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77] 군서면 금천리 양짓말
신마을탐방 [177] 군서면 금천리 양짓말
여름이 떠난 금천계곡, 요맘때가 `최고'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9.09 00:00
  • 호수 7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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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계곡을 가운데 두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최근엔 민박집이 많아졌다.

여름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금천리 마을이지만, 이미 가을로 들어선 9월의 금천리는 지난 여름과 참 다른 표정이다. 길게 늘어 선 자동차의 행렬도, 물놀이 기구를 옆구리에 끼고 환한 미소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 자리를 차분한 표정으로 채우기 위해 금천리를 찾아온 사람들의 모습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거울처럼 투명한 금천계곡에 비친 가을에 하염없이 빠져 있는 그들과 함께 고요한 시간을 즐겨본다.

“그냥 퍼먹어도 돼요!”
금천계곡의 아름다움에 빠져 정신을 놓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한 마디 툭 던진다. 60대 후반쯤 보이는 노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거닐던 중 기자의 모습이 눈에 들었나보다. 차림으로 보아 금천리로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다. 이름을 밝히기도, 사진을 찍기도 점잖게 거절하던 부부가 한 마디 더 남긴다.

“가까운 대전서 왔어요. 딱 요맘때 금천리 계곡이 젤 좋더라구요. 그래서 가을이면 꼭 들러 물구경 하다 갑니다. 물이 워낙 깨끗하고 시원해서 그냥 마셔도 좋던데요.”

나뭇잎 떨어진 여울 위로 송사리 한 떼가 부지런히 몰려다니고 있다.

예전부터 붐비던 마을
금천리 양짓말(웃말)은 장령산 휴양림을 알리는 대형석조물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을 집하장에 붙어있는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되는 마을이다. 금천교. 76년 12월에 준공된 이 다리가 생기면서 여울을 지나지 않고는 화물이나 마차가 다니기 힘들었던 마을의 불편이 크게 줄어든다. 양짓말 여옥구(58)씨의 기억을 빌어보자.

“어렸을 적 소를 끌고 여울을 건너던 사람들이 기억나요. 사람들은 모랫재(금천천을 건너지 않고 평곡리로 이어지던 길)를 넘어 다녔어요. 지금 길 말고 여울 안쪽으로 난 길이 컸어요. 그러다 길이 조금씩 닦이고 다리가 생기면서 지금의 길이 됐습니다. 양짓말이 작은 마을이지만 사목재를 거쳐 이웃한 금산이나 옥천장을 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사람이 끊이지 않는 마을의 명성은 금천계곡을 찾아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전부터 있었던 것. 마을의 운명이었나 보다. 삼 장사도, 곶감 장사도 양지말의 앞산 서대산 작은사목재를 거쳐 왕래를 했다. 그래서 왕래 객을 맞았던 마을 입구의 커다란 주막도 주민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생생했다. 먼 길을 걸어 온 길손들의 주린 배를 따뜻하게 달래줬을 주막이 지금은 관광객들을 맞는 식당으로 그 모습을 바꿔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양짓말 꿀포도... 이젠 늙었지.”
금천리 양짓말에는 21가구 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이 마을을 지키고 있던 열 여섯 가구는 노지포도와 느타리버섯, 콩, 고추 등을 작은규모로 경작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여름철 성수기 민박을 운영하기도 한다.

최근 3∼4년 새 마을 안쪽으로 전원생활을 찾아 이주한 가구(5가구)도 늘어 마을 인구의 감소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집하장에 차를 멈추고 고요가 감싸고 있는 마을길에 들었다. 가까운 포도밭에서 콩을 거두고 있던 김이식(73)씨가 보인다.

“포도는 끝나셨어요?”
“포도? 아이구 해봐야 헛거여. 음짓말은 그나마 괜찮다더만 여긴 뭐 암껏도 없어.”

김씨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담배 한 대를 빼어 물었다. 담배연기를 헤치고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니 여러 채소가 심어진 밭에서 멈춘다.

“양짓말도  한때는 천지가 포도밭이었어. 92년도던가 까지는 참 좋았지. 포도따서 서울가면 금천리 꿀포도 왔다고 상인들이 몰려들어 다른 포도는 내놓지도 못했으니까. 근데 이젠 헛거여. 포도나무도 늙어 병도 심하고, 수확도 시원찮아. 음짓말서 포도하는 사람도 다 나 같은 노인네들이니 우리 먹고, 자식들 주는 거나 조금씩 하는 거지 뭐.”

금천리에서도 가장 먼저 포도가 재배됐던 곳이 바로 이곳 양짓말이다. 지대가 높고 밤과 낮의 기온차가 높은데다 늘 마르지 않는 금천계곡물로 양짓말 포도는 한때 최고의 명성을 구가 했다.

“포도 값이 차츰 떨어지기 시작했고 하나 둘 포도를 포기했지. 양짓말에서 포도하는 사람도 이제 너 덧 명밖에 남질 않았어.”

나무도 늙고, 나도 늙었다는 노인의 기억을 담고 다시 걷는다.

누님을 그리는 한 실향민의 이야기
제법 마을의 젤 꼭대기까지 올라 온 것 같다. 장령산을 뒤로하고 서대산을 마주한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구여. 여기 와 햇밤이나 잡숫구랴.”

부르는 소리를 따라 아늑한 토담집으로 들어간다. 대들보에 걸린 깨끗한 명패가 눈에 들어온다. ‘최해룡, 한채옥 의 집’. 최씨(69)는 황해도 장연군 낙도면 지경리가 고향인 실향민이다. 그의 아내 한씨(68)의 고향은 금천리에서 가까운 금산 추부.

부부는 최씨가 처음 옥천 땅을 밟은 64년에 만나 2남2녀를 키우고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해방되던 해 아버지와 단 둘이 고향을 떠나 남쪽에서 살게 됐지. 전쟁 통에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기고 분단을 맞았어. 배운 것이 없다보니 안 해 본 일이 없었어. 방방곡곡을 떠돌다 64년 4월28일 이곳 금천리에 들어왔어. 바로 저기 바위(장령산 휴양림 주차장 부근 정자 위쪽)보이지? 저기 옥천철광이라고 철광이 있었거든. 일하러 왔지.”

그가 스물여덟 되던 해였다.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될지도 모르고 찾은 옥천에서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가 다니던 철광은 2년 뒤 문을 닫았다.

“농사에 농짜도 모르던 내가 그렇게 농사꾼이 된겨. 66년 바로 이 집을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짓고 나락농사부터 포도까지 부지런히 했지.”

그렇게 혈혈단신 홀몸으로 시작한 삶은 갖은 풍파 속에서도 금천리 양짓말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올해로 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고향과 그곳에 두고 온 누나 생각을 잊어 본 적이 없단다.

“살아 계실 터인데...올해 일흔 둘 되셨네. 기자양반이라니까 다른 건 놔두고 이건 꼭 신문에 내줘요. 누나를 찾고 있다고, 이북에 계신지 전쟁 통에 내려 오셨는지 모르지만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내에서 심부름 일을 하다 헤어진 누님 최옥화씨를 찾는다고요. 작고하신 선친 이름은 도울 우(祐)에 쌍길 철(喆) 최우철 입니다.”

최씨 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선으로 해가 저문다. 이날따라 노을은 최씨의 누나에 대한 그리움처럼 더욱 짙게 타오르고 있었다.

상수도 들어와야...물 문제 불편
최씨의 집을 돌아 나온 길이 마을의 제일 끝집인 이선희(49)씨의 소막까지 이르렀다. 이씨는 금천리 새마을지도자를 맡고 있다. 이씨는 마을의 노령화가 노지포도 가격의 하락과 맞물려 다소 침체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

“여느 마을처럼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나가 있습니다. 그래도 고향을 잊는 사람은 없어요. 양지말, 음짓말 청년들이 상포계를 조직해 매년 모이고 있거든요. 30대 중반부터 60대까지 3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어요.”

양짓말의 불편사항으로 그는 상수도 문제를 꼽았다.

“마을이 위에서 아래로 경사가 있다보니 위쪽에 있는 가구에 물 공급이 안 좋아요. 지하수를 파서 해결하는데 하루빨리 상수도가 들어와야 고지대 가구의 물부족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습니다.”

이씨를 뒤로하고 나니 벌써 마을 한 바퀴가 끝이 났다. 포도밭 사이로 하얗게 닦인 마을길이 참 정겹다.

``열정이 아쉽네요''
금천리 포도의 산증인 김형구 노인회장

장령산골포도. 그 가운데서도 으뜸을 자랑하는 금천리 꿀포도가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한 공무원의 ‘안목’으로부터 시작됐다.

한때 대전시 판암동에 포도밭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 포도의 가치를 간파하고 자신의 마을에 묘목을 들여온 김형구(80)씨가 바로 그 공무원. 김씨의 이러한 안목이 바로 금천리 꿀포도의 명성을 가능케 한 주춧돌이 됐다.

“한 50년쯤 됐네요. 처가가 있던 판암동에서 처음 묘목을 들여왔을 때만 해도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저 양반이 뭐하나 하고 웃고 그랬으니까요. 당시 판암동에도 포도 밭이 몇자리 없었거든요.”

그러나 그가 선택한 포도는 금천리 특유의 영농환경과 맞아떨어지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그도 공직을 정리하고 포도에 뛰어들어 평생을 바쳤다.

“포도가 성공하면서 이 마을도 변하기 시작했어요. 포도가 나갈 길이 만들어지고, 다리도 만들어졌죠. 지금도 눈에 선 하네요. 허허.”

그런 그이기에 최근 포도농가의 시름을 보는 마음이 더욱 아프다. 그는 포도를 들여왔던 그의 청년시절을 돌이키며 그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포도야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 사람이 나처럼 다 늙어 버렸어요. 젊은 사람들이 늘 포도를 연구하고 가꾼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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