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85] 군북면 환평리
신마을탐방 [185] 군북면 환평리
떠오르는 태양의 절반은 고무실을 비춘다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5.12.30 00:00
  • 호수 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호국도를 타고 대전방면으로 향한다. 군북치안센터 앞쯤에 이르러 만나는 철도 밑 옹색한 터널을 들어서면 환평리로 갈 수 있다. 몹시 굽고 가파른 불편한 길이지만 아름다운 마을 환평리와 만나기 위해서 너무 평탄한 길을 따라가는 것은 면구스럽다.

눈까지 내려 더욱 조심스러워진 길을 따라 기어가듯 도착한 환평리. 도로 밑 비탈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 정겹다. 환평리는 ‘고무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자연마을은 없는 단일마을로 고무딸기나무가 많이 자라던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다.

주민들은 고무딸기나무를 ‘고무딸’이라 불렀다. 환평리라는 행정명은 마을이 기대어 있는 환산에서 왔다.

군북면에 따르면 백제 27대 위덕왕이 세자 때 이 성에 있었기 때문에 ‘환’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붙였다한다. 하지만 환산이라는 이름보다 고리산이 먼저니 ‘환평’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정통성을 반 정도만 부여하고 싶다. 지금은 40여 호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 대청댐이 수몰되기 전, 강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추소초등학교 근처. 사진 제일 왼쪽의 박복순 할머니는 1950년대 초반으로 당시를 기억했다. 아이들이 소풍을 가던날 따라나선 엄마들이 학교로 돌아와 기념촬영을 한 것이라 설명해주었다.

◆골목 만들어내는 돌담 아름다워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 마을로 들어간다. 구불구불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에 아랫집의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형국으로 들어선 집들이 마치 바닷가 마을에 온 느낌을 준다.

골목을 나누며 차곡차곡 잘 쌓아 올린 돌담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을에서 고무딸기 나무는 쉽게 발견할 수가 없다. 어느 집 돌담 밑에 자라는 두 그루를 본 것이 전부다. 마을이 비탈에 형성되어 있어 오르락내리락 하며 시시각각 입체적으로 변하는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흥겨웠다.

▲ 골목을 나누며 차곡차곡 쌓인 돌담길은 마을을 더욱 정감있게 만들고 있었다.

콧노래 부르며 마을 구경을 하다가 이 마을 최고령 할아버지를 만났다.

“많은 농토가 대청호에 수몰되었지만 이제는 아쉬울 것도 없어. 있는 농토도 농사를 안 짓는데 뭐. 지어봐야 수지도 안 맞고. 우리 정부에선 농촌사람들은 사람으로도 생각 안 해. 동물들이 굶으면 먹이도 주고 그러는데 사람이 죽어도 그냥 두잖아.”

이종호(93) 할아버지는 귀가 좀 어두울 뿐 아직도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지금 농촌 현실의 답답함을 토해 냈다.

“우리 동네가 이웃간에 우애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우리 다섯 형제는 다 여기서 살았어. 종성, 종만(81), 종석(75), 종관(72)이. 둘째만 작년에 먼저 가고...”

5형제가 지킨 그 마을은 수몰된 것만 빼고는 옛 모습 그대로다. 마루에 선 할아버지는 어릴 적 놀던 마을 아래 둥구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무 밑에서 놀다가 지치면 빈대가 들끓는 집보다 편했던 그곳에서 그냥 잠든 기억을 툭 토해놓는다. 이 옹의 깊은 눈 속에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금방 사라진다.

▲ 마을회관에 모인 고무실 주민들. 왼쪽부터 이정무(72), 전정남(76), 김순임(84), 천칠례(73), 박복순(79), 이홍례(73), 이수남(78), 이정녀(77), 유종순(84), 조금례(77)씨.

◆한겨울에도 따뜻한 마을
점심을 챙겨먹고 비탈길을 천천히 오르는 주민들의 모습이 골목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 모습이 미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난다. 아주머니 한 분의 꽁무니를 따라 마을회관으로 간다. 마당엔 ‘누가 타고 놀까’싶은 철마(쇠로 만들었으니) 두 마리가 빨갛게 녹슨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앞뒤로 흔들흔들 거리게 만들어 낸 솜씨 하나는 참 좋다.

“길이 좀 어뗘? 내일은 버스가 들어올 것 같어, 못들어올 것 같어?”

방문을 열고 신분을 밝힌 후 들어서는 낯선 젊은이에게 앞뒤 절차를 다 생략하고는 불쑥 버스 통행 가능 여부를 묻는 김순임(84) 할머니다. 연신 기침을 해대는 할머니는 천식이 있는 듯하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버스가 안들어와 답답한 모양이다. 내일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구, 이 정도 눈이라도 사람만 많이 타면 버스가 왜 안들어와? 장날이면 이 정도 눈이 와도 버스 들어오잖여. 몰랐어?”

한쪽에서 대화 중간을 가로 지르는 다른 주민의 말엔 굵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점심상을 물린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된장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보리밥이지만 한 술 뜨라”는 청에는 진심이 담겨 포근하다.

“그냥 인심 좋고 그런 동네지 뭐. 여름엔 포도·배·고추 농사도 좀 짓고. 이렇게 겨울이면 회관에 둘러 앉아서 놀지.”

산두릅도 하는 집이 좀 있긴 한데. 예전만큼 그리 많이 하지는 않는다. 한 때는 농가에 짭짤한 소득을 올려주던 작물이다. 땅두릅보다 맛이 좋아 잘 다듬고 묶어 장에 내가면 꽤 비싸게 팔리곤 했다. 마을회관 총무일을 보고 있는 이정무(72) 할아버지는 마을 자랑에 나선다.

“우리 동네가 양지여서 겨울에도 포근해. 이백리나 시내는 추워가지고 난리여도 여기는 그렇지 않아. 북쪽은 길게 늘어선 고리산이 떡 막아주고 마을이 남향이어서 그렇지. 아마 옥천에서 햇빛은 제일 많이 받는 동네일겨. 여름에는 지대가 높아서 시원한 바람이 불고…”

마을의 서북쪽을 든든하게 막아주고 있는 고리산 정상엔 큰 고리가 얹혀 있다는 옛이야기도 전해준다. 산 정상에 고리는 천지개벽이 일어 세상이 물에 잠길 때 배를 묶기 위해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물에 잠기면 그 고리에 가장 가까운 마을은 고무실이다. 정말 세상이 개벽할 일이 터져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산자락 오지주민들의 염원이 담긴 전설이지 싶다.

◆남은 고무실 이야기들
흥겹게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한다. 정말 사랑방이다. 도로를 기준으로 아래에 형성된 마을과 달리 위쪽에 있는 마을회관은 원래 농협창고였다. 대청댐에 농토가 수몰되고 창고에 쌓아둘 곡식도 줄어들면서 농협창고는 제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한 쪽을 막아 마을회관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여름이면 사방 벽을 둘러싸고 곰팡이가 피어날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다. 그래서 내년에는 새로운 마을회관이 지어지기를 주민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리산 중턱에서 지내던 산신제는 20년도 더 전에 그만두었다. 정월 추위에 찬물로 몸을 씻고 온갖 부정탈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제주를 고르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을 아니었다.

최근에는 칠월칠석에 마을 젊은이들이 둥구나무 아래에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 마을의 안녕기원을 대신한다. 낚시꾼들의 쓰레기 문제도 골칫거리다. 외지에서 많은 낚시꾼들이 마을안길로 내려가 낚시를 하고는 쓰레기를 놓고 가 그것을 치우는 것도 마을 주민들의 고된 일중 하나다.

한동안 줄을 묶어 통행을 못하게 막으려 해보았지만 주민들이 매번 열쇠로 열고 닫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어서 그도 흐지부지 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산짐승들도 걱정이다. 멧돼지가 고구마를 캐먹고 밭을 망쳐 놓는 것도 골칫거리다. 아직도 일부 비탈밭은 농우소와 일을 해야 할 만큼 힘들게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렇게 농사를 망치면 더욱 속상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을회관 방바닥에 앉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듣다 밖으로 나와 보니 도로에 눈이 삭 녹았다. 마을에 들어올 때 미끄러질까 기어왔던 것이 허망할 정도다. 양지바른 곳에서 형제같이 오순도순 흥겹게 살아가는 주민들의 따뜻한 정이 단단하게 다져진 눈을 모두 녹인 것 같아 가슴까지 따뜻해진다.

한 겨울 환평리 `공기맛 최고'
환평리 사람 다된 이영배 화백

   
▲ 이영배 화백의 화실에서.
이영배 화백이 환평리에 둥지를 튼 것이 이제 8년이 다 되어간다. 환평리 첫 집은 김영수씨네다. 그런데도 이영배 화백 집 근처를 지날 때가 초입으로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솟대 때문이다. 솟대와 돌탑이 세워진 그곳 비탈에 집 한 채 덩그러니 있다.

“저는 이곳의 겨울이 특히 좋아요. 상쾌하게 코끝에 감기는 공기 맛이 아주 그만이에요. 밖에 나가면 빨리 들어오고 싶을 정도거든요.”

8년 만에 환평리 마니아가 된 이 화백은 올해 용돈도 벌 겸해서 배 봉지 싸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경험은 몇 만원의 돈보다도 더 큰 감동을 이 화백에게 주었다.

“유재몽씨네 밭에서 일을 했는데요. 비탈 밭에 세워 놓은 사다리에 올라가 하루종일 일하고 들어오면 온몸에 쥐가 나는 고통은 말로 못하겠더라구요. 예술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고행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농사짓는 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정말 이분들의 노동은 고행이에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산 좋은 환평리 땅에 수박농사를 지었던 이 화백은 올해 옥수수를 심었다가 낭패를 보았다고 한다. 대학찰옥수수를 심었어야 하는데 일반 찰옥수수를 심어 상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더군다나 농약을 하지 않아 온통 벌레를 먹어 더했다.

“여섯 포대도 넘게 끝물 옥수수를 땄더니 동네분이 대전 중앙시장에 가져가보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분 트럭에 싣고 갔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예요. 간신히 한 상회에서 기름값 받고 다 넘겼어요.”

‘헐헐’ 웃는 이 화백은 환평리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