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69] 군서면 사정리(3) 사기점
신마을탐방 [169] 군서면 사정리(3) 사기점
사정리의 뿌리 '사기점'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6.24 00:00
  • 호수 7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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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순 할머니가 마을입구 솟대를 가리키고 있다. 김 할머니 지팡이 뒤로 장승과 돌탑이 보인다.

사정리 살구정이를 시작으로 마전동을 거쳐 마지막 마을 사기점이다. 1914년 이후 단일 행정단위로 통합된 사정리의 지명은 원래 사기점 마을의 사(沙)와 살구정이의 정(亭)을 더해 만들어진 것으로 구억말, 새말, 아랫무탱이, 윗무탱이(아래, 위 무탱이를 더해 사기점이라고 한다)등으로 구성된 사기골 이야말로 사정리의 가장 큰 뿌리인 셈이다.

사기골은 마을입구(구억말)에서 회관 쪽으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사기점을 거쳐 새말과 구억말로 돌아 나오게 된다. 약간씩 거리를 두고 사기점(24가구)과 새말(6가구) 그리고 구억말(27가구)에 집들이 모여 있지만 이 곳에 사는 사람들 100여명은 자신들을 예외 없이 ‘사기점 사람’이라고 부른다. 벼농사와 포도농사 그리고 들깻잎과 버섯농사를 골고루 짓고 있는 사기점 사람들을 만나보자.

◆솟대, 장승백이, 무너진 돌탑
아직 6월이 절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뙤약볕이 여간 아니다. 사기점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그늘을 찾아보려는데 저만치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시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오전에 벌써 외출을 마치고 들어오시나 보다.

“어디 다녀오세요?”

이 마을 김복순(80)할머니다. 열일곱에 사기점으로 시집와 8남매를 키우신 할머니는 요즘 편치 못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옥천에 있는 병원을 다니신다고 했다.

“젊어서 안한 노력 없이 다 하고 살았는데 이제 늙어서 병든 몸만 남았네.”

할머니와 천천히 걸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이제 다 장성한 8남매를 볼 때 면 더 없이 든든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지금은 농사를 짓는 다섯째 아들 강구성(47)씨와 살고 계신다. 할머니와 벗한 길이 멋진 느릅나무 아래서 멈췄다. 느릅나무 그늘 한 편에 높이 솟은 솟대와 아담한 장승 한 쌍, 그리고 반쯤 무너진 돌탑이 자리하고 있다.

“동네사람인데 자기 땅이라고 돌탑 밑구녕을 파더니 저렇게 무너졌어. 무슨 짓인지….”

끌끌 혀를 차던 할머니는 아들이 짓고 있는 버섯하우스를 구경시켜 주시고는 쉬어야겠다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느릅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다리를 쉰다. 풀벌레 소리와 간간히 마을 입구 공장에서 들려오는 기계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전 11시니 마을 사람들이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니다.

◆무시무시했던 오솔길과 풍장
솟대와 장승의 나이가 그렇게 오래 돼 보이진 않는다. 상투를 인 장승과 족두리를 튼 장승의 표정이 재밌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현재의 장승과 솟대는 원래 있던 솟대, 장승이 더 이상 서있지 못할 만큼 훼손돼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그 모양을 본 따 그대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절반쯤 무너진 돌탑도 조만간 다른 위치를 찾아 다시 복원할 것이라는 것도 함께 들었다. 여기저기 빈 집을 기웃거리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홍희열(70)씨다. 사기점 동계(마을 계)의 장을 맡고 있다. 옥천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다. 홍씨에게 사기점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굽는 곳이 마을에 있었다는데 지금 정확히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사기점 어디서도 사기조각이 흔하게 발견되고 불에 탄 흙도 쉽게 발견되니 우리 마을에 큰 사기 터가 있었다고 알 따름이죠.”

마을입구 자랑비에는 사기점에 고려 때부터 청자와 백자를 굽던 곳이기 때문에 사기점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을에 남아 있는 것은 지금도 흙 속에서 숨쉬고 있는 사기조각 뿐이다.

“지금은 사기점에서 살던 사람들이 많이 내려가서 살고 있지만 옛날엔 지금 마을 입구부터 한참을 여기까지 걸어 올라와야 집이 나왔어요. 나무가 울창한 오솔길을 따라 마을까지 올라오는 길 중간에 상여 터가 있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래서 아이들 혼자는 못 오고 어른들이 바래다주곤 했어요.”

오솔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사기점의 사라진 장례풍습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기점은 전통적으로 시신을 일정시간이 지나면 땅에 묻는 방식이 아니라 공기 중에서 시신이 부패하기를 기다려 뼈를 수습하는 풍장(風葬)의 장례문화를 가졌다는 것.

“오솔길 중간 쯤 팽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행인이 보이지 않도록 시신을 메달아 뒀습니다. 근처에 행상도 있었고요, 어릴 땐 그곳이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강구성(47)씨도 그 팽나무를 기억했다. 김현 이장은 팽나무와 함께 오금을 저리게 하던 개호지(범 또는 표범의 새끼)의 기억도 떠올린다.

“이 길이 옛날엔 얼마나 울창했는지 한 낮에도 볕이 안 들었어요. 거기다 지금 마을 입구 언저리에서 개호지 한 마리가 사람이 지나가면 해코지 한다고 흙을 막 발로 차서 뿌리곤 했거든요.”
 
◆“피해는 안 줬으면…”
조정배(49)씨 집 마당에 사람들이 슬슬 모인다. 김현 이장, 강구성씨, 김춘식(54)씨, 홍광덕(49)씨, 홍광수(47)씨, 박희양(49) 사정리 새마을지도자까지…. 농사이야기부터 공장이야기까지 한 자리에서 술술 돌아간다.

“궉말(구억말)은 원래 소나무 밭이었어요. 사람은 두 집인가 세 집 살았는데 사기점에서 사람들이 마을 입구로 옮겨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커졌어요. 지금은 사기점보다 궉말에 집이 더 많죠.(홍광수)”

“마을하천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78년도던가 큰 물난리가 나면서 지금의 방향으로 물길이 났죠. 그 당시 집도 둥둥 떠내려 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강구성)”

“그때 젊은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오리 잡아먹었다가 어른들한테 얼마나 혼이 났던지….”

누군가의 얘기에 모인 이들이 한바탕 웃었다. 마을 근처로 들어온다는 레미콘 공장 때문에 곤두섰던 신경이 잠깐이나마 옛 추억에 느슨하게 풀어진다.

“홍수가 크게 난 뒤로 78년 가을인가 마을에 돌 공장이 들어왔어요. 지금의 플라스틱 공장 자리 근처인데 사람들은 뭐하는 공장인지도 모르고 살았죠. 거기서 일했던 주민들은 폐병으로 다 죽었어요. 그 공장 터에 지금의 플라스틱 공장과 포장공장이 몇 년 전 들어왔고 또 최근엔 마을 한 가운데 한국제설이라는 화학공장이 들어와서 주민과 싸웠어요. 그 공장은 지금 부도가 나 없어졌고요.”

김 이장이 마을과 공장에 얽힌 인연을 풀어 놓는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바람을 정리한다.

“공장이 마을에 들어와서 마을사람들이 직장이 생기고 뭐 하나라도 도움이 되고 이런 것 전혀 기대도 안합니다. 우리는 단지 피해는 주지 말라는 말을 하는거에요. 공장 짓고 자기사업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박수는 못 쳐줄망정  딴지를 걸 나쁜 사람은 사정리에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자기 돈 벌겠다고 공무원 등에 업고 돈 없고 힘없는 주민들 피해주는 사람들은 우리 힘으로라도 막아야죠. 내 고향을 내가 버릴 수는 없잖아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사기점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고려부터 도요지와 함께 마을이 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금도 청년들이 깎은 장승백이, 솟대와 함께 섣달그믐 밤 산신제와 정월 열나흘 장승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고철줍기, 도랑치고 가재잡기''
새마을지도자 박희양씨

▲ 새마을지도자 박희양씨

사기점 사는 사정리 새마을지도자 박희양(49)씨가 나타났다. 트랙터를 몰고 나타난 박씨. 그런데 트랙터가 조금 이상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트랙터 앞부분에 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다. 더 가까이서 보니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달려 있던 소음기 같아 보인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왔어요. 길에 버려져 있으면 아무런 쓸 데 없는 쓰레기일 뿐이죠. 그런데 이 쓰레기가 쇳덩이 아닙니까? 팔아서 필요한 곳에 쓰면 재활용이 되는 것이죠.”

맞다. 도랑치고 가재잡기. 박희양씨의 `도랑치고 가재잡기' 고철 줍기는 지난해 9월8일 본보를 통해 보도한 바 있는 내용이다. 박씨는 지난해에 모은 돈과 올해 모은 돈을 모두 새마을지도자협의회에 전달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줍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던 그에겐 이제 일상이 된 일이다.

“별거 아니예요. 그냥 줍는 것 뿐인데 자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네요. 별일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그의 트랙터 앞에 달랑달랑 걸려있는 버려진 소음기가 보는 이에게 흐뭇한 웃음을 불러 일으킨다.

``농촌이 좋고 사정리가 좋아요''
사정리에 정착한 조영배씨

▲ 조영배씨

조정배씨의 고향은 강원도 홍천이다. 시골로 따지면 옥천보다 더한 산골. 대전에서 섀시사업을 하는 조씨가 그의 고향 강원도 홍천과 비슷한 곳을 찾아 정착한 곳이 바로 옥천이고 그 가운데서도 사정리 사기점이다.

94년 제2의 고향으로 사기점을 선택한지도 벌써 만 10년이 지났다. 10년 동안 사기점은 그의 눈앞에서 어떻게 변모해 왔을까?

“사실 내 집 바로 앞에 화학공장이 들어오고 다시 부도가 났지만 10년 동안 크게 변한 것은 없었어요. 주민들의 훈훈한 인심도 그렇고 좋은 자연도 그렇고요.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그는 어머니 이금순(68)씨를 모시고 산다. 마을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오면 만날 수 있는 조씨의 집은 사기점과 구억말을 오가는 주민들에게 가끔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그의 눈에 비친 기업과 주민의 문제는 어떠했을까? 사업가이기도 한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

“당장 부도가 난 한국제설의 경우도 그랬지만 아무리 좋은 공장이라도 적절한 위치에 들어서지 않으면 사업자나 주민 모두 불행해 집니다. 누군가 책임을 지고 이 문제를 조정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문제는 계속되겠지요.”

맞다. 내 이웃이 가정집이든, 공장이든 이웃으로부터의 피해를 일방적으로 감수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감수할 사람도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다. 모든 일이 이런 상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사기점에서 만난 조씨의 평범한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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