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안남면 종미리 미산 도태골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안남면 종미리 미산 도태골여울
도태골여울 건너면 '농바우'가 옥천 길 안내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5.08.05 00:00
  • 호수 7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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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울 주변의 잔잔한 물흐름이 느껴진다. 멀리 독락정 앞 양수장이 보이고, 휘도는 강물이 만들어낸 굽이치는 물길도 보인다. 행락철인 요즘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강변과 물속을 누빈다.

금강은 흘러 이제 안남입니다. 지난달 갔었던  옆쪽골여울 하류로 안남면 종미리에 이르기까지 네 개의 여울이 있습니다. 이중 강의 한가운데에 작은 모래섬이 있는 곳의 집게여울을 제외하고는 안남면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습니다. 집게여울은 물론 가덕리 아랫청동 사람들이 농경지를 통행하기 위해 주로 건너 다녔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여울지기인 향토사가 정수병씨와 함께 동이면에서 금강을 따라 터덜터덜 비포장길 합금리를 지나 안남면에 다다랐습니다. 지수리 수동마을에서 강변을 따라 새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종미리 미산마을에 도착합니다. 날이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아서인지 후텁지근합니다. 마을 앞 정자나무 그늘에 나와 있는 몇몇 마을 어른들을 보고 여울을 묻습니다. -편집자

  1. 집게여울부터 병뱅이여울까지
집게여울은 가덕리 아랫청동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주로 건너다녔다. 안남면에 이르는 가까운 길이기도 했다. 여울 근처에는 겨울에 맨 발로 여울을 건너야 했던 살을 에는 아픔을 헤아린 어른들이 아이들 건너라고 만들어준 나무 다리가 세워지곤 했다. 여름철 큰 물이 지면 한꺼번에 떠내려 가긴 하지만 이 일은 매년 되풀이됐다.

동이면 가덕리 아랫청동에 살고 있는 정찬주씨가 그 나무다리를 이용해 물에 빠지지 않고도 안남초등학교를 다녔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집게여울을 지나면 으능댕이여울이 강을 가로지른다. 종미리 쪽에 아주 큰 은행나무가 있다고 해서 으능댕이라고 한 이 여울은 으능골이라고 불렀던 골짜기의 입구에 있다. 종미리 미산 마을 사람들이 주로 농사일을 위해 다녔던 여울이다. 

미산 마을 박만영(80)씨에 의하면 은행나무를 잘랐는데 그 그루터기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식을 먹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은행나무, 으능댕이여울이란 이름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으능댕이여울 아래로는 병뱅이여울이 기다리고 있다.

병뱅이여울은 미산 사람들이 나무를 해다 나르거나, 소꼴을 주로 뜯기러 갔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여울로 갈마골을 왕래하기도 했다.  또 하나 병뱅이여울을 건너면 광산이 있었다. 은을 캤던 곳이란다. 전재식씨의 기억이 또렷하다. 광산이 꽤 깊었단다. 굴 속에 들어가면 추워서 잘 돌아다니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광산은 밑으로 떨어졌다. 돌을 던져넣으면 한참을 기다려서야 ‘풍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강물이 깊어진 지금은 배로 건너지 않고는 강 건너에서나 볼 수 있는 굴이 되었다. 광산으로 쓰였던 굴은 마을 쪽 도로에서도 뻔히 보였다.

  2. 도태골이 있어서 도태골 여울
종미리 미산은 용궁전씨의 세거지이다.  아담하게 형성돼 있는 마을. 금강변을 거슬러 논밭으로 가기 전까지는 들에서 일하는 모습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다. 마을 사람들이 해먹을 농사꺼리가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도 대청댐 건설로 인해 조성된 대청호가 생긴 후 수몰지로 편입되는 바람에 미산 마을 앞 도로 밑의 논 역시 수몰선 아래에 위치해 있다.  정자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어른들이 낯선 사람들의 출현에 눈을 크게 뜬다.

“워디서 왔댜? 머할라구?”
정수병씨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어른들. “그렇지. 예전 어른들이 없으니 역사 남는게 없어. 우리도 이제 세상을 뜨면 끝이라고. 역사는 반드시 만들어놓아야 한다니까!” 박만영씨는 하물며 미산에 대청호 물이 들어오는 것까지도 기록에 남겨 후손들이 마을의 역사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늘은 도태골여울을 간다. 정재영(72)씨와 전재식(82)씨가 여울에 가서 현장설명을 해주겠다며 나섰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변. 강자갈로 가득하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네모난 돌이 멀리서도 분명히 표시가 난다. 그래서 이름붙은 게 ‘농바우’란다. 작은농바우와 큰농바우가 있다. 작은농바우는 이미 물 속에 잠겨 있다. 농바우 주변으로는 물고기가 많았다. 팔뚝만한 물고기가 잡혔던 곳도 이 곳이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작은농바우가 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잖아요?”
수몰이 되기 전에는 작은농바우의 모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바우에서 상류로 50m쯤 가야 여울이 있다. 도태골여울은 미산 마을 쪽 골짜기 이름이 도태골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이 여울로는 마을 사람들이 옥천 장에 나가기도 했고, 옥천에 볼 일을 보러 가기도 했다. 여울을 건너면 막바로 막아서는 벼랑. 그러나 걱정은 말라. 벼랑은 벼랑이로되 지금도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이 확연하다.

3. 여울은 애·경사를 모두 싣고
등성이를 넘어서면 두 길이 나왔다. 왼쪽 길은 갈마골로 해서 탑산이, 성재를 거쳐 동이면 지양리 가문골을 통해 옥천으로 가는 길로 통한다. 오른쪽을 선택하면 구시봉을 넘어 석탄리 안터를 통해 옥천읍을 가는 길이었다. 여울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걷는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질러가는 길에 놓이게 된다. 

“미산 사람들은 옥천 장이 너무 멀어서 여간해서는 장보러 여울을 건너는 일은 많지 않았어요. 배바우로 해서 피실에서 나룻배를 타고 가거나 독락정 앞 여울을 건너 옥천장으로 가려면 너무 멀다 보니까 질러 가자는 거지.” 

정재영씨는 미산 사람들이 소장을 보러 가려면 안내장을, 생필품을 사러가기 위해서는 보은 원남장을 보았다는 사실을 들춘다. 그만큼 옥천장은 미산 사람들의 관심에서 한다리 건너였다. 

“이 밑에 징너머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옛날에 아마도 일정 때라고 하지 아마. 갈마골에서 무당이 굿을 하러 오려고 강을 건너다가 얼음구멍에 빠져 죽었다나봐. 그 후로는 장마가 시작되려거나 날이 궂으려면 징소리가 난다고 하지.” 

전재식씨는 비록 귀가 잘 들리지 않았으나 분명한 말투로 옛 기억들을 다시금 더듬었다. 이들에게 분명한 기억이 또 하나 있다. 미산 강변에서도 많은 금을 캤다는 사실. 자갈이 있는 강변은 물론 제방까지도 홀딱 뒤집었다. 밤낮없이 기름불을 켜놓고 작업을 했다.

기름값이 비쌌지만 금을 캐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남달랐다. 말하자면 합금리 강변에서 미산 강변에 이르기까지 강변에서는 금캐는 작업이 항상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미산의 문화유적 - 경율당, 선돌

경율당은 영조 12년(1736년)에 용궁전씨 시조인 전섭의 47대손 전후회 선생이 세운 서당이다. 전후회 선생의 호를 따서 경율당으로 짓고 학문 연수는 물론 문중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애쓰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여름이면 경율당은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되었다.

노인들과 아이들은 계층이 있어 시원한 곳엔 노인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정재영씨가 전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수살맥이라고 불린 미산 선돌은 경율당 앞 현재의 도로 아래 밭둑에 위치해 있다. 여성형 선돌로, 20∼30년 전까지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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