳. 시야가 확 트였다. 강 하류로 물길이 흐르고, 강물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저기가 우리 마을이었어요.”

커다랗고 네모진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수몰되기 전까지 있었던 고압선 철탑 기초란다. 피실에 한 개가 있더니, 덩기미에도 한 개가 있다.

◆아! 내 고향 덩기미의 흔적
강변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을 막기 위해 설치한 차단줄을 제치고 보리를 갈아놓은 옛 마을 터로 내려갔다. 군데군데 돌을 쌓아 경계를 쳐놓은 곳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서 있는 집이 있다. 대청호 수몰 수 농사를 짓기 위해 지어놓은 농막이란다. 그 농막은 조이실 전 군의원의 집이었다. 조봉현씨는 조이실씨의 아버지가 농사를 짓기 위해 지어놓은 집이라고 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여기저기 집터에 있는 돌을 들어내고, 보리를 갈았고, 강변 쪽으로는 버드나무가 쩔어간다. 강과 농경지의 구분을 확연히 해주고 있다. 조봉현씨의 집터에 섰다.

“병술년 홍수 있지. 그 홍수 때 물이 들어차서 위로 올린 거여. 지금 수몰선하고 병술년 장마하고 비슷했으려나?”

역시 병술년 유명했던 장마 탓에 집을 위쪽으로 옮겼다. 칠십줄을 넘은 노인의 말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는 느낌이 와닿는다. 조영운씨는 아까부터 이리저리 마을을 돌아보며 기웃거린다. 역시 고향땅을 오랜 만에 밟아본 감회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일행은 돌아섰다.

“옛날에 좋았지. 강변에는 모기 하나 없었어. 여름이면 홑이불 하나 들고 강가에 나가서 잤는 걸 뭐. 언젠가 조카들이 놀러 왔다가 이보다 좋은 곳을 찾을 수 없다고 탄성이야. 물고기? 밤에 강에 나가면 그리 많을 수가 없었어.”

돌아오는 일행의 발걸음에는 고향이 오래도록 깨끗하게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읽혀졌다.

민족정기 끊으려 애썼다는 `뜸봉' 전설

▲ 앞쪽에 보이는 양쪽 봉우리 가운데 왼쪽 것은 칼로 쳐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왼쪽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뜸봉.

피실을 걸어나오다 한 모퉁이에서 섰다. 조봉현씨의 얘기 때문이다.

“이 앞에 봉우리 두 개가 보이는데 오른쪽은 봉우리 모양을 갖췄잖아. 그런데 왼쪽은 봉우리 부분이 칼로 깎은 듯이 없어져 있어 보여. 옛날 왼쪽 봉우리는 큰 인물이 날 혈이라고 해서 일본놈인가, 명나라놈인가가 칼로 봉우리를 칼로 잘랐다는 거야. 왼쪽 산도 봉우리만 갖췄으면 오른쪽마냥 뾰족하게 솟았을텐데 말야.”

그랬다. 왼쪽 봉우리가 칼로 봉우리를 자른 것처럼 뾰족한 부분이 깎여나간 것처럼 보인다. 조씨는 한 술 더 나아간다.

“그 뒤에 보이는 봉우리. 그게 뜸봉여. 혈을 끊기 위해 산 정상에 뜸을 떴다는 거지. 거기 가 보면 정상에 있는 돌들이 다른 곳보다 유난히 가벼워. 뜸을 떠서 그런가?”

말로만 들었던 뜸봉 얘기를 여기서 다시 듣는다.

“그런데 말여. 큰 인물이 나온다는 산을 칼로 잘랐더니 산 쪽에서 백마가 한 마리 나와서 일주일 동안 강변을 울면서 헤매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는 거여.”

묘하게 백마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는 곳은 말무덤이 있는 곳과 비슷한 위치. 혈을 끊었다는 전설과 이여송의 말과 관련한 전설이 함께 전해지는 곳, 바로 피실과 덩기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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