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67] 군서면 사정리(1) 살구정이
신마을탐방 [167] 군서면 사정리(1) 살구정이
청년으로 이어지는 마을사랑, 살구정이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6.10 00:00
  • 호수 7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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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인(80)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가 앉아 있는 큰 돌이 바로 살구정이의 연자방앗돌이다.

사정리를 만나기로 했다. 군서면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군서를 지키는 마을, 자연마을만 다섯 곳, 살구정이·마전동·구억말·말랠사기점 100여 가구가 지키고 있는 군서의 큰 마을 사정리. 홍산을 뒤로 하고 서화천을 앞으로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터 사정리. 올 봄부터는 마을에 레미콘 공장을 세우겠다는 사업자와 또 그러한 사업자의 계획을 승인해준 옥천군의 결정에 항의하며 공동체 지키기에 나선 마을 사정리다.

현충일, 오랜만의 연휴를 맞아 여유를 담고 출발한 자동차가 월전리를 지나 군서를 관통하는 국도에 올랐다. 대청호로 흘러 들어가는 서화천의 맑은 냇물을 찾아온 때 이른 피서객들이 강변을 따라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병풍 같은 기암절벽을 타고 은은하게 흐르는 서화천의 푸른 물빛이 아름답다. 서화천은 대청호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의 제1지류로 은행리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군북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월전리, 오동리, 하동리, 동평리, 상중리를 지나 은행리에 닿으니 그 맞은편이 사정리다. 그 첫 마을 살구정이에 차를 세웠다.

마을자랑비에서 만난 ‘자부심’
살구정이에서 가장 먼저 눈을 끄는 것은 역시 지난해 세워진 마을자랑비다. 지난해 어버이날을 기념해 약 90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만든 살구정이 자랑비는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덩치를 자랑 한다.

공동체의 자부심을 거대한 암석에 새겨 넣은 이 자랑비가 가능했던 것은 건립에 필요한 자금 중 상당부분(500만원)을 살구정이 청년회(회장 김종진)가 부담한 공이 컸다는 내용을 취재했던 기억이 났다.

“살구정이 청년회는 군서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상조회로 이름 높습니다. 살구정이 서른 가구, 30명의 회원이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자연스레 힘을 모아요. 마을 자랑비 역시 고향사랑의 전 출향인의 정성이 청년회를 통해 그 마음을 보내 준 것이고요.” 살구정이 청년회 이광우 총무는 청년회의 자랑이 바로 ‘단합’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멀리 있는 회원도 마을을 위해서라면 한달음에 마을에 닫는단다.

살구나무가 많고, 정자가 많아 살구정이가 되었다는 이야기, 조선이 낳은 최고의 역학자 토정 이지함이 손에 꼽을 명당이라고 지목했던 ‘작약미발’을 품은 홍산(洪山)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는 이야기, ‘거리제’라는 마을 민속축제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 등 마을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기록돼 있다.

거리제 이야기, 연자방아 이야기
먼저 거리제 이야기.  정월 대보름 행사는 어느 마을이나 있지만 살구정이의 대보름 행사, 거리제는 조금 색다르다.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그렇지만 거리제에 얽힌 오랜 전설이 눈길을 끈다.

“살구정이와 마전동 사이에 너른 뜰이 있는데요, 그 뜰에 오래전엔 큰 규모의 한옥 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도 거리제가 있어서 매년 정월 보름을 앞두고 지금처럼 집집마다 쌀을 걷었겠죠. 근데 살기가 힘들었던지 단 두 집만 빼놓고는 다들 쌀을 내면서 궁시렁 궁시렁 불평을 했답니다. 그런데 거리제를 지내고 큰 불이나 기쁘게 쌀을 낸 두 집만을 남겨두고 홀랑 불에 타버렸답니다. 그래서 요즘도 거리제 준비를 할 때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준비를 하는 전통이 있어요.”

살구정이와 마전동 사이의 논과 밭이 예전에 주거지역이었다는 것은 주민들에겐 사실로 알려져 있다. 땅을 팔 때 마다 검게 탄 기와장이나 한옥에 쓰였을 법 한 물건들이 부지기수로 나오기 때문이다.김현 이장에게 거리제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조금 더 마을 안 쪽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등나무 아래 연자방아 이야기. 나무그늘아래 지친 다리를 쉬게 하고, 시원한 그늘을 편안히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바위 이야기다. 언뜻 보면 너럭바위 같지만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그냥 바위가 아니다.

“이게 연자방아 돌이여. 옛날엔 이 연자방아가 저기 산 아래쪽에 있었는데 마을서 나는 곡식은 다 찧어 먹었지. 황소를 매어놓으면 빙빙 돌아가면서 방아가 돌았어.” 금산을 다녀온 노부부 이근석(74), 김정애(73)씨다. 김정애 할머니는 올해로 40년째 금산에서 인삼을 사다 서울 수색 등지에서 도시소비자들에게 팔고 다니신다. 연자방아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서둘러 할아버지를 따라 길을 재촉하신다.

레미콘 입주 ‘안될 일’ 한 목소리
30가구의 살구정이에는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의 고령화와 청년농업인의 급감은 여느 마을과 큰 차이가 없다. 10년 전만해도 딸기와 느타리재배 농가가 많았던 살구정이는 현재 포도와 깻잎재배, 그리고 벼농사 외에 다른 작물은 찾기 힘들다.

특히 노동력의 수요가 많은 깻잎재배 농가가 마을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다 보니 70대 이상 노인들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경우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강만옹(67)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일손 부족한 것이야 말도 못하죠. 나만 해도 깻잎이 수입이 좋은 것은 알지만 일손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깻잎을 못하니까요. 깻잎 하우스도 다 할머니들이에요. 힘들어요. 힘들어.”

수입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일손 엄두가 안나 깻잎 농사를 안 짓는다는 강씨는 자신이 영농 중인 포도하우스도 일손 부족으로 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포도열매솎기도 꼼꼼히 못해줘요. 이렇게 힘든 판에 무슨 레미콘 공장까지 들어온다고 난리니...도대체 농민들 어떻게 살라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마을을 둘러보니 휴일인데도 깻잎 하우스에서는 나이든 할머니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때 눈에 들어온 청년이 있었으니 스물다섯 홍안의 청년 손정일(25)씨다. 2년 전 해군을 제대한 손씨는 현재 상주대학교 자동차공학과에 재학 중인 살구정이의 청년이다. 휴일을 맞아 부친을 돕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고향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그런데 레미콘 공장까지 들어온다니 화가 납니다. 안 그래도 교통사고 많이 나는데 사고위험이나 먼지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졸업하면 서울서 성공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고 언제든지 돌아 올 수 있는 땅인 만큼 항상 관심을 갖고 지켜 볼 생각입니다.”

이태우 전 군의원   “든든한 후배들이 있습니다”

   
▲ 이태우 전 군의원
사정리 레미콘 입주계획이 발표된 후 마을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반대운동이 시작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 소식을 궁금해 했던 사람이 있다.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강한 추진력으로 자치단체 의원활동을 했고 의회를 나와서는 포도대학 제1기 학생회장 등을 역임하며 농업경쟁력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태우(59)씨다.

올 초부터 이씨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말들이 흘러 나왔고 다른 마을도 아닌 그가 사는 사정리에 레미콘공장이 입주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그를 아는 이들의 염려는 더 짙어졌다. 그러나 지난 1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사정리 현지조사활동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냈고, 전 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공장설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지난달 모내기를 마친 논을 둘러보고 있던 이태우 전 군의원을 만났다. “빈혈이 심하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지난해 가을 가을걷이와 맞물려 여러 번잡한 일 들이 한꺼번에 닥친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평생 병원신세 한 번 안지다가 이 기회로 건강을 꼼꼼히 점검했습니다.”

그래도 흐트러진 것은 없었다. 4배체를 준비하는 그의 포도밭도 고품질 친환경 쌀로 한 가마에 최고 23만원까지 높은 가격을 받고 팔렸던 그의 논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올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쉬지 않았던 것이다.

“레미콘 공장입주라는 현안에 대처하는데 목소리를 모을 군서의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청년들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지키는 모습이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에요. 그것이 선배와 후배의 조화고요.”

든든한 후배들이 잘 해주고 있다며 웃는 그에게 레미콘 입주계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문제의 핵심은 옥천군이 사업자의 수익은 열심히 챙겨주고 주민의사, 주민피해는 철저히 외면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업계획의 문제점은 주민들보다 담당 공무원들이 더 정확히 알고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누가 그 문제를 풀어야겠습니까?”

차분하게 그의 생각을 전했다. 그의 논과 포도밭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그가 한 마디 한다. “내일 죽더라도 포도 농사꾼이 포도 접은 붙이고 죽어야 하는 겁니다. 걱정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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