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74] 이원면 평계리(3) 계촌 - 살구정이
신마을탐방 [174] 이원면 평계리(3) 계촌 - 살구정이
고개 넘는 사람들 쉼터로 북적이던 곳 '살구정이'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5.08.19 00:00
  • 호수 7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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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태구씨가 옛 율원현 자리 포도밭 그물에 걸린 콩새를 놓아주려하고 있다.

영동 양산으로 가는 서낭당 고개를 오가려면 ‘살구정이’를 꼭 들려야 했다. 마을은 고개를 넘어가는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어 크게 번성하는 듯 했으나, 새 길의 위치는 마을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 옛날 원님이 있던 조선시대에는 살구정이 윗 산 중턱에 길이 있었다.

그 때만해도 ‘살구정이’는 임지 지정을 받아 오가는 원님들과 장터를 다녔던 장꾼들이 머물 수 있었던 주막들이 즐비했었다. 살구정이 본토박이 이대식(71)씨는 살구정이 입구 포도밭에서 오래된 기와를 찾아내며, 이것이 바로 그 흔적이라고 말한다.

“여기 포도밭에 이런 옛날 기와가 많아요. 내가 추측컨대 여기에 말을 보관할 수 있는 큰 규모의 마방, 즉 주막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요즘으로 풀어 설명하자면, 국가의 관리가 공무로 지방 출장을 다닐 때 먹을 것과 잘 데를 해결했던 공공성을 띤 숙박기관이었을 터이다. 이름하여 원(院)이라는 것인데, 결국 이대식씨가 가르쳐준 건물터는 예부터 살구정이 마을에 있었던 율현원(栗峴院) 터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씨의 포도밭에서 발견된 기와와 더불어 원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했을 80cm에서 60cm 크기의 돌 두 개가 발견되었음에 비추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호서승람 등의 옛 기록에 나오는 율현원이 이 곳이라는 것이 현지를 답사한 향토사가 전순표씨의 말이다.

그러니 살구정이는 그 옛날부터 무주와 금산군 제원 등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살구정이는 일제침략기에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마을 안으로 새로 만들어지면서 더 크게 번성한다. 마을 가운데로 고갯길이 생기면서 오가는 사람들은 더욱 북적였다. 살구정이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6.25 전쟁 때, UN군은 대성초에 본진을 잡고 살구정이가 위치한 서낭당 고개를 사수하려고 대포를 무던히도 쏘았고, 겁에 질린 북한군은 살구정이를 피해 옆 산길로 우회해 갔다고 한다.

“그 당시 로켓포를 얼마나 쏴 댔나, 밭떼기 한 가운데에서 큰 무수구덩이 같은 것이 많이 있었다니까요. 친구들하고 마을 근처에서 수류탄 알맹이 같은 것을 발견해서 그 위에 큰 돌멩이를 던졌더니 돌이 쩍 갈라지면서 천둥소리가 났어요. 그랬더니 가까이 오던 인민군이 총이고 뭐고 다 버리고 내뺐던 적도 있었지요.”

이대식씨가 살구정이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기억에서 끄집어 낸다. 아마 그 당시, 다시 새 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살구정이는 사람들의 손이 참 많이 탄 곳이었고, 그렇게 사연도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살구정이 위쪽으로 새 길이 만들어지면서 살구정이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갑자기 번화가에서 오지 중의 오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제 세 가구만 남아
좁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멀리 연결돼 있다. 가다가 중간에 나오는 차라도 마주치면 영락없이 차를 뒤로 빼는 수 밖에 없다. 마을 들어가는 진입로도 바쁘게 지나갔다가는 찾을 리 만무하다. 이제 ‘스위트파크’라는 모텔이 마을의 이정표가 됐다. 그 모텔 가기 전 바로 조그맣게 난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한 참을 지나다 보면 복숭아 밭이 보이고, 계곡 물소리가 들리고, 포도밭이 보이고, 큰 호두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거기가 마로 ‘살구정이’다.

지금 남은 집은 달랑 세 가구, 강태구(50)씨의 표현대로라면 절간같이 조용한 곳이다. 이대식(71)씨 부부, 이관용(75)씨 부부, 강태구(50)씨 부부 등 세 부부 6명이 마을 구성원의 전부이다. 전쟁 때 피난 와서 정착한 황해도 출신 실향민 이화윤(74)씨는 얼마 전 집을 팔고 옥천으로 나갔다. 그래서 세 가구 뿐이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강태구씨, ‘다 떠나려 하는데, 젊은 나이에 고향을 지켜왔다’고 말을 걸으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흙에 한 번 맛들이면 쉽게 떠날 수 있나요.”

그는 전형적인 농부였다. 평계리 공창식 이장도, 공촌의 젊은 30대 공문표씨도 그렇게 고향을 찾았다. 못나서 못 나갔다고, 집값, 땅값 제대로 못 받는데, 어떻게 나갈 수 있냐고 자조섞인 목소리로 헛헛하게 또 다른 이유를 말했지만, 그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선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집과 전답들, 그것을 그냥 묵혀두거나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음이었다. 비록 그게 물줄기가 없어 하늘만 바라보고, 천둥만 치기를 바라는 ‘천수답’일지라도 그것은 대대손손 이어온 조상의 숨결이 배어 있는 농토였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멧돼지 가족들과 노루가 와서 밭을 뭉개고 뷔페처럼 마구 골라먹는 그런 밭일지라도 그에겐 더없이 소중한 재산이었던 것이다.

복숭아농사 1천여 평, 노지포도 700여 평, 그렇게 큰 농사는 아니지만, 자부심을 갖고 지어왔던 것이다. 그는 그날도 포도밭에 있었다. 마침 포도밭 주변에 쳐놓은 그물에 콩새가 제대로 걸렸다. 탐스런 포도를 탐내던 콩새는 그물에 걸려 어쩔 줄을 모른다. 강태구씨는 콩새를 그물에서 꺼내더니 다짐을 받는다.

“이놈아! 여기 다시는 오면 안 돼! 다른 곳에서 먹이를 구하거라.”

그러면서 콩새를 멀리 날려보낸다. 얼굴에 잔뜩 주름이 잡힌 이대식씨가 얼마 전 설치를 하고나서 해지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며 한 위성방송업체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다.

“보지도 않은 것 연결해놓고, 이놈들이 돈은 돈대로 다 받아갔지 뭐야. 칼만 안 들었지 도적놈들이여. 아! 진작 오지 그랬어. 시골 오지라고 안 오는 거여. 기자양반, 그래도 이런 곳은 가끔씩 들려주는 것이여.”

◆계곡물 오염, 야생동물 큰 피해
“큰 길이 생기고 나서 그 주변에 식당이니 가든이니 하는 것들이 많이 늘어나서 한동안 골치 꽤나 아팠어요. 오폐수와 쓰레기 등의 문제도 많았고요. 지금은 많이 개선된 편이지만, 아직도 고개를 오가는 외지 사람들이 계곡 아래로 쓰레기를 불법투기해서 골치가 아파요.”

길을 빼앗긴 살구정이는 톡톡히 설움을 받아야 했다. 신작로 한가운데 마을에서 도로 밑 오지마을로 전락한 살구정이는 이제 많은 나그네들의 정과 추억을 품어주는 주막이 아니라, 몰래 도로 위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의 비양심적인 행위를 확인하는 장소로 변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평범히 살기가 녹록치 않았다. 천수답에 짐승들이 내려와 헤짚는 박토에서 뿌리박아 살아가는 것이 몇 십년, 그래도 고향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대 7가구까지 살았던 살구정이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제 세 집뿐이다. 하지만, 빈집은 땅 투기꾼들이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오지 중의 오지라는 ‘살구정이’도 말이다.

“말도 못해요. 얼마 전 양산하고 무주를 다녀왔는데, 거기는 한 개도 있을까 말까한 복덕방이 5군데나 생겼데요. 땅투기 브로커들이 무작정 땅을 사들이는 거예요. 살구정이도 대전사람들이 빈집을 몇 채 사놓고 아직 들어오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놓아두고 있어요. 싸게 샀다가 시골에 들어 올 사람한테 비싸게 팔려고 하는 수작이지.”

조그만 동네 살구정이에도 주민들의 많은 애환이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계곡 물소리가 정겹고, 산새소리 우는 모습이 반가운 마을, 흙집에 야트막한 돌담길이 아직 남아있는 그 마을에서 그래도 이 땅에 뿌리박고 살면서 마을의 맥을 잇고 있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네들은 명절 때마다, 절기마다 그네 뛰고, 씨름하고, 노래 부르던 그 시절을 한 없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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