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66] 안남면 도덕1리 도근리
신마을탐방 [166] 안남면 도덕1리 도근리
280년 은행나무 지키는 설레는 고향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6.03 00:00
  • 호수 7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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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근리 마을 전경

웃서당, 아래서당에 이어 도덕1리 또다른 자연마을인 도근리를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처럼 도근리를 찾은 30일은 농협 조합장선거라는 ‘장’을 맞아 안남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장터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점심시간을 지났을 뿐인데 연주리에 있는 농협 앞마당은 투표를 마친 유권자들로 분주하고 서로들 대여섯 시간 후면 알 수 있을 표심을 점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투표를 마친 조합원들의 얼굴에서 새 조합장에 거는 기대를 읽고 발길을 돌려 도근리로 향한다.

면소재지인 연주리에서 도근리는 먼거리가 아니다. 몇 년 전 새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차를 몰면 서당골보다 가까운 위치지만 도근리가 이렇게 가까워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03년 2월이 되서야 도근리에 정차하는 버스를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하니 예부터 첩첩산중 피난골(큰 난리에 숨어있기 좋은 마을)로 알려진 도근리의 일상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것도 방문객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버스, 천지개벽이었지!
“오늘 왜 이렇게 차가 많이 댕겨?”
“아직 투표안한 사람들 실어 나른다고 돌아다니는 겨.”
“젊은 양반은 왜 온겨? 투표하라고 왔어?”

마을입구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던 노인들이 도근리에서 처음만난 사람들이다. 윤창희(70)할아버지와 황복남(72), 박부양(69)할머니.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자 대뜸 윤씨가 호통부터 치신다.

“농촌에 들어왔으면 농민들 잘살게 해 달라고 좀 써봐. 기자들이 그렇게 안 쓰니까 정치한다는 놈들이 농민들 죽어나가는 줄 모르고 싸움질 한다고 미쳐있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황씨 할머니도 맞장구다.

“젊은이도 생각해봐. 신문에 나오는 거 보면 꺼떡하면 몇 억원이고 몇 천 만원인데 우리 같은 농민들은 어디서 구경하기도 힘든 돈이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한참이나 오고 간 후에야 마을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 시집올 때만 해도 가마를 내려서 논 뚝 같은 곳을 길이라고 걸어야 했어. 옥천 수북리가 내 고향인데 도근리 오면서 얼매나 울었는지 몰라. 눈물을 뚝뚝 흘리니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도근리가 그래도 피난처라고...”

황 할머니의 회상에 다른 두 노인도 고개를 끄덕인다.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더니 도근리가 그 짝이지. 아니 우리 마을에 버스가 들어올지 누가 알았어? 천지개벽이여, 천지개벽...”
버스가 들어오고 사람들의 왕래가 늘어났지만 새로운 변화의 반가움과 함께 사라진 마을의 전통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매년 정월이면 보름 전에 날을 잡아 동제를 지냈어. 마을에서 아이가 태어나거나 초상이 있으면 그 해는 동제를 아예 지내지 않을 만큼 조심했지. 예전엔 마을에 젊은 사람이 많아 날 잡기도 쉽지 않았지. 아이들도 많이 태어났고...”

축관을 세 번이나 지냈다는 윤씨의 회상에는 도근리 동제에 마을사람들이 기울였던 깊은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도근리 동제... 많은 주민들이 도시로 떠난 뒤 빈집만 남은 것처럼 동제도 마을을 떠나고 제사를 지냈던 산제당만 마을 뒷산에 남아있다고 한다.

▲수령 280년, 마을 지킴이 ‘은행나무’
“도근리에 왔으니 은행나무는 보고 가야지!”
윤씨의 충고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장관이다. 은행나무의 너른 그늘 아래로 다가서니 작은 안내판이 서있다. 「길이 22미터, 둘레 3.6미터, 수령 260년 이상, 보호수 옥천18호」

안내판이 기록된 일자가 82년이니 벌써 보호수로 지정된 것도 20년 이상 지났고, 수령은 280년을 지나 300년에 가까워오고 있다. 인간의 수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이 나무를 감싸고 있다. ‘도대체 이렇게 큰 은행나무에서 떨어질 은행이 얼마나 많을까?’

“은행이야 엄청나게 떨어지죠. 은행 떨어질 때면 동네사람들이 나무 밑에다 채를 받쳐놔요. 그렇게 모은 은행을 장사꾼들이 사가면 그 돈으로 잔치를 하는데 매년 은행나무 덕에 마을사람들 잔치는 원없이 했지요.”

은행나무 아래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 기자에게 박부양 할머니가 은행나무에 얽힌 마을 이야기를 전했다. 많을 땐 1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도근리에 안겨주기도 했다는 마을 지킴이 은행나무는 최근 노화가 진행되면서 은행이 급속도로 줄었다고 한다.

“작년엔 누가 은행나무에 자기 비료를 다섯 포나 뿌렸는데 말여... 올해는 누가 할려나...”

▲‘고향 오는 날은 밤에 잠도 못자’
마을로 들어선다. 농번기에 20여 가구 40여명이 살고 있는 도근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느린 걸음으로 마을 골목을 둘러보는 잠깐 사이에도 군데군데 빈 집이 눈에 띈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몇 분이 툇마루에 앉아 감자를 깎고 있다. 고운 차림을 한 모습이 농사를 짓는 분들은 아닌 것 같았는데 역시나 도시에서 고향을 찾아 도근리에 내려온 분들이다. 고향냄새도 그리웠고, 또 조합장 투표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내려왔다고.

“우리 아들이 그러는데 고향 내려가는 날이면 내가 밤새 잠도 못자고 안절부절이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걸 어찌나...” 정복순(74)할머니는 성남에서 내려왔다. 버스와 택시를 4번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길이다.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이 깨끗한 공기가 너무 좋아요. 도시에서는 숨을 쉬고 살기가 힘들어.” 대전에서 온 신순옥(83)할머니도 세상에서 고향이 가장 좋다. 시흥에서 내려온 박점섭(79)할머니나 정복순 할머니보다 가까운 대전에 살아 맘이 내키면 고향을 찾을 수 있어 너무 좋단다. 도근리에 남겨둔 추억들을 되살리며 행복해하는 할머니들을 뒤로하고 마을 앞뜰로 걸음을 옮겼다.

옥천에서 보기 드문 비옥한 황토질의 도근리 뜰은 예부터 최고의 미질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담배농사와 벼농사를 함께하는 윤원근(49)씨를 제외하고는 모든 주민이 벼농사를 주로하고 약간씩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서당골과 도근리의 농지마다 흔하게 보이는 인삼밭은 마을사람들 것이 아니다. 주로 금산 사람들이 도덕1리의 좋은 토질을 찾아와 가꾸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도덕의 뿌리가 깊은 사람들이 살아 도근(道根)리라 했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덕실이(도덕2리), 서당골, 소야(도농리), 연주리를 도는 길목에 있다하여 빙글빙글 도는 도근리라고 일렀다 한다. 마을이 도가니 모양같이 생겼다고 도근리라는 말도 있다.

도근리의 기원이 어디에 있던 우리 농촌의 희망이 빨리 도근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마을을 떠났다.

윤창국씨 ``새벽 4시면 일어나!''

   
▲ 일흔일곱의 노장 윤창국씨.
지난주 도덕1리 주재규 이장으로부터 귀 뜸을 받은 사람이 있다.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젊은 사람조차 흉내 내기 힘들만큼 열심히 흙을 가꾼다는 농민에 대한 이야기다.

올해 일흔일곱의 윤창국 노인. 윤 노인을 만나려면 집으로 가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말 대로 작은 마을 도근리에서 윤 노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묻고 물어 논 한 귀퉁이에서 모판을 정리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새벽 4시 반이면 집을 나와 담배 밭을 시작으로 아들 원근(49), 며느리 조인호(45)씨와 함께 가꾸는 논과 밭 1만3천여 평을 돌아본다. 대강 돌아도 3시간이 걸린다는 자신의 논밭을 종일 가꾸는데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집에서 기르는 소 다섯 마리와 염소들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생명들이다.

일흔일곱 노장의 하루 일상을 듣고 나니 가장먼저 드는 걱정은 건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 다 아프지요. 더구나 6.25때 관통상을 입었던 왼쪽다리 때문에 요즘 걷는 게 더 무겁고 힘이 듭니다. 그래도 별 수 있나요. 일이 눈에 보이는데 안 할 수 없지.”

윤 노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 국군에 입대했다. 그가 군에 입대한 1948년은 4월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전쟁보다 더한 피를 남도에 뿌린 시기였다. “군에 입대하자마자 제주도로 투입됐어요. 그때 안남에 이은상씨와 염광웅씨도 군대서 같이 제주도로 보내졌는데 그이들은 진압작전 중에 사망했고 난 살았지요.”

8개월을 진압작전에서 생사를 넘나든 윤 노인은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다시 최전방인 경기도 가평으로 투입된다.

“가평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밀양 7육군병원에서 1년 입원을 한 뒤 제대를 했지요. 총알이 뼈를 안 다쳐서 보상은 해줄 수 없다고 하네요. 원호대상이 되기 위해 3번이나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당시 공무원들은 그때마다 돈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관둬버렸죠. 몇 푼이나 받는다고 그놈들한테 몫 돈을 바칠 수는 없잖아요.”

불편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얼마간의 요양을 마친 뒤 다시 흙을 가꾸기 시작했다. 아내 이정순(75)씨와 7남매를 낳았고 모두 장성했다. 명절이면 손주들까지 대가족이 모이는 그의 집은 마을에서 유명하다.

“아들 내외와 나, 그리고 아내 이렇게 넷이서 1년 365일 논밭을 가꿉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해서 버는 돈을 하루 일당으로 계산해 보니 2만원이에요. 4식구가 하루 8만원씩 버니까…. 좀 있으면 외국쌀도 싸게 팔고 매상도 없어진다니까 2만원 버는 것도 힘들게 됐구먼.”

그와 짧은 대화를 끝내고 돌아서는 기자의 등 뒤로 노인의 작은 음성이 남는다. “아무것도 한 일 없소! 농촌 지킨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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