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86] 옥천읍 교동리 … (1)섯바탱이
신마을탐방 [186] 옥천읍 교동리 … (1)섯바탱이
옛날 백회 가마 일제강점기 변전소 아직도 고스란히…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1.06 00:00
  • 호수 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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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면 향교리와 고수동리가 합하면서 교동리가 되었다. 지금의 지명은 조선 태조 때에 지방의 영재를 기르기 위해 향교를 세워 ‘향교리’라 부르던 것이 ‘교동’이라 변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동리 자연마을로는 교동, 섯바탱이, 고수골이 있었다. 지금 교동저수지 자리에 있던 고수골 원 마을은 없어지고 교동과 섯바탱이에 주민들이 살고 있다. 교동마을은 수북리 쪽으로 가다보면 왼편으로 한눈에 펼쳐져 있고 섯바탱이는 보은으로 향하는 37호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서는 섯바탱이 마을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마을이 형성될 때 쯤 심은 아랫마을 초입의 수령이 70~8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37호 국도를 따라 섯바탱이를 찾아가려면 정신을 좀 바짝 차려야 한다. 여차하면 마을을 놓치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 보은 방향으로 가다 옥향아파트와 야트막한 언덕을 지나면 오른쪽에 ‘옛고을’ 이라는 식당이 보인다. 그곳이 섯바탱이 아랫마을이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횡단보도와 오른쪽에 마을이 보이는데 그곳은 윗마을이다.

옥천읍에 속해 있는 자연마을 치고는 정말 적은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다. 단독으로 뚝뚝 떨어져 있는 집이 많은 가운데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그나마 어깨를 맞대고 집들이 붙어 있는 섯바탱이 마을이지만 20여 호 남짓이다.

마을을 돌아보면서 주민들을 통해 ‘섯바탱이’라는 마을 이름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확인해보려 노력했지만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바탱이’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등록된 순 우리말이다. 중두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중두리보다 배가 조금 더 나왔고 아가리가 좁은 오지그릇을 말한다. 마을입구가 좁고 마을 안에 골과 골 사이의 넓은 지형이 형성돼 바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아닌가 유추해본다.

그렇다면 ‘섯’이 남는다. 다른 지역에서도 섯바탱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도 섯바탱이라는 마을이 있다. 오천면의 경우 돌이 많아 ‘석바탱이’라 부르던 것이 ‘섯바탱이’로 변했다고 한다. 교동리 섯바탱이 마을도 같은 경우로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윗마을에서 만난 최갑선(70)씨는 본래 상주가 고향인데 남편 이성규(73)씨와 함께 30여년 전에 섯바탱이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 때 와서 한 일이 섯바탱이를 둘러싼 산에서 건축용 잔골재를 채취해 판매하는 일이었다고 하니 분명 돌이 많긴 했던 모양이다.

또 마을을 지나 깃대봉 방향으로 계속 가다보면 왼쪽으로 큰 정방형 돌을 쌓아올린 구조물이 보인다. 그 구조물을 통해서도 ‘섯바탱이’라는 마을이름이 ‘석바탱이’에서 오지 않았을까 유추해볼 만 하다.

◆백회 가마터 흔적 그대로
산자락이 짧게 흘러내린 곳에 만들어진 석조 구조물은 얼핏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의 한 부분으로도 보이지만 아래쪽에 네모난 구멍 두 개가 어색하다. 주민들로부터 그 구조물이 백회를 굽던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모든 의문이 풀린다.

▲ 섯바탱이 윗말에 있는 백회가마.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래쪽 네모난 두 개의 구멍은 다시 보니 아궁이다. 결국 그 구조물은 가마인 셈이다. 지금 위쪽은 흙으로 모두 메워져 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과거엔 그곳에 석회 원석을 깨 넣고 밑에서 불을 지펴 백회를 구워내었다. 백회를 구웠던 시기는 1950년대 근방이 아닐까 싶은데 구조물을 만든 것은 일제때라는 주장도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 나왔다. 구조물 설치시기는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이 분명한 구조물은 튼튼해 보였고 아궁이 공간을 받치고 있는 철이 많이 녹슬었어도 여전히 잘 버텨주고 있었다.

윗마을 최재권(69)씨는 그 가마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내가 20살 초중반 때 그곳에서 일을 했으니까. 한 40년도 더 된 일이네…. 원석을 잘라 한 켜 쌓고 그 위에 숯을 쌓고 다시 그 위에 소금은 얹지. 그렇게 세 켜를 반복해서 쌓아 올린 다음에 불을 지피면 절대로 불이 안 꺼져. 다 굽고 난 다음에 물을 뿌리면 하얀 백회가 폴폴 피어나는 거여.”

열심히 백회 굽는 법을 설명해주지만 보지를 못했으니 영 갑갑하다. 여하튼 그곳에 백회 굽는 터가 있었고 석회 원석을 주변 산에서 조달했다니 돌이 많아 ‘석바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것이 ‘섯바탱이’가 되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것이 아닐까?

◆일제 변전소 마을형성 시작(?)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는 오전시간이었지만 주위를 둘러싼 산에 가로막힌 태양은 섯바탱이 윗마을까지는 닿지 않았다. 밤새 얼어버린 마을을 둘러싼 공기의 차가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백회가마터와 마을을 오르락내리락 하던 중에 계속 눈에 밟히는 목조건물이 하나 있다.

   
▲ 옛 일제강점기 변전소 건물.
유리가 끼워져 있었을 창문은 휑하니 비어 있고 내부는 옛날 동네 꼬마들의 짓으로 보이는 낙서가 가득했다. 새 주인이 창고와 한 때는 우사로 사용했던 흔적도 보인다.

콜타르를 칠한 검은색 판목으로 지어진 것이 어릴 적 학교 건물을 연상시키며 건축연대가 일제강점기로 쉽게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나 다를까 주민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옛 일제강점기 변전소였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주변 철탑을 관리하던 변전소.

그를 반증하듯 건물 외벽과 내벽에는 어른의 큰 주먹만한 애자가 4∼5개씩 붙어 있었다. 내부 공간을 가르는 벽은 대나무와 짚, 진흙을 엉겨 만든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변전소 건물을 용역 맡아 건축에 나선 사람은 최일섭(작고)씨라는 분이다. 그리고 최일섭씨의 아들이 ‘백회 가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 준 최재권씨다. 최재권씨는 선친의 얘기와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조합해 섯바탱이의 옛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등 굽은 버드나무 마을변천 함께
“아버지가 원래는 이곳 분이 아니신데 저 변전소 건물을 지으면서 이곳에 터를 잡았대. 공사를 하면서 저 아랫마을에 집을 짓고 사니까 두 셋집 정도가 더 모여들어 마을을 만들었구. 그곳에 살다가 변전소 건물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윗마을에 다시 이사를 오셨다는 거야. 저 마을 첫 집이 처음에 우리가 살던 곳이지.”

그 첫 집을 따라 나란히 이어지는 집들도 모두 최일섭씨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최재권씨는 설명한다. 물론 지금은 모두 헐고 새로 지은 집들이지만 말이다. 최씨의 설명대로라면 섯바탱이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 아니면 30년대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최씨의 얘기에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김동신(67·새마을지도자)씨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주변에 독립가옥이 몇 채 정도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무리를 지어 마을을 형성한 것은 그 때쯤이었다는 얘기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이 오히려 가구 수가 늘어났지. 처음에는 윗마을 아랫마을 해봐야 20가구가 전부였는데 지금은 교동리 위쪽으로 볼 때 한 40가구는 돼지.”

보은으로 연결되는 37호 국도가 관광도로 노릇을 톡톡히 할 때 숙박업소와 음식점들이 들어선 덕이다. 지금도 섯바탱이 아랫마을의 랜드 마크 노릇을 하는 것은 음식점이다. 그 집 마당에 크게 휘어 오른 버드나무도 마을이 형성될 즈음에 심은 것으로 김동신씨는 기억하고 있다. 음식점 건물의 원래 주인이었던 김달선(작고)씨의 아버

   
▲ 윗말에 살고 있는 최재권씨
지가 심었던 것으로 대략 70∼80년 쯤 되지 않았을까 김 지도자는 추정했다. 그 즈음이 마을이 형성되었던 시기였을 것이고 둥구나무 노릇을 한 그 버드나무는 마을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마을 옆 국도, 조심 운전 당부
“아이구, 이제 뭐 옛날 숙원사업으로 지었던 경로당은 갈 사람이 없어 세를 놓을 판인데 뭘 바라겠어. 할 수 있다면 분구가 되면 좋구.”

옛 향교리와는 같은 교동리가 되었지만 산줄기와 저수지 등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섯바탱이 주민 입장에서 별도의 행정단위로 분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김동신 지도자는 얘기한다. 아무래도 행정기관의 관심이 지금보다는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일 것이다.

주민들은 또 37호 국도와 인접해 있는 마을의 특성상 과속하는 차량들로 연로한 주민들이 무척 위험하다며 운전자들의 조심운전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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