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68] 군서면 사정리(2) 마전동
신마을탐방 [168] 군서면 사정리(2) 마전동
`꽃봉오리' 명당에 닥친 시련, 사정리 마전동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6.17 00:00
  • 호수 77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마전동 마을 전경. 집 너머로 보이는 산이 작약미발형의 명당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난주 살구정이에 이어 사정리 두 번째 자연마을 마전동을 찾았다. 마전동을 찾은 13일 기자는 취재를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인지를 오랫동안 고민해야 했다. 다름 아니라 사흘 전 마을에 큰 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13가구 27명 남짓한 작은 마을 마전동의 표정은 어두웠고 누구하나 밝은 얼굴을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전동에 드리운 그늘은 이미 오랜 일이고, 앞으로도 적지 않은 기간동안 계속 될 어둠임을 알기에 부담을 무릅쓰고 취재를 진행했다. 사정리 마전동이 그 웃음을 찾을 날을 기원하며...

■‘아장골’을 아시나요?
아장골부터 시작하자. 아장(兒葬)이라는 말 그대로 아장골은 아이들을 묻던 골짜기다. 사정리를 감싸는 홍산 자락이 마전동에서 만든 골짜기를 사람들은 아장골이라고 불렀다. 아이가 태어나도 생존의 가능성이 적던 시절, 질병과 재해가 닥치면 아이들부터 죽던 시절 사정리 사람들은, 마전동 사람들은 차디찬 어린아이의 시신를 안고 마을 뒷산 깊은 골짜기를 찾았다.

슬픔과 원망으로 아이를 부둥켜안은 어른들은 눈물과 흙이 뒤범벅이 된 손으로 땅을 팠고,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그 골짜기를 아장골이라고 불렀다.

“아장골서는 나물도 안 뜯어 먹었어.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아장골에 먹을 것을 찾으러 가는 사람은 없었어요.”

마전동 정명희(67)씨는 아장골에 남아 있는 마을의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레미콘 공장이 들어온다는 곳이 바로 아장골 끝자락이요.”

정씨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흉하게 잘려나간 공장 터가 눈에 들어온다. 아장골 끝자락이 지금의 모습으로 처참히 파괴된 것은 96년 여름이었다.

“목공소인가 뭔가 한다고 군수가 그 산에 공장을 세우겠다는 사람들의 허가를 받아들였어요. 그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엄청났죠. 멀쩡하던 산이 잘려나가고 공장이 들어서는 것 같더니 금방 부도가 나버렸어요.”

아장골 자락이 처음 개발이라는 명분아래 사람의 손에 의해 상처를 받기 시작했을 때 마전동의 젊은 청년들은 군의 결정에 항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마을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꺼져 버렸다.

“나를 비롯해서 마을 청년들 중심으로 공장설립 반대운동을 벌여 나갔어요. 근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주민들이 공장설립을 반대하며 찍은 도장이 군에는 공장입주 동의 도장으로 제출돼 있었거든요.”

김기종(56)씨는 10년 전 아장골에 처음 공장이 들어서던 때를 돌이키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주민대표랍시고 도장을 받아다 공무원들의 입맛대로 공장입주 동의서로 조작한겁니다. 그 사람은 지금 대전으로 떠났어요. 그때 잘못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군의 공장설립계획승인은 지역경제발전을 위한 것도, 주민을 위한 것도 아니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선 공장은 준공직후 부도를 내고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공장 만들고 그것을 빌미로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가는 고의로 부도를 내고 튄 거죠. 허허허...”

■계속되는 아장골의 비극
공장은 뼈대만 남기고 사라졌다.   산림은 처절하게 훼손됐으나 복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개발업자로부터 산림복구비를 받았지만 복구를 했는 지 안했는 지 현재 공장터의 모습은 처참하다. 그리고 아장골은 두 번째 비극을 시작한다.

“이 엄청난 토사를 보세요. 이것들이 비만 오면 마을을 덮쳐옵니다. 공장을 허가할 때부터 애시당초 토사유출 따위는 생각도 안했던 것이죠. 어떠한 배출로도 확보되지 않았어요. 그저 4미터 정도 폭의 농로와 4, 5미터가 좀 넘는 농수로를 콘크리트로 덮어서 공장진입로로 쓰라고 해 준 겁니다. 비만 오면 토사는 무방비로 쓸려내려 왔고 논이 잠기고 밭이 잠기고 도로가 침수가 됐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공무원들은 혼비백산해서는 수로를 덮은 아스팔트를 까내고는 토사를 걷기 시작했어요. 중장비로 하루 온 종일을 파내도 끝이 안나더군요. 지금도 농수로에 가득 찬 토사를 볼 수 있습니다.”

김현 이장과 문제의 공장 터를 찾았다. 벌써 여러 번 찾은 곳이지만 아장골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더욱 을씨년스럽다. 이장 말대로 공장 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토사가 잔뜩 쌓여있었다.

“부도를 내고 첫 업주가 도망가자 그다음엔 유사휘발유를 만드는 사람들이 들어오더니 큰 폭발사고를 내고 도망갔습니다. 그다음엔 지금은 동평리로 옮겨간 석재업자가 들어와서 안 그래도 토사가 많은 땅에서 골재를 가공하다가 떠났어요.”

■이제는 ‘레미콘 공장’이냐?
“당장 아들내외가 곧 마을로 들어와서 살려고 했는데 공장 들어온다는 소리에 주저하고 있어요. 아니 우리 집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도 않은 고지대에 레미콘 공장이 들어오면 어쩌라는 말이에요? 제발 좀 막아주세요.”

마전동 주정예(62)씨다. 물도 없는 마을에 레미콘 공장 들어오면 주민들 보고 나가서 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며 입술을 지긋이 깨문다.

“남자들이 일한다고 바쁘면 여자들이라도 거기 가서 드러누워 있을 껍니다. 절대로 안돼요. 지금까지도 당하고만 살았는데 이젠 마을에서 내쫓으려는 거 아닌가요?”

제발 레미콘 공장만은 막아 달라는 주씨의 신신당부를 뒤로 하고 만난 김창수(67)씨도 답답한 심정은 마찬가지다.

“군수님을 만나러 갔어요. 주민들이 갔는데 본척만척하면서 그 동네 사람들은 어째 공장만 들어오면 반대를 하냐면서 휙 하니 나가시더라구요. 우리 같은 사람은 사람으로 안보시고, 사람취급 안하시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지나가던 동네사람이 툭하니 한 마디 던지고 간다.

“우릴 사람취급 했으면 주민설명회 한 번 없이 레미콘 공장을 세우라는 말이 나와?”

■작약미발의명당으로 이름났던‘마전동’ 

아장골로 이야기를 시작하다보니 마전동이 너무 어둡게 비친 것 같다. 사실 사정리 마전동은 조선 중기 대학자인 토정 이지함 선생이 점찍어 둔 군서제일의 명당이다. 조선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던 토정은 옥천땅에 들어서서는 작약미발형의 명당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자신만이 아는 표식을 해두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당대에 발복한다는 이 명당 터를 찾기 위해 토정이후 수많은 지관들이 홍산을 찾았고 마전을 찾았다. 그런 지관들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신개의 일화다. 신개는 토정 선생의 가장 충실한 하인이었으며 작약미발의 명당을 하는 유일한 생존자였던 것.

그러나 토정 사후에 주인의 시신을 모시고 은행리 근방까지 온 신개는 명당을 바로 코앞에 두고 `삼밭'이라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급사하고 만다. 삼밭이 한자로 마전(麻田)이고 바로 이곳 마전동의 지명이다.

작약미발(芍藥未發)의 형상이라는 명당터도 그 뜻은 ‘함박꽃이 피기직전의 모양’을 의미하며 바로 마을 입구 ‘함박꽃 상회’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함박꽃 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서종하(72) 전 이장이다.

“올해로 40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게 이름도 마전동의 명당 터에서 땄고요. 여기가 명당 터라서 레미콘 공장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질주하는 트럭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고, 지하수도 갈수기 때면 고갈되는 동네예요. 지금도 그런데 어떻게 레미콘 공장을 끼고 살아요.”

기자는 함박꽃 상회 앞에서 서씨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내내 등 뒤로 질주하는 차량의 위협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김현 사정리 이장] 13가구에 교통사고 피해자만 5명


▲ 비대위 김현 공동대표. 뒤로 공장 진입로 겸 농로가 보인다.
김현 이장을 다시 만났다. 9일 사망한 마전동 주민 정학순 고인의 삼우제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그가 자신의 마을 사정리 마전동에 레미콘 공장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안 것은 지난해 12월, 벌써 6개월이 훌쩍 지났다.

농사 밖에 모르던 김씨는 이장이 되고, 레미콘 입주반대 비대위 공동위원장이 됐다. 그러면서 마른 그의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몇 개씩 더해졌다.

“13가구에 교통사고 피해자가 5명입니다. 사정리 전체로 따지면 수도 없고, 사정리 사망자만 따져 봐도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만 8명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이 며칠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공장에서 진입로라고 주장하는 농로 바로 옆에 인삼밭을 가진 어른입니다. 지난 해 난데없이 나타난 업주가 50만원이라는 큰 돈을 제시하자 밭을 팔았다가 마을에 피해를 준 일인 줄 뒤늦게 알고 계약을 파기하셨고 마음고생을 너무나 하신 분입니다. 업체에서 진입로 측량하는 것 지켜보고 답답한 마음에 술 한 잔 걸치시고는 주검이 되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레미콘 공장승인과 관련해서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단호했다.

“아무도 다쳐서는 안됩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면 우리들이 구속되고 업자와 충돌하기 이전에 공장승인의 불합리성이 분명히 알려지고 바로잡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좌절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얼마 전 다녀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객관적인 결과를 바탕으로 합법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할 계획이란다.

“사정리는 어느 마을 할 것 없이 대대손손 그 땅을 지키며 살아온 고장입니다. 조상대대로부터 이어진 삶의 터전이고 주민의 혼이 깃든 곳입니다. 더 이상 무기력하게 이 땅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지는 않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