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84] 군북면 자모리(3) - 아랫자모리
신마을탐방 [184] 군북면 자모리(3) - 아랫자모리
부추·갓 농사 끝내고 마을회관 '북적'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5.12.16 00:00
  • 호수 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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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국도를 따라 옥천에서 대전을 가다보면 마지막으로 만나는 마을이 군북면 증약리와 함께 자모리다. 군북면 자료에 따르면 자모리는 증약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1908년 자모리로 분구되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자무실’이라고 불렀던 지명을 한자화 하면서 생긴 것으로 군북면은 밝히고 있다.

또 옛날 이 마을에 살았던 충신이 매일 국사봉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나랏님을 사모하였음으로 자모실, 자모곡이라고 하였다가 자모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자연마을로는 윗자모와 아랫자모, 그리고 그 사이에 셋집메로 나뉜다. 이번 호에는 자모리 마지막 편으로 아랫자모리를 소개하며 자모리 전체를 정리해 본다.

▲ 작은 논둑도 개구쟁이들이 비료포대를 타며 놀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다.
흰 눈이 소복히 쌓인 마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네 가지는 집 앞 눈을 쓸어내는 할아버지,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빨간 홍시, 눈밭을 뒹구는 꼬맹이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동네 강아지다. 자모리를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날. 제대로 내린 첫눈이 채 녹지 않아 마을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주민들은 집 앞 눈을 쓸어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마을은 아직도 눈을 뒤집어 쓴 채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하다.

한 손에 비료포대를 든 소년이 달려간다. 언덕배기에서 신나게 내려올 생각 때문인지 빨개진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연신 종종걸음이다. 잠시 후 소년들을 만난 곳은 자모리 언덕배기가 아닌 냇가다. 본격적으로 찾아든 추위도 개구쟁이들이 활개 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언덕에선 잘 안내려가서 못 타겠어요.” 비료포대를 가지고 냇가에서 노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근태씨네로 놀러온 손주들이다. 이재광, 이향선, 김은호. 초등학교 5·4·3학년 또래인 녀석들은 찬 개울물에 겁도 없이 발을 담근다.

“가끔 할아버지 댁에 와요. 여기 오면 재밌어요. 개울에서 노는 것도 재밌고, 그냥 신나요.” 개울에 얼음 조각을 건져 내 다시 물에 띄우며 놀던 아이들은 비료포대 미끄럼에 아쉬움이 남는지 냇가 작은 언덕에서 엉덩이를 부빈다.

추운 날씨에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이 걱정돼 달래서 집으로 보내놓고 아랫자모리 마을 구경에 나섰다. 마을 앞 큰 길을 따라 갈 때는 잘 모르겠더니 마을 속으로 들어서니 야트막한 산자락에 꽤 펑퍼짐하고 넓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남의 집 담 너머를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농사가 끝나고 주민들은 마을회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독대도 좋고 감나무 한그루도 좋다. 눈이 쌓여 더욱 좋다. 집과 집 대문사이의 거리는 주민들간의 ‘마음 거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 골목을 뛰어다니며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아이들만 넘친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한데, 아쉽게도 그 풍경이 빠져 있다. 꽁꽁 언 손발도 녹일 겸 마을회관을 찾았다.

자모리 마을회관은 아랫자모리에 위치해 있고, 윗자모리에는 콘테이너 박스로 만든 임시 경로당이 따로 있다. 마을회관에선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들 몇이 모여 있다.

마을 앞까지 버스 좀 어떻게 해봐∼
할머니들은 “오늘이 마을회관 문 연 날인데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며, “세 마을 중에 아랫자모리가 제일 큰데 맨 마지막에 왔느냐”고 퉁을 놓고는 방석을 챙겨 준다. 윗자모리와 달리 아랫자모리에는 조금씩 빈집이 늘어가고 있어 할머니들은 걱정이다.

“버스나 하루에 몇 대씩 들어왔으면 좋겠어. 아주 다리 아파 죽겠는데 저 앞까지 나가서 버스 탈라면 힘들어 죽겠다니까. 그러니까 아예 안나가.” 신문사에서 왔다니 할머니 한 분이 버스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야단이다. 4호 국도에 저리도 많은 차들이 다니는데 막상 마을은 대중교통에 대한 어떤 혜택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마을 앞, 개울물도 좀 어떻게 해야 되는데. 옛날엔 거기서 도슬비도 잡아먹고 그랬는데 요즘엔 원 더러워서 들어가지도 못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방용복 이장에게 확인해보니 오수를 모으는 관로 공사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마을 주민들이 마을 앞개울을 ‘아름다운 자연하천’으로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행정적 지원이 뒤따른다면 좋겠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개울이 흐르는 자모리. 한 여름, 할머니 집에 놀러오는 아이들도 맘껏 물장구 치고 물고기도 잡을 수 있으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고생했던 시절로 돌아간다.

다른 동네보다 고생을 더 많이 했다는 것이 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처로 마을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셋집메에서도 윗자모리에서도 들은 이야기다. 그만큼 주민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 자국을 남겨놓은 기억이라는 얘길 게다.

“그 사람들 재우고 먹이느라 고생은 말도 못했지. 한 집에 있는 사람들 굶길 수는 없잖아. 다 같은 입장이고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우리가 그렇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 그 사람들은 땔 나무도 해다 주고 그랬지.”

전쟁통이었으니 먹을 것이 그리 넉넉지도 않았다. 미군들이 소개령을 내리면서 집을 다 불태워 돌아와 보니 뒤주에 넣어 두었던 보리에서는 연기가 폴폴 올라오고 있었다. 빨갛고 시커멓게 타버린 보리를 꺼내 몇 달을 먹었다. 그나마 없어서 못 먹을 판이었으니.

“그래서 동네에 오래된 집들이 별로 없어. 한국전쟁 때 안타고 남은 집이 한 네다섯 채밖에 안됐으니까.” 화투판을 정리해 놓은 할머니들은 햅쌀로 지은 밥과 들기름으로 맛을 낸 미역국, 얼마 전에 담근 김장김치를 점심으로 내 놓았다. 추운 겨울 동네 사랑방인 마을회관에서 먹는 그 맛이 꿀맛이었다.

자모리와 얽힌 이야기들
그냥 연세 많으신 분들 곁에 앉으면 옛 전설이 솔솔 흘러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간신히 주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곤 무척 부잣집으로 살았던 최 첨지네 얘기다. 

갯골 근처에 살았던 최 첨지네가 얼마나 부자였으면 밥할 때 쌀뜨물이 이백리까지 흘러내려갔겠는가. 그만큼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얘긴데…. 한 할머니가 “지금도 갯골 밭에 가서 땅을 파면 옛날 그릇이 나오더라”라며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그 다음 들을 수 있었던 얘기가 ‘간대목’이야기다. 마을회관 뒤쪽 능선 한 부분을 말한다는데 예전에는 판암동으로 이어지는 주요 소로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용하지 않지만. 그 능선을 끊어 버린 바람에 산의 정기가 쇠해 마을에 훌륭한 인물들이 나오지 못한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간대목을 통해 바람이 너무 세게 밀고 들어와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 쯤 되어 마을 홈페이지에서 미리 조사해간 사기장골 전설에 대해 확인작업에 나섰다. ‘사기장골’이 셋집메 근처 어디라는 증언과 그 비슷한 얘기를 들어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난다는 얘기 정도밖에는 확인이 안됐다. (전설은 군북면 홈페이지 `http://gunbuk.oc.go.kr'에서 확인 가능) 한겨울 아랫자모리의 따뜻한 인심은 마을회관에서 솔솔 피어나고있었다.

옛날엔 통돼지 들쳐 메고 산제 지내러 올라갔는데…방용복 이장

“옛날에는 정말 큰 마을이었죠. 113호까지 될 때가 있었으니까. 지금은 한 96호 정도 될 거에요. 윗말이 36호, 셋집메가 10호, 아랫말이 50호 정도 돼요. 다녀보면 빈집이 이제 꽤 있거든요. 인구로는 한 350명. 그래도 작은 마을은 아니지요.”

대전과 가까워서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고 일부에서는 농가주택이 근사한 전원주택으로 탈바꿈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역시 빈집이 늘어나는 농촌마을의 요즘 풍경에서 자모리도 벗어날 수는 없는 모양이다.

   
▲ 방용복 이장
“전에는 농사밖에 모르는 빈촌이었어요. 가구당 평균 경작면적이 0.7ha정도 밖에는 안됐어요. 그러다가 비닐하우스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나아졌죠. 비닐하우스를 시작한 것으로도 아마 전국에서 손꼽힐 걸요. 전국에서 견학오고 했었던 게 지금도 기억나니까요. 그 때 하우스를 이용해서 3모작할 때는 충북에서 소득이 1위였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꽤 괜찮은 소득을 올려주었던 비닐하우스 농사를 그만둔 것은 ‘하우스 병’때문이었던 것으로 방 이장은 설명한다. 연작피해는 그만두고 사람이 하우스병에 걸리더란 얘기다. 허리가 굽고 감기는 떨어질 새가 없고. 그 와중에 따뜻한 아랫녘에서 본격적으로 하우스 재배를 시작하면서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면서 대부분 하우스를 철거했다. 그 때부터 부추와 갓농사가 자모리의 주 작목이 되었다.

인심 좋고 호인이 많아 어려웠던 시절에도 따뜻하게 알콩 달콩 살던 주민들은 산제도 아주 거창하게 지냈다고 한다.

“정월 열나흘 저녁부터 준비를 해 산에 올라가서 새벽 첫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내려와요. 한 새벽 두 시쯤 될 거에요. 한 17∼18년 전까지만 해도 제물로 통돼지를 썼어요. 그것도 발톱까지 시커먼 토종 꺼먹돼지를 썼죠. 흰털이 하나라도 섞여 있으면 안 되니까 산제를 지내기 전에 그 돼지 구하러 다니는 것도 일이었어요. 제사 끝내고 주민들하고 나눠먹으면 맛이 아주 좋았는데. 지금은 구할 수가 없어서 그냥 돼지머리 놓고 지내요.”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산제를 지내는 산제당의 오래된 놋쇠 그릇도 어느 해인가 밤손님들이 들어와 모두 가져가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허허 웃는 방용복 이장. 자모리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그에게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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