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79] 옥천읍 원각리 - 큰말, 작은말
신마을탐방 [179] 옥천읍 원각리 - 큰말, 작은말
성주 이씨 집성촌, 당산제 전통 이어져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5.09.30 00:00
  • 호수 7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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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읍 원각리 마을 전경

옥천읍 원각리에 가려면 물방앗거리(응천리)에서 내리는 것이 좋다. 차에서 내린 채 자전거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소정리까지는 건너편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고, 응천리 하천을 따라 둑방길을 서서히 올라가는 것도 좋다.

들판과 하천, 그리고 국도4호선. 그것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응천리를 벗어나 서대리 신대마을, 서당골을 지나면 군남초가 나온다. 학생이라고는 100명 남짓 다니는 작은 학교이다. 일요일 오후,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다. 더 폐달을 밟아 서당골을 벗어나면 원각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동차로 가면 원각리 큰말부터 들르게 되지만, 자전거로 가면 작은말부터 자연스레 가게 된다. 작은 말 입구에 서있는 자그마한 돌장승이 원각리 작은말의 수호석이라면 원각리 큰말 맞은 편에 서 있는 200년이 훌쩍 넘는 느티나무는 원각리 전체를 아우르는 수호신이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당산제를 지낸다. 산신제 등 마을의 제사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 옥천읍 원각리에선 당산제의 의미는 크게 남아있다.  마을 노인들은 그것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큰 축제라고 믿고 있다.

◆원각리는 어떤 마을?
48가구, 14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옥천읍 원각리(이장 이진호)의 `원각'이란 마을 지명은 오래된 지리서 등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각(院覺)은 본래 작은말 들판의 지명으로 불리던 신원(新院)과 각리동리(覺里洞里)의 지명 중 `원'자와 `각'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이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각리동리는 현재 도로변 큰말을 일컫던 마을로 1890년의 기록을 보면 10호가 거주하고 있다가 1910년 가척동리, 신원과 함께 가풍리로 통합되었다. 기록에는 원각이란 지명이 일제 강점기에 와서야 나타나지만 주민들이 말하는 마을의 역사는 훨씬 깊다. 마을은 본래 `두영(斗靈)'이라 불렸고 이것이 '뒝이'로 변해 지금도 어른들은 원각보다는 `뒝이’라고 불러야 잘 알아듣는다.

본래 원각리는 옥천 육씨 문중이 오래전부터 살아왔었다. 옥천육씨 문중에는 지난 92년 작은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동산에 합동제단을 세워놓고 옥천육씨의 유래를 밝혀놓았다. 유래비에 의하면 원각리에 거주한 옥천육씨는 17대 선조인 육금언 공이 원각리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니 정작 그 뒤에 집성촌을 이룬 성주이씨는 한참 후에야 이룬 문중이었다.

옥천 육씨의 11대조 할머니가 성주이씨인 이인희 공과 결혼해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이 최초인데 이인희 공은 처가가 있는 마을에 들어와 살며 집성촌을 이룬 셈이 됐다. 많았을 때 30호까지 되던 성주이씨 문중은 현재 전체 48호 가운데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성주이씨가 번창하면서 본래 원각리의 세거 문중이었던 옥천육씨는 차차로 떠나 일제 강점기때 육도천씨가 떠남으로써 단 한 가구도 남지 않게 되었다.

◆느티나무에 얽힌 이야기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국도를 지나다 보면 단연 눈에 띈다. 마을 느티나무(높이 15m, 둘레 5.5m의 나무로 82년 보호수로 지정) 주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당산제' 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수령이 400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주민들의 얘기. 그래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많다.

원각리의 느티나무도 본래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양옆에 마을이 있었지만, 용암사가 들어서고 나서는 한 마을이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가풍리 쪽 없어진 마을의 지형이 `갈가마귀 혈'이기 때문에 용암사가 창건된 후 종과 목탁소리에 놀라서 마을이 사라졌다는 전설이다. `종과 목탁을 치니 갈가마귀는 날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이덕기(75)씨는 “현재도 느티나무 주변의 밭을 갈다 보면 기와 파편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실제 마을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은 이 느티나무에서 당산제를 올린다. 마을 사람들에게 당산제의 의미는 확고하다. 그 옛날 마을 한 주민이 이 느티나무의 죽은 부분을 도끼로 잘라내어 땔감으로 쓰려했다가 나무 위에서 내려온 귀 달린 큰 구렁이에 물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전설은 느티나무의 신화를 더 공고히 해주고 있다.

“젊은 사람들 안 지낸다고 슬금슬금 빼길래 내가 호통을 쳤지. 그건 꼭 지내야 한다고. 그래야 마을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야.”

“암만, 그 나무에 제 안 지냈다가는 마을에 큰 일 나요.”

이덕기씨 부부의 대화에서 당산제의 의미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원각리 사람들
빈 드럼통 굴러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울타리도 없는 조그만 흙집 앞마당에서 한 노부부가 부지런히 콩을 털고 있다. 이용호(67)씨가 돌리는 것은 오래된 수동 탈곡기, 발로 밟을 때마다 수동 탈곡기는 신이 나게 돌아가고, 이용호씨의 손에 붙들린 콩 다발에서 콩이 후두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콩을 주워 마당에 펼치는 것은 부인 이일순(65)씨의 몫이다. 박자를 짝짝 맞춰가며 일을 한다. 잠깐 틈을 내 말을 걸었다. 오랫동안 잘 보존해 온 수동탈곡기에 대한 애착이 크다.

“이거 이제 어디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해요. 제대로 쓰려고 잘 보존해 뒀어요.”

그리고서 사는 것이 어렵다고 푸념을 한다. 

“오래 된 흙집이라고 지난해까지 나오지도 않던 가옥세가 올해 나왔어요. 1년에 1번 만원쯤 내는 가옥세지만, 밭농사 조금 짓는 노인들에겐 감프죠. 벌이도 시원찮은데, 전기세니, 의료보험료 등을 내면 그냥 그냥 살아요.”

이용호씨는 100년이 넘은 오래된 집에 살고 있다. 부엌에는 겨울을 대비해 미리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가득하고, 조그만 소막에는 아직 덜자란 송아지가 숨을 식식거리며 쉬고 있다. 조금 골목을 따라 오르니 이교식(73)씨네가 보인다. 노인회 총무를 맡고 있는 이교식씨는 마당에 빨갛게 익은 고추를 널어놓고 있다.

이교식씨는 현재 동이면 평산리에 있는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기윤 망북비의 주인공 이기윤 선생의 직계 자손이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이를 비통하게 여기고 국권수호와 민족자존의 의지를 굳게 다지기 위해 1921년 이기윤 선생이 세운 이 비에는 "임금님께서 돌아가시니 해와 달이 빛을 잃었구나. 온 국민이 마치 어버이를 잃은 듯 망극하다"라고 비통한 심정을 한문으로 음각해 새겨있다.

당시 국상을 당하면 온 국민이 임금이 계신 곳, 즉 북쪽을 향하여 북향사배를 드리고 슬피 울며 다짐한데서 `망북비'란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교식씨는 남곡리 개미재에서 태어났지만, 응천리에서 살다가 6.25때 원각리로 이사 왔다. 아마 성주 이씨가 살고 있는 핏줄에 이끌렸던 모양이다. 이교식씨의 아들 이종국씨는 현재 대전 KBS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이교식씨의 집에서 나와 조금 내려오니 김경자(71)씨의 집이 보인다. 김경자씨는 어릴 때 원각리서 자라서 다른 곳으로 이사 왔다가 이 곳으로 다시 정착한 경우다. 노년을 보낼 곳을 찾아다니다가 어릴 적 기억을 못 잊어 다시 정착했단다.

논농사 3만 평을 짓는다는 이 마을의 대농 이진호(49) 이장은 일하느라 바쁘다. 비 때문에 고꾸라진 벼를 베느라 한창이다. 이진호 이장의 품성은 마을 사람에게 정평이 나 있다. 착하고 성실하게 마을 일들을 세심하게 챙긴다는 이진호 이장은 이제 4년째 이장을 맡아보고 있다. 마을자랑을 하라는 말에 “원각리 사람들은 참 착하다”고 수줍게 한 마디 한다.

시내 종점에서 진만두를 경영하는 태형이네는 10년 전에 정착한 원각리 사람이고, 삼양리에서 조마루 감자탕을 하는 박옥임씨도 원각리 사람이다. 박옥임씨는 철도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고 차석으로 졸업한 큰 아들과 군대에 지원한 막내딸 등으로 신문지면에 여러번 소개된 적이 있다. 시내에서 PC119를 운영하는 김달용씨도 원각리에 사는 김상덕씨의 아들이다.

김달용씨는 “원각리 사람들은 참 수수하고 평화롭다”며 “고향을 갈 때는 늘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요즘 컴퓨터 때문에 시간 가는줄 몰라"
원각리 노인회장 이덕기씨

   
▲ 컴퓨터에 빠져 있는 원각리 노인회장 이덕기씨
“나 지금 백두산도 한바퀴 둘러보고 오고, 불국사도 가보고 오는 중이여. 국회 사무처에 가서 국회 돌아가는 상황도 보고, 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들어가서 민원이 뭐 올라왔나도 살펴봐. 아들 손자 녀석들한테 이메일을 보냈는데, 너무 자주 보내니까 답장이 뜸하네.”

약간 어두운 안방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빛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덕기(75) 노인회장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다. 그의 컴퓨터 실력은 수준급이다. 단번에 검색엔진을 이용해 옥천신문 홈페이지도 쉽게 찾아낸다.

“배웠지. 늙어서 앉아 있으면 뭐해! 복지관 다니면서 서예도 배우고, 생활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요즘 배우는 재미에 신이 나!”

아침 10시에 나가 오후 4시 반쯤 돌아오는 학생 같은 생활. 이런 향학열 뒤에는 어렸을 적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이덕기 회장의 어려운 시절이 담겨 있다.

“내 어렸을 때 동이면에 사립학교가 있었는데, 거기 4학년까지만 다니고 말았을 거야. 그 뒤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

그는 늦게까지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세세한 것 하나하나를 공부하고 있었다.

“컴퓨터는 만물 상자여. 모든 게 다 들어 있거든. 막내가 인터넷 비용 대주고, 큰 아들이 컴퓨터 사 주고, 또 `피시119(PC119)'하는 달용이가 컴퓨터도 고쳐주고. 난 여러모로 편하지.”

현재 이덕기 노인회장은 6·25참전 전우회 운영부장과 재향군인회 이사도 맡고 있다. 둔산경찰서에 있는 이인철 경사, 기업은행에 다니는 이교진씨, 청주 보험회사 근무하는 이교문씨, 강경여고 교사인 이윤희씨, 일산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 이미희씨가 이덕기씨가 키운 5남매다.

“우리 집 아들 딸 세 명이 옥천신문 구독하니까 신문에 잘 나오게 해줘야 해.”

그는 75살의 나이를 뛰어넘어 배우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가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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