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70] 이원면 구룡리
신마을탐방 [170] 이원면 구룡리
우리 마을은 우암 선생이 태어난 곳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5.07.01 00:00
  • 호수 7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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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리 마을 앞에 들어서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주민들이 쉴 수 있는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매년 물난리를 겪어온 터라, ‘올해는 무사히 넘기려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6월27일 찾아간 이원면 구룡리에도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뻥 뚫린 하늘이 걱정이 되었을까? 주민들이 하나, 둘씩 밭으로 나와 파랗게 익어가고 있는 농작물들을 걱정스레 바라본다.

◆아홉 마리의 용 중 한 마리
4호 국도 옆으로 ‘구룡리’라는 마을 이정표가 반긴다. 마을 앞에 들어서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아담한 정자가 쏟아지는 빗방울을 잠시 피하게 해준다. 마을 앞까지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쏟아지는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포도송이가 파란 빛을 더욱 선명하게 뿜어낸다. 구룡리. 말 그대로 아홉 마리의 용을 말한다. 금강에서 물을 만나 아홉 마리의 용이 놀다 월이산 정기를 받아 한 마리의 용이 나니, 그가 바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라고 했다.

◆마을의 자부심 우암 송시열
“우리마을에서 태어난 큰 인물이시지. 1년 이면 관광차로, 역사학자들이 많이 찾아와. 우리도 그 큰 어른을 본받아서 어질고, 인심 좋고, 어른 공경 잘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우암 송시열은 구룡리 마을의 자부심이다. 그만큼 마을 곳곳에 우암 선생에 얽힌 유적들은 물론 얘깃거리까지도 그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우암 송시열 유허비는 그의 흔적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유적이다.

이밖에 금강변에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닦은 서당 ‘용문영당’이 자리잡고 있고 선생의 아버지인 송갑조 선생의 유기비도 이 마을에 있다. 또한 선생의 어릴 적 유모였던 헌비가 세상을 떠나자 몸종의 묘비를 세운 흔치않은 흔적인 `헌비의 묘와 비석'이 이원면 원동리에 있다.

마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에 대한 전설과 얘깃거리도 풍부하다. 우암의 어머니 곽씨께서 우암을 잉태할 때 꾼 태몽은 바로 구룡리 앞 월이산이 입안으로 몽땅 들어가 꿀꺽 삼켜버리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범상치 않은 태몽에 우암 선생이 태어난 날은 월이산이 웅장한 소리를 내고, 초목의 잎이 마르며 금강물의 색깔이 홍색을 띄었다고 전해진다.

우암 선생이 행한 스승을 위한 마음도 주민들에게는 크게 본받을 점이라고 했다. 동지날 팥죽을 싸들고 회덕에서부터 연산까지 달려갔는데,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 팥죽이 따뜻하여 스승이 말하길 “네가 스승을 존경하는 태도가 남다르니 어찌 팥죽이 식겠느냐”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조헌 선생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충신 곽자방 선생의 유허비가 있어 이 마을의 나라에 대한 충성도를 가늠케 해준다.

◆어려워지는 농촌마을
마을 입구의 커다란 느티나무는 예로부터 마을주민들의 놀이터였다.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농구 골대가 세워져 있지만 예전에는 배구네트가 세워져 주민들은 이곳에서 편을 갈라 배구경기를 즐겼다.

세월이 지나면서 배구네트는 농구골대로 바뀌었지만 이제는 키 높이 만큼 자란 수풀로 우거져 있다.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는 농촌의 모습을 구룡리도 벗어나지는 못했다.

43가구가 벼농사를 비롯해 노지포도 32가구, 포도하우스 7가구, 복숭아 32가구 등 주로 과수를 주작으로 하고 있는 구룡리 마을도 다른 마을과 크게 형편이 다르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박창보(60)씨는 경운기 부품 몇 개 갈았는데 10만원이나 달란다며 긴 한숨을 내쉰다.

“이제 한 가지 농사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나도 벼농사를 비롯해 복숭아, 포도를 같이 하고 있는데 너무 힘이 드네.”

박창보씨가 농사를 짓는 땅은 모두 8천평이라고 했다. 그중 자신의 땅이 3천평. 5천평의 땅을 소작하고 있다.

“이제 농촌에서 땅 얻기는 쉬운데 넘기기가 어려워. 한 해만 더 부쳐달라고 해서 이어온 것이 벌써 10년이네. 지금 부치고 있는 땅, 다 내놓으면 오히려 속 편할 텐데···.”

80세를 넘긴 노인들도 몇천 평씩 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이 농촌마을 구룡리의 현실이다.

◆인심 좋은 마을
농촌이 좋아 시골로 내려오는 도시민들이 늘고 있다. 구룡리에도 시골이 좋아 농촌으로 들어오 도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마을이 남서쪽을 향하고 있고, 산이 감싸주고 있어서인지 바람도 없고 기후도 따뜻해. 따뜻한 기후 때문인지 인심도 따뜻해. 이런 인심을 서울서 내려온 주민들이 소문을 내서인지 서울에서 우리마을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

인심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구룡리에 술파는 가게가 없어진지 벌써 20년째다. 술에 취해 흩어진 모습의 주민과 시골 경로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화투도 구룡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김기호(56) 이장의 얘기다.

◆변화하는 구룡리
예부터 선산곽씨 문중의 집성촌이었던 살기좋고 인심좋은 구룡리 마을 주민들에게도 숙원은 있다. 좁은 농로 때문에 매년 농사짓는데 큰 불편을 겪고 있고, 하수도 또한 정비가 안돼 조만간 큰 공사를 치러야 한다.

또 변변한 주방 하나 없는 좁고 오래된 것이 아닌, 예쁘고 튼튼한 마을회관 건립도 주민들의 숙원이다. 하지만 구룡리 마을의 모습은 매년 변화하고 있다. 국도 4호선에서부터 마을까지의 좁은 도로는 곧 2차선으로 확포장되고 길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마을 입구의 공동과일집하장은 더 넓은 공간으로 이전하게 된다.

김수환 노인회장 '구룡리는 제3의 고향'

   
▲ 김수환 노인회장
김수환(78) 노인회장이 말하는 구룡리는 제3의 고향이다. 영동군 심천면 각계2리에서 태어나 6.25를 피해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로 피난을 갔다. 전쟁을 피해 무주군에서 20여년을 살아가던 김 회장이 가족과 함께 구룡리를 찾은 것은 38년 전이다.

“농사꾼은 땅이 있어야돼. 무주 산골짜기에 살다가 구룡리로 온 것도 다 농토를 찾아서지. 그런게 벌쩌 38년이나 됐네.”

구룡리의 따뜻한 인심은 영동군에서 태어나 20여년을 무주군에서 생활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외지에서 왔다고 푸대접받았다는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오히려 큰 도움을 받았지. 농사를 지어보면 알아. 대근한 농사일 하면서 마을사람 도움 안 받은 적이 없지. 무슨일을 해도 다 내일처럼 달려들어 해주는데.”

농토를 찾아,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 산골짜기를 떠나 구룡리를 찾은 김수한 노인회장. 김 회장에 있어 38년을 함께 한 제3의 고향 구룡리는 이제 그의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 되어 버렸다.


[문화재] 조선중기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

▲ 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우암 송시열 선생 유허비.
1607년 선조 40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에서 태어난 우암 송시열 선생은 1635년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기도 한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다. 본관은 은진이며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시호는 문정으로 이원면 구룡리는 그의 외가(곽씨문중)이다.

송갑조의 아들로 태어난 우암 송시열 선생은 8세때 아버지의 이종인 송이창에게 글을 배웠고, 19세 때 이덕사의 딸과 결혼하였다. 22세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비통함은 지극하여 3년을 하루같이 여막을 지켰으며, 24세 때 상복을 벗은 후 연산에 은거하는 김장생에게 정식으로 학문을 닦고 침식을 함께 했다.

그 이듬해에 노스승이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신독재 김집에게 수학했으며 이때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등과 신독재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다. 우암 송시열은 인조 21년(1643년) 9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후일 효종이된 봉림대군의 스승이 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이내 벼슬을 내놓고 향리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셨으며, 난리를 겪은 후 청나라에 항복한 수치를 크게 분통하게 여겨 황간 땅에 숨어 학문을 닦았다.

이렇게 비분강개한 중에서도 학문을 닦는데 게을리하지 않던 송시열을 조정에서는 지평, 장령 등 요직을 봉해 불렀으나 때가 아님을 알고 사양했으며, 1649년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우암은 효종에게 군덕을 함양하고 기강확립을 서둘러 국력을 기른 뒤에 대사를 도모하라는 충직한 조언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현종 9년, 그의 나이 62세에 좌의정에 오른 우암은 이후 덕원, 장기, 거제도로 유배생활을 거쳐 숙종 6년(1680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조정 원로로 왕의 자문에 응하게 된다.

왕의 세자책봉을 시기상조라 상소하였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던 우암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전라도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83세의 일기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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