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64] 안남면 연주2리 독락정
신마을탐방 [164] 안남면 연주2리 독락정
독차지하고 싶은 아름다움 '독락정'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5.20 00:00
  • 호수 7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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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락정 전경

독락정(獨樂亭)은 글자 그대로 정자의 이름이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등록된 이 정자는 정자의 이름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간말과 함께 연주2리를 이루는 자연마을의 명칭이기도 하다.

‘홀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이름부터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을이지만  지난주 중간말을 돌아보면서도 애써 다리품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다음 주의 즐거움으로 독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락정을 찾은 18일은 아침부터 적잖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줄 곳 따라다녔다. 빗속의 풍경을 즐기는 우중산책(雨中散策)의 맛도 그리 나쁠 것은 없겠지만 처음 만나는 기회이니 만큼 화창한 날씨를 기대하며 길을 나섰고, 다행히 독락정은 화창한 모습으로 답사객을 맞이한다.


금강을 감싸는 병풍
중간말을 지나며 낯익은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독락정에 도착했다.  마을입구 느티나무 앞에 차를 세우고 잠깐 고민에 빠진다.

‘사람부터 만날까 아니면 독락정 먼저?’

마을의 상징이 마을이름이 된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명불허전(名不虛傳: 널리 알려진 명성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이라고 했다. 독락정 마을에 도착하자 펼쳐지는 금강의 수려한 풍경, 병풍처럼 금강을 감싸는 층암절벽의 풍경은 나그네를 곧바로 정자로 이끈다.

‘초계주씨로 절충장군 충주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선조40년(1607년)에 세워 현종9년(1668년) 군수 심후가 현판을 쓰고 대청에는 송근수(1573∼1635)의 율시기문이 새겨져 걸려있다….’

독락정의 돌층계 중간쯤 서있는 안내문을 대강 읽어보고 대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문은 주먹만한 자물쇠가 완강히 틀어쥐고 있었다. ‘독락정 대청마루에 앉아 400년 전 조선의 선비를 매혹시킨 풍광을 즐겨보겠다’는 야무진 욕심이 좌절을 맛보는 순간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금강이 가장 잘 보일 법한 위치를 잡자는 생각에 정자 근처 가장 높은 곳에서 일단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좌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락정과 금강 사이를 가로막는 방해꾼이 있었으니 바로 독락정 양수장이다. 농업기반공사가 관리하는 이 건물은 금강의 물을 퍼 올려 안남 일원의 저수지와 물이 부족한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다.

독락정이라는 문화재의 가치가 건축물뿐만 아니라 좋은 전망에도 있을 텐데, 양수장으로 독락정의 가치가 졸지에 반 토막난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먼저 든다. 양수장으로 독락정의 400년 시선을 막기 전에 필요와 가치를 조화시킬 수 있게 배려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

간이상수도 문제 해결해야
독락정을 내려와 양수장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없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다. 다행히 금강 쪽으로 시원한 창이 나 있어 아쉬운대로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기에 담는다. 길이 끝나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마을입구로 돌아왔다. 마을자랑비가 느티나무 옆에 서있다.

「앞에는 금강이 휘돌아 흘러가고, 뒤로는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산천이 아름다워 정자 없이 지낼손가. 이곳에 정자지어 이름은 독락이라 어찌 홀로앉아 즐거운 낙 누리리까 태평세민 모두모여 함께 낙을 누려보세.」

마을자랑비에 적힌 짧은 구절이지만 마을의 훈훈한 인심을 짐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아무리 눈을 뜨고 찾아봐도 사람 찾기가 힘들다는 데 있었다. 마침 트럭을 몰고 들어오는 아주머니가 있어 차를 세웠다. 도덕2리에 사는 설영애(54)씨가 시누이 집에 개밥을 주러 왔단다.

“마을에 사람들 없어요. 요즘이 얼마나 바쁜 철인데 누가 집에 있나? 농사 안 짓는 노인들이 계시니까 집집마다 들어가 보셔.”

설씨에게 주민들이 있다는 논의 위치를 물어두고 마을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못자리하러 논으로 나갔다지만 그래도 마을을 지키는 분들은 있었다. 독락정 김재석(71)노인회장 집 마당에 김 회장과 박수춘(72)할머니 부부 그리고 논에서 방금 돌아온 주영춘(55)씨가 차를 마시는 중이다.

“독락정만 한참 땐 50가구까지 사람들이 살았어요. 그러다 대청댐이 생기고 마을 앞 농지가 수몰되면서 많이들 떠났죠. 지금은 스무 가구도 안되니까요.”

주씨가 수몰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인구가 줄어들고 또 금강 상류에 위치해 각종 규제에 묶여 불편한 점들은 지난주 만났던 중간말과 마찬가지다. 김 노인회장은 논산군 연산면이 고향이다. 대부분의 삶을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대전에서 보내다 사람이 좋은 마을 독락정으로 이주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다들 다정하고 좋아요.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보다 더 편한 곳이니까요. 굳이 불편한 것을 말하자면 간이상수도 문제 말고는 없어요. 관정을 잘 못 팠는지 자주 시커먼 흙탕물이 나오거든요. 주민들 골칫거리야 간이상수도 문제 말고는 뭐 있겠어요.”

식수문제는 주민들의 한결같은 불편사항이었다. 그래서 조만간 마을에서도 관정의 위치를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결국 마을이 대청댐상류지역으로 온갖 규제에 묶여 있으면서도 주민들 앞으로 배정되는 물이용 부담금을 자유롭게 쓸 수 없으니 문제예요. 자금의 성격이야 이해하지만 현재보다는 주민들에게 더 자금사용의 자율권을 주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주씨의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주씨는 논으로, 김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약국으로 간다.

우리 집 보물 ‘주명신 교지’
독락정을 세웠다는 주몽득 선생의 부친이 주명신 선생이다. 현재 초계주씨 종친회장을 맡고 있는 주재필(75)씨의 11대조라고.

“기록을 살펴보면 초계주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한 것이 주명신 선생이라고 보입니다. 주명신 선생이 임진왜란당시 왜구를 물리치는 공을 세워 1594년 선조로부터 수문장을 제수 받으셨고, 그 아들인 독락옹 주몽득 할아버지가 임란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전쟁포로의 귀환을 책임지고 해내신 기록이 있습니다. 두 어른의 산소가 옥천에 있으니 이곳에 주씨가 정착한 것이 400년 전이죠.”

주씨는 임란당시 큰 공을 세우고 교지를 받은 주명신 선생에 대한 향토사적인 접근이 부족해 아쉽다는 말과 함께 집안의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교지를 보여준다.

‘교지…. 수문장주명신무과평과제삼백십일인급제출신자…. 만력 22년정월23일’

“10년쯤 전에 표구를 했는데 잘 한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두루마리로 접혀 전해오던 것을 표구를 했는데 중간 중간 훼손된 부분도 있고….”

주씨와 함께 집안의 족보도 살펴봤다. 주몽득 선생이 절충장군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으며 이괄의 난을 진압 한후 57세에 독락정을 창건했다는 기록도 눈길을 끈다.

“한때는 60호 남짓한 독락정의 대부분이 주씨였어요. 수몰 이후에는 다 외지로 나가고 지금은 주씨와 일반 성씨가 절반씩 살고 있습니다.”

주씨와 함께 2년전 준공했다는 초계주씨의 사당인 영모사를 살펴보았다. 1억5천만원에 이르는 돈을 투자해 지은 사당답게 널찍하고 깨끗한 시설이 눈길을 끈다. 120여기의 위패가 봉안된 영모사의 너른 마당도 매년 음력 10월 5일 제사 때면 가득 찬단다.

“집안제사와는 별도로 독락정 주민 전체가 마을 뒤 둔주봉에서 산제를 지냈었어요. 새마을 운동하면서 미신이다 뭐다해서 맥이 끊어졌죠. 봉우리 아래에 큰 참나무 밑에 터를 닦고 집을 지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집에 보관하던 제기들이 정말 오래된 보물들이었거든요. 산제가 없어지면서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몰라요. 누가 훔쳐 갔다는데 참 아쉬워요.”

독락정의 자랑은 '협동심'
귀농 6년차 주재열 독락정 총무

연주2리의 비옥한 들은 대청호가 생기고 수몰되면서 벼농사 대신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다. 수몰 당시 농민들은 국가로부터 받은 몇 푼 안되는 보상금을 들고 인근 마을의 논을 구입하기 위해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농번기에는 마을에서 주민들 만나기가 힘들다. 그들을 만나려면 여기저기 연주2리 근처에 흩어져 있는 논, 밭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독락정의 자랑은 협동심이죠. 못자리내고 치상하고 모내기 하는 일, 그리고 고추 심는 일 만큼은 절대 따로 하는 법이 없어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품앗이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 밭이 마지막 못자리네요.”

도덕2리의 한 논에서 만난 주재열(62)씨. 독락정의 총무를 맡고 있는 주씨와 마을부녀회장인 아내 이병순(57)씨에게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울산 LG금속에서 2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6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이렇게 쉴 틈도 없이 일하는데 농사가 힘들긴 힘들어요.”

“아이고 다른 말 할 것 없어. 농사짓느라고 집어넣은 돈 그대로만 나와도 할아버지 하죠. 논 한마지기 해봐야 쌀 3가마 나오는데 트랙터 두 번 치고 급할 땐 일손 사야 하고 이것저것 생각해봐요. 뭐 먹고 사는지요.”

못자리작업을 마무리하던 아내 이씨가 한마디 거든다. 밭 2천여 평, 논 1800평의 거친 농사일….  남는 것이라도 있어야 보람이 있지 않겠냐고.

“콩은 노루하고 까치가 다 뜯어먹고 고추도 병이 심해 농사 잘된 사람 찾기 가 힘들고…. 쌀값은 오르는 법이 없으니까요. 한 달에 딱 50만원만 벌어도 직장생활이 났지 누가 농사  짓겠어요?”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 비가 한 바탕 퍼부으려나 보다.

“경운기 타고 마을까지 가려면 이제 일어서야겠네. 아무튼 독락정 만큼 협동 잘되는 마을 없다고 꼭 쓰셔야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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