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76] 이원면 장화리
신마을탐방 [176] 이원면 장화리
99년 문화마을 지정이후 풍경은 많이 바뀌었지만 인심만은 그대로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5.09.02 00:00
  • 호수 78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마을 소류지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산이 보이고 산 그림자를 담아낸 개심저수지가 보인다.

#1. 마을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누렇고 좁다란 시골 비포장길이 아니다. 마을 안까지 시원시원하게 쭉쭉 뻗어나간 신작로가 낯설다.

마치 경지정리 하듯 네모반듯하게 자리 잡은 아담한 집들 또한 새롭다. 꽤 덩치가 있는 2층 마을회관과 십여 대를 거뜬히 주차해놓을 수 있는 주차장, 그리고 놀이터, 마을 안길에 총총히 심어놓은 백일홍도 익숙하지가 않다.

이원 벚꽃 길을 한참 지나 대성초에서 방점을 찍고, 영동 양산가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마지막 마을의 풍경은 이랬다. 툭툭 차창에 지나치는 시골마을의 풍경은 다른 듯 닮아 있었으나 그 길목에 다다랐을 때는 차를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마을이 완연히 다른 신세계는 아니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겉 포장지는 너무도 준수했다. 대성산에서 이어져 내려온 산맥은 감토봉과 문안산, 영국사 천황봉을 거쳐 마니산까지 그 맥을 같이 했고, 드넓은 개심저수지는 꼬마 아이에게는 ‘저게 바다란다’고 거짓말을 치더라도 믿을 만 했다.

#2.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탐색할 때는 바싹 긴장이 든다. 생뚱한 ‘장화문화마을’이라는 표지판도 눈에 걸린다. ‘장화리면 장화리지!, 웬 문화마을’ 괜한 심술이 나지만, 찬찬히 살펴본 마을의 모습은 그 심술을 너그럽게 감싸 안을 만큼 포근하다.

신작로 한 가운데 희끗한 머리와 주름진 손으로 여유롭게 참깨를 터는 노부부가 순식간에 마술을 풀었다.  ‘카드로 만든 집’같은 낯선 마을은 이제 정 많은 시골마을 안으로 부드럽게 편입했다. 윤상연(75)씨 부부가 참깨를 볏짚으로 묶어놓으며 햇볕에 말린다.

그렇게 바싹 말린 참깨는 몇 번을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더니 보슬보슬한 참깨 알을 벼락같이 토해낸다.  “그래, 이게 바로 깨알이구나!”

놀이터 건너편에 이민재(72), 조완수(68)씨 부부도 똑같이 참깨를 턴다. 느릿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몸놀림, 마치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에 몸을 내맡긴 듯 하다. 산 기운이 슬그머니 내려왔고, 물 기운이 엉금엉금 올라오더니 사람 속에 또아리를 틀며 그 선을 그려내는 것 같다.

#3. 한옥 기와가 멋지다. 한옥을 둘러싼 대나무 병풍 또한 기가 막히다. 그 안에는 고구마와 상치, 배추, 호박이 모여 산다. 작은 소나무도 한 그루 심었다.  널따란 마당에 아직 나무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대청마루,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독대도 눈을 편안하게 한다.

2005년 4월 조치원이 고향인 정영숙(51)씨, 울산이 고향인 오경화(57, KT&G 직원)씨 부부는 대전에 사는 집을 놓아두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다른 것 다 버리더라도 이 집만큼은 영원한 가보로 물려주고 싶을 만큼 새 집에 대한 애정이 많다. 오경화씨는 마당 앞에 잔디를 심느라 손님의 기척에 거들떠 볼 새도 없다. 정영숙씨가 어느 새 시골아낙의 품새로 포도 두 송이를 꺼내 온다.

94년 병석에 누워있는 시부모를 10여년간 봉양해 마을 효부로 이름났던 이경자씨의 남편 강범열씨가 나들이 나왔다.  강위수(56)씨도 새 이웃 집고치기에 참견쟁이(?)로 나왔다. ‘허허’하는 웃음소리가 외지인과 본토박이의 경계를 단박에 허문다.

“앞 집 방앗간에서 방아 쪄 밥 해먹고, 농사지은 포도, 복숭아 맛보라고 이웃에서 한 상자, 두 상자씩 가져와서 올 여름에는 과일을 슈퍼에서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어요. 아들네 호박 좀 갖다 준다고 하면, 이웃에서 한 덩이, 두덩이 보태 주고요. 이 아저씨는 두꺼비만 적당히 먹으면 사람이 참 좋은데 말에요.”

호박을 건네 준 인심 좋은 강범열씨를 가르치며 술(소주)을 그만 먹으라는 농이다. 이제 이사 온지 5개월이 채 안 되는 도시인은 시골사람과 그렇게 어울렸다. 아니 시골사람이 부리는 ‘정’이라는 마법에 단단히 걸려든 셈이다. 장화리의 인심은 그렇게 표가 났다.

#4. 장화리의 풍경은 99년 이후 많이 변했다. 누렇던 마을 안길이 새까맣게 포장됐고, 새 집이 속속들이 들어섰다.  오래간만에 고향에 들른 사람들은 자기 집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마을이 많이 바뀌었다. 문명화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온정은 그야말로 오래전 그것처럼 따뜻하게 보온됐다.

산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물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주름진 손안에 잡힌 ‘사람마음’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닮고 태어난 장화리의 포도와 복숭아가 문득 먹고 싶어졌다.

윤용병 마을이장의 독백

   
▲ 윤용병 이장
어릴 때부터 키가 유난히 컸던 나는 학교에서 촉망받는 핸드볼 유망주였다. 줄곧 걸어서 다닌 대성초, 잔꾀를 부려 도망가곤 했던 나에게 운동 열심히 하라고 회초리를 많이 들었던 이선득 선생님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전사에 들어갔다. 7년 동안 힘겨운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한 나는 혈기왕성한 27살의 청년이었다.  제대를 하고 두 달여 동안 직장생활을 했지만, 틀에 박힌 생활과 지루한 일거리는 내 적성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낙향했다. 아니 다시 당당히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왔으니 꽤 놀라셨을 것이다. 그렇게 농사를 지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던가? 개심리 저수지는 저토록 고여 있건만 세월의 물은 폭포수처럼 흘러간다. 아들 현중이는 어느새 6학년이 되었고, 딸 소희는 4학년이다. 다 내 모교를 다닌다.

더구나 나 어릴 적 은사님인 이선득 선생님이 우리 아들, 딸이 다니는 내 모교의 교장 선생님이다. 선생님을 찾아가 “핸드볼 안 한다고 많이 맞았던 윤용병입니다” 했더니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떠올리신다. 그래도 참 고맙다. 나를 기억해줘서. 나는 이제 43살 중년이다.

나는 3년째 이장을 맡고 있고, 장화리 과수 작목반장을 19년째 맡고 있고, 영농회장도 3년째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어떻게 나에게 이런 중책을 맡기셨는지 고맙고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내 마을은 나와 같이 자랐고, 또 나와 같이 늙어갈 것이다. 내 오랜 친구나 다름없는 우리 마을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

얼마 전 군에 민원을 넣은 ‘인터넷 개통’문제도 그렇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보다 편안한 마을 환경, 미래가 있는 마을을 조성하고 싶다.  아이들은 나처럼 20년 후에, 30년 후에 다시 이 마을에 돌아올 수 있을까?  기꺼이 다시 찾을 수 있을 만큼 행복한 마을을 만들고 싶은 것이 내 꿈이다.

노인회장  이용만 씨

   
▲ 이용만 노인회장
“경치 좋고, 인심 좋은 우리마을 놀러오세요” 난 대성리 노인회장 이용만입니다. 올게 일흔 셋이랍니다. 하우스 포도 2천5백평과 노지포도 500평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저는 66년부터 77년까지 마을 이장을 봤고, 98년부터 지금까지 노인회장을 도맡아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 자랑을 하겠습니다. ‘녹두밭 웃머리’, ‘하늘 위의 땅’이란 것이 우리마을 별명이었습니다. 그만큼 땅이 척박하고 가물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마을 위 소류지 가지고는 부족했습니다. 57년 만들어진 개심저수지가 있지만, 그것은 장화리 지대가 높아 그야말로 ‘그림의 떡’입니다.

그런 우리마을이 99년도 농업기반공사에서 주관한 문화마을에 선정되어 몇 십억이 마을에 지원되면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논을 뒤엎고 33세대(세대당 100평 정도, 당시 가격 평당 15만원 정도)가 살 수 있는 4천여 평의 택지를 개발했습니다. 마을 안길 포장을 했습니다.

농산물 집하장과 마을회관, 놀이터도 졌습니다. 하지만, 33세대가 분양은 모두 받았지만, 실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10가구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답니다. 우리 마을은 현재 40가구 100여명 정도가 삽니다. 맛좋은 포도와 복숭아를 재배하는 장화리 작목반(35명)도 출하량이 이원에서 두 번째로 많을 만큼 튼실합니다. 마을 청년회(17명)도 마을을 위해 활발히 움직입니다.

우리 마을을 상징하는 것은 문안산 쌀개바위입니다, 쌀개바위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쌀개바위 모양이 디딜방아를 연상한다고 해서 지은 것이고, 하나는 은하수가 쌀개바위까지 다다르면 풍년이 든다고 해서 지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진주강씨 세거지로 마을의 역사는 350년 정도가 됩니다. 지금 진주 강씨는 10가구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마을 정말 살기 좋습니다. 경치도 이만하면 끝내주고, 마을 인심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 마을로 오시겄습니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유인만 2005-09-02 13:32:10
장화리 를 통하여 이원면과 장화리를 홍보할수 있는기회가 되었고 인심좋은 마을로
소문이나서 많은 외지인이 찿아올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또한 이사오신 두분께 늣으나마 축하 드림니다 그러고 보닌까 생각이 나내요 지난번 장마때 하수관이 막혀서
제가 가서 군청 직원과 같이커피한잔 주신적이 있지요 감사했읍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이장님 노인회장님 수고 많이 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