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피실여울, 덩기미여울①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피실여울, 덩기미여울①
피실편 [1] - 피실 뱃길 강 한복판에 서다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6.01.06 00:00
  • 호수 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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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겨울 추위가 한반도 전역을 감쌌습니다. 이 추위가 강을 얼게 했을까요? 살얼음이 언 겨울철 여울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만 꽝꽝 얼어버린 여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얼음 위를 걷는 모험(?)을 하도록 합니다. 모험이지만 이미 경험으로 ‘얼음 위로 건널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을겝니다. 이 길은 옥천으로 통하는 큰 길이었습니다. 장꾼들의 애환이 서린 곳,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물길은 크게 한 번 다시 휘돌아  피실여울에 닿습니다. 여울지기 정수병씨와 동이면 석탄리 덩기미 마을에 살았던 조봉현(73·옥천읍 상계리)씨와 조영운(68·옥천읍 죽향리)씨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 편집자

▲ 얼어붙은 대청호를 걸어서 건너는 이들. 안남면 연주리에서 이 피실뱃길을 건너면 동이면 석탄리 피실마을이었다. 강 한복판에 (왼쪽부터)조영운, 조봉현, 정수병씨가 섰다.
“과연 갈 수 있을까?”
12월 초순부터 몰아닥친 강추위가 온 나라를 얼게 만들었다. 그 여파는 여전하다. 주위에는 올겨울 들어 유난히 많이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잔설로 남아 있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아마도 고개를 넘어가려면 응달진 곳은 눈이 녹지 않았을텐데.

고개라면 지금은 자동차로 간단히 넘어가는 길. 그러나 옛날에는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걸어서, 걸어서 넘었을 것이고, 소 달구지로 짐을 운반하며 넘었던 길이다. 오늘 가는 곳은 금강에 깔린 여울 중에서도 가장 큰 길목 구실을 했던 피실여울이다.

피실여울은 동이면 석탄리 피실마을을 염두에 두고 붙여진 이름이다. 안남면 연주리 비둘목재를 넘어 강나루에서 건너편으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피실이다. 여울 이름이 붙여진 피실로 들어가자니 석탄리 안터 임도를 따라 굽이진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눈 때문에 도저히 다다를 수 없어 하는 수없이 택했던 길이 안남면 연주리를 통해 강나루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언 강이 숨쉬는 소리 ‘쩡쩡’
그래도 연주리로 넘어가는 길이 맞긴 하다. 여울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흔히 강건너에 볼 일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을 따라 발자취를 더듬어야 제대로 된 여울 탐사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둘목재를 넘는데 아니나다를까 군데군데 응달진 곳은 눈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는 날이면 그대로 낭떠러지다. 

왜 비둘목재냐고? 지금은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다만 들리는 얘기로는 연주리에서 강나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어디에 비둘기혈이 있다는 거다. 옛날에 무척이나 가난했던 사람이 고개에 올라서서는 ‘내려다 보이는 땅은 모두 내 땅’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였단다. 그 사람은 가난했지만 부를 꿈꾸며 자신의 소망을 놓지 않았고, 죽음도 고갯마루에서 맞게 되었다. 그 사람은 그대로 그 고개에 묻혔고, 이후 자손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같은 얘기가 전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묘소에는 비석이나 석물을 하지 않았다. 비둘기의 날개를 눌러 날아오르지 못할까봐여서란다. 

여하튼 비둘목재를 내려서다 연주리 자연마을인 점말 입구에 눈이 많다. 네 명이 탄 승용차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다. 점말을 스쳐 내려가다 또 한 굽이의 눈길을 만나고, 이를 헤치고 내려서니 강나루다.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모양새를 보니 영낙없이 이 곳은 배를 대야 할 나루터다. 강나루는 흰 얼음으로 덮였다. 온 강이 얼음 뿐이다. 추위가 예년보다 일찍 찾은 탓이다. 예전같으면 1월을 한참 넘어 한겨울 추위가 이어져야 하건만 올겨울은 추위가 일러 강이 일찍 얼었다. 햇살은 강 상류 쪽에서 강한 빛을 내리쬔다. 멀리는 씨구목재가 보일 듯도 하다.

강 건너엔 피실이 있네
강 건너가 바로 동이면 석탄리 피실이다. “이야! 강이 얼었네. 단단하게 얼어서 빠지지 않아. 이 정도면 저 차(800cc 경차)도 얼음 위로 건널 수 있어.” 조봉현씨와 조영운씨가 동시에 소리친다.

정말? 믿기지 않는다. 어물어물 언 강을 사진기에 담고 있는데 세 명의 어른들은 벌써 강으로 내려섰다. 경운기도 건널 수 있는 얼음 두께란다. 몇십 년 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나 보다. 우리는 얼어붙은 강 위 얼음을 걸어서 연주리에서 피실로 건너간다. 이미 강 기슭과 얼음 차이가 1m 가까이 나는 판에 얼음 위로 내려서는 발걸음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연신 강은 숨을 쉬느라 쩡쩡 소리를 낸다. 말이 그렇지 강 한복판 얼음 위에서 쩡쩡거리 얼음 숨소리를 들어보라. 겁부터 덜컥 난다. 실제 얼음은 여기저기 금을 가르며 갈라지기도 했다. 바로 서 있는 발 옆에서 쩍 하니 갈라지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런데도 강가에 살았던 조봉현, 조영운씨는 ‘괜찮아’를 연발한다. 강건너 피실에 닿았다. 피실 배가 다녔던 길을 따라 강을 건넜고, 바로 위 여울 흔적을 찾아 상류로 향했다. 여울은 대청호 물에 잠기고, 옛 기억으로만 길 흔적을 설명하는 두 사람.

“옛날 이 강가에 다니던 아주 큰 배가 있었는데. 사람은 물론 자동차도 싣고 다녔지. 강폭이 좁아서인지, 배가 커서인지 조금만 밀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닿곤 했어.” 조봉현씨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 큰 배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46년 병술년 장마에 떠내려갔다. 피실 나루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배를 항상 나무에 묶어 놓았단다. 병술년 홍수는 나무 밑둥을 파서 뿌리를 흔들어 놓더니 마침내는 배까지 삼켜버렸다. 그 사나운 물살에 떠내려간 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 지금은 사라진 석탄리 피실마을의 주택 흔적. 조봉현씨는 이 흔적을 신씨네 집이었다고 증언했다.
버스 다녔던 길 피실여울
“6·25 때였어. 피난민들이 피실여울을 건너서 보은 쪽으로 갔지. 그런데 어린애들은 건너질 못하잖아. 마침 살얼음이 어는 겨울이라 어른도 힘든 강 건너기였는데 아이들은 말해서 무엇해. 그 여울을 당시 피실 살던 올해 여든 여섯 자신 조해성씨가 업어서 건너 주었지. 지금은 교동리 살고 있던 어른인데 피난민들이 돈을 주면 받고, 안 주면 말고. 여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조해성씨 외에도 몇 사람이 함께 했던 일이었지만 참 대단했던 일이었다는게 조씨의 말. “아! 6·25 때는 피실여울로 버스도 다녔어. 이 길을 통해서 여울 자갈길을 버스가 지나다녔지. 그렇게 간 버스는 비둘목재 넘어 안남면을 거쳐 안내면과 보은으로 향했지.”

믿기지 않는 얘기였지만 당시 국도 구실을 한 장계리 다리가 끊어져 임시로 다닌 버스 길이었던 듯 하다. 그래도 여울로 버스가 다녔다는 것은 당시 이 피실여울과 나루가 엄청나게 큰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제는 텅빈 마을로 들어선다. 이 곳은 지금 인삼밭으로 일군 곳이 많다. 그 속에 사람들이 살았고, 마을이 형성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가 신씨네가 살았던 흔적이네. 화장실일거야. 마을에 주막도 있었고, 여울은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지금으로 봐선 길도 없고 이렇게 외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사람들이 모이고, 여울을 건너던 30여년 전엔 이 길이 옥천을 가는 큰 길이었음을 마을 흔적은 말없이 웅변해주고 있다.

피실 마을을 빠져나와 군이 닦아 놓은 임도 끝자락으로 들어섰다. 이 길은 예부터 있던 길과 합류하거나 새로 낸 임도이거나, 두 길을 합해 만든 것이다. 물이 빠졌을 때는 강변을 따라 옥천을 나갈 수도 있는 길이다. 지금은 물론 임도를 통해 석탄리 안터마을로 향한다.   

금강변의 겅검바우(약바우)


▲ 겅검바우
금강은 여러 자연을 함께 품고 있다. 그 중에 산은 물길을 막고, 물은 산을 이리저리 돌아 자신의 길을 간다. 피실나루터에서 조금 하류로 ‘약바우’로 불리는 ‘겅검바우’가 있다. ‘검검바우’, ‘겅건바우’라고도 불리는 이 바위는 말그대로 산 쪽에 붙은 절벽이다. 채소 등의 우리 반찬 겅건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일까? 어쨌든 겅건바우는 예부터 유명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바위 틈에서 자라는 푸르스름한 송진 같은 것을 따서 끓여 먹으면 채독(菜毒·채소를 날것으로 먹어서 생기는 중독증, 즉 인분을 준 채소를 먹을 때 십이지장충 등 기생충 알이 섭취돼 병으로 나타나는 것)에 즉효라고 해서 너도나도 채취하느라 바위를 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맛은 시금털털한 맛이었단다. 특이한 것은 지금도 바위 색깔이 다른 것과는 다르다.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바위에서 나는 독특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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