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80] 옥천읍 가풍리 - 윗가재골
신마을탐방 [180] 옥천읍 가풍리 - 윗가재골
가재 많아 `가재골', 아름다운 솔밭 어울려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5.10.14 00:00
  • 호수 7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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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가재골 솔밭 전경

비닐하우스가 들어서기 전에는 온통 누런 황금빛 들녘이었을 게다. 이제는 쌀이 제값을 받지 못하니 땅에서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은 가을 들녘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다 ‘가을 황금 들판’이라는 풍요롭고 넉넉한 표현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수확의 풍성함을 느껴야 할 가을, 4호 국도를 따라 옥천읍 가풍리를 찾아가며 든 생각이다. 가풍리 마을로 들어설 때 초행이라면 조심해야 한다. 철로 밑으로 옹색하게 난 길은 반사경의 도움이 없다면 운전자를 아찔하게 만들만큼 위험하다. 투덜거리며 철로 밑을 통과하면 눈앞에 넓은 마을이 펼쳐진다.

철로가 없었더라면 참 시원하고 너른 곳이었을 텐데. 찰흙으로 잘 빚은 작품을 가마에 넣기 전 손에 들고 감탄하다 바닥에 떨어뜨린 것처럼 안타깝다. 그래도 마을은 여전히 넓다. 그 마을 구판장을 끼고 우회전을 해 ‘위가재골’로 찾아든다. 옥천읍 가풍리를 구성하는 자연마을 중 하나다.

◆윗가재골 솔밭 이야기

   
▲ 한창 벼베기를 마친 후 휴식중인 한기환(왼쪽), 한순용씨
주민들은 가재골 보다는 가자골로 부른다. 가재골이 동네 주민의 입맛에 맞게 변한 듯싶다. 여하튼 ‘가재가 많이 잡혀서 가재골’이다. 참 쉽고 편한 마을 이름이다. 다른 설명이 전혀 필요 없다. 그러나 윗가재골을 찾아가며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가재를 담고 있을 높다란 산이 아닌 소나무로 형성된 공지선이다. 

동양화 화폭에서 본 듯한 삐뚤빼뚤 바람을 맞으며 휘어 하늘로 향한 소나무군이 야트막한 동산에 길게 늘어섰다. 한눈으로 보아도 도로 개설을 위해 솔밭을 뚝 끊어 놓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그곳에서 서서 솔밭 구경에 나선다.

길게 몸을 누인 짐승처럼 야트막한 구릉이 가재골 한쪽을 감싸며 경계를 이루고 그 위에 일정한 규칙 없이 심어져 있는 소나무들. 비전문가가 보아도 수령이 꽤 됨직하다. 마을의 초입도 그 솔밭에 의지해 있고 솔밭을 따라 길게 집들이 늘어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다. 

“저기가 얼마나 깨끗하고 좋았었는데. 사람들이 매일 구경도 오고 얼마 전에도 내가 풀을 깎아 놓았지. 도로가 나면서 한 40주는 베어서 처분했을 거야.” 

가재골 저수지 밑 논에서 한참 벼를 베던 한순용(51)씨가 말을 꺼낸다. 한씨는 윗가재골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랫마을로 이사를 간 경우다. 곁에서 벼 베기를 돕던 한기환(33)씨가 어린시절 추억을 끄집어 낸다. 

“저 어릴 때만 해도 소나무가 굉장히 좋았어요. 동네 애들 놀이터였죠. 거기 모여서 술래잡기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자치기도 하고 그랬죠. 길이 뚫리고 산소를 쓰기 시작하면서 소나무 밭이 조금씩 줄어든 것 같아요.” 

청주 한씨 문중 소유라는 윗가재골의 솔밭은 여름에 주민들의 피서지로 인근 지역민들의 휴양지로,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각광을 받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론 아니다.  논두렁에 앉아 아름다웠던 가재골 솔밭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옆에 와 멈춘다. “어이, 이 양반이랑 올라가서 가재 좀 잡아봐.”

윗가재골 가재 이야기 

한두섭(47)씨의 트럭을 얻어 타고 가재골 저수지로 올라섰다. 손바닥만한 저수지엔 강태공들이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선다. 장령산이 만들어낸 골짜기가 꽤 깊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의 양이 많지 않아 졸졸졸 가벼운 물소리만이 들려오지만 한눈에 보아도 물이 무척 맑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골짜기에 만들어 놓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콘크리트 구조물만 없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한두섭씨의 설명으로는 언젠가 수해가 발생했을 때 설치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용도가 불분명하다. 기회가 된다면 걷어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올해도 여기서 가재를 좀 잡았어요. 주로 봄철에 후라쉬(손전등)를 들고 밤에 올라와 잡아 가요. 많이 잡히지는 않아도 아직 있어요.” 손가락으로 돌을 가리킨다. “저거 쳐들면 지금도 나와요.” 

한두섭씨는 쉽게 돌을 쳐들지 못한다. 물이 신발을 벗어도 옷을 버려야 할 정도로 깊기는 했지만 돌을 막 쳐드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카메라를 옆에 놓고 물에 들어가 돌을 들쳐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가재가 나오면 어쩔 것이요, 안 나오면 또 어쩔 것인가. 반드시 가재의 모습을 확인해 볼 필요가 굳이 없어서다. 

“옛날에는 단백질을 섭취할 때가 별로 없었잖아요. 가재는 아마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거예요” 

마을에서 만난 이순금(80) 할머니로부터 들은 당시 가재요리는 그냥 탕이다. 물론 취향에 따라 구워먹은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할머니는 주로 탕을 만들어 먹었다. 

“가재 잡아다가 그냥 골파, 마늘 넣고 끓여 먹었지. 근데 많이 먹으면 설사 나.” 

빨갛게 익은 가재가 무척 맛있었던 것으로 할머니는 기억하고 있다. 저수지도 생기기 전이어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달려가 가재를 잡는 것은 먹거리를 구하는 것 이상의 재미를 주었다.

몸속에 잠자고 있는 ‘수렵의 본능’을 일깨워주니 오죽 재밌었겠는가? 한두섭씨와 올라간 길을 다시 되짚어 내려온다. 한씨는 가재가 살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환경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저 골짜기 위에도 누가 축사를 짓는다고 땅을 사 놓았는데 우리가 협의를 안 해줘서 못 짓고 있어요. 그거 지으면 안 되잖아요.”
 
◆윗가재골 호랑이 이야기

   
▲ 윗가재골 터줏대감 한정희(81)할아버지.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던 한씨는 ‘호랑이’ 이야기를 꺼낸다. 골이 무척 깊어 아무래도 지금 호랑이가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한씨의 얘기에 순간적으로 ‘피식’ 웃음이 난다. 아무리 골짜기가 깊어도 그렇지 2005년에 호랑이라니…. 

이런 반응을 눈치 챘는지 “지금도 겨울이면 일렬로 늘어선 큰 발자국을 볼 수 있다니까요.”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니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옛날에는 분명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었나 보다. 가재골에서 조금더 깊게 들어가면 ‘화장골’이 있다고 한다. 호랑이와 연관된 지명이었다.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 호랑이가 내려와 사람들을 잡아먹은 곳이라는 거야. 거기 화장골이.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호랑이가 먹고 남은 뼈를 그곳에서 태워 묻었다는 거지. 그래서 화장골이라 부른다는 거야.” 

마을 터줏대감으로는 제일 오래 윗가재골에서 살고 있는 한정희(81) 할아버지의 얘기다. 할아버지는 옥천군청 한기범 공보담당의 부친이다. 화장골엔 아직도 호랑이가 살고 있는 것인지. 겨울이 되어 눈이 쌓이면 장령산 호랑이가 남긴 발자국은 없는지 둘러볼 일이다.

윗가재골 마을이야기

   
▲ 자식들 줄 고추장을 담그다 마을 자랑을 펼쳐놓는 이순금(80) 할머니.
예전에는 한 40여 호 되었던 마을이 이제는 11가구 정도 남짓 남았다. 그나마도 좋은 경치와 조용한 마을 분위기가 좋아 외지인들이 찾아들면서 유지되고 있는 가구수다. 그래도 작은 규모 덕분에 아직도 가족 같은 분위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자랑이다. 

“아, 얼마 전에 우리집 고추건조기에 불이 붙었는데 동네 주민들이 내 일같이 나서서 꺼주었다니까요.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다 들에 나가 일하는 사이에 집에 있는 노인양반들이 나와서 호스를 연결해 불을 껐어요. 집까지 홀라당 다 타버릴 뻔 했는데.” 

한두섭씨는 아찔했던 순간을 얘기하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을 함께 흘린다. 한국전쟁 때 피난들어와 60년이 넘도록 그곳에 살고 있는 이순금 할머니도 고추건조기 화재현장에 출동했던 마을 주민 중 한명이다. 

“여기 뭐 동네 자랑할게 있나. 그냥 조용한 동네지.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이렇게 늙은이들만 지키고 앉아 있는데 뭐.”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집 마루에 앉아 자녀들에게 보낼 빨간 고추장을 휘휘 젓고 있는 할머니는 낯선 이에게 고추장을 찍어먹어 보라하고 간이 어떤지를 묻는다. 장령산 자락을 의지해 형성된 윗가재골은 예전에 마을규모가 꽤 크고 부호들도 많이 살았던 것으로 한두섭씨는 추정한다. 

“지금도 저 위 골짜기 밭을 갈다보면 구들장 흔적이 나와요. 그만큼 마을이 컸다는 얘기죠. 또 나무대문집이라고 불렸던 큰 집도 있었구요. 잘 사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 나무대문을 떼다가 우리집 대문으로 쓰기도 했었는데….” 

마을을 휘적휘적 두 바퀴 정도 돌아본 다음 다시 솔밭능선을 타고 올랐다. 비슷한 위치에 밭이 펼쳐져 있다. 지대가 꽤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탄저병에 걸려 수확을 전혀 하지 못한 고추밭 옆에서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박래훈(70)씨가 김장거리를 갈고 있다. 

“요즘에 농사져서 머 돈 되는 게 있어. 그냥 이렇게 먹을 거나 좀 심어서 먹는 거지.” 

장령산 비탈을 타고 온 가을저녁 바람이 꽤 쌀쌀하게 옷 속으로 파고든다. 시대가 어찌된 것인지 농산물과 농촌이 도매금으로 천대받는 안타까운 요즘이지만 장령산 자락에 푹 파묻혀 있는 윗가재골에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여전히 포근한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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