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청성면 합금리 어신여울·신달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청성면 합금리 어신여울·신달여울
농사 짓고, 조삼 모시러 다녔던 길
옛 여울 형태 그대로, 지금도 건너는 추억의 여울 길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5.05.13 00:00
  • 호수 7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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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금리.가덕리 사람들이 건너다녔던 어신여울 앞에 박용재, 이용재, 정수병(왼쪽부터)씨가 섰다. 박씨와 이씨 사이가 여울 물 길이다.

“형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러게. 잘 지냈나?”

청성면 합금리 하금 마을과 동이면 가덕리 마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 반가운 마음이 묻어난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두 사람. 도로를 따라서는 아마도 2km 가까운 넘는 길을 가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의 여울을 따라 온 여울지기 정수병(동이면 용죽리)씨도 이 곳이 처음이란다. 금강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예전 방식대로 생을 영위하고 있는 이 곳. 강가에는 먹을 것이 있었고, 인심 또한 좋은 그런 곳이었다.

◆어신여울은 제 모습을 내보이기 싫은가?
언뜻 보아 여울이 있을 법한 장소는 아니다. 겉으로 흐르는 물결이 편해 보이기는 해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에 통상 물이 쌀쌀거리며 흘러 ‘수심이 앝은 곳’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 ‘어신여울’이다. 사람들이 쉽사리 여울이라고 달려들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수병씨와 함께 합금리 하금 마을에 도착해 어신여울·신달여울에 동행할 박용재(81·청성면 합금리 하금 마을)씨를 찾았다. 함께 도착한 금강변. 강 건너에 살고 있는 이용재(71·동이면 가덕리)씨가 먼저 강가에 나와 있다.

“어! 어떻게 건너 오셨어요?”
“여울로 건너왔어요.”
“옛날에 하도 건너 봐서 지금도 물길을 훤히 알아요.”

이상한 건 물길을 따라 여울을 건너온 이씨의 옷이나 장화가 어느 한 군데 젖지 않았다는 데 있다. 보고 있던 박용재씨 한 마디 한다.

“여기 여울은 사람이 주로 건너 다녔던 곳이고, 저 아래 물살 센 곳은 살을 놓아 물고기를 잡았던 곳이에요.”

어신여울과 신달여울은 족히 100여m는 떨어져 있다. 신달여울이 더 하류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온 여울 얘기가 이어졌다.

“합금리 사람들은 가덕리에 있는 농토에 가느라고 건너 다녔고, 가덕 사람들은 합금리에 있는 조상 묘소를 찾아 뵈러 다녔습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어신여울이야말로 확실한 역할 분담을 한 셈이다. 농토가 흔하지 않은 합금리 사람들은 가덕리에서 꽤 소출을 올렸다. 박용재씨가 그 주인공이다.

“추수를 한 벼를 배에 실어 운반했어요. 신달여울에서는 사람들이 직접 끌어올리느라고 힘도 많이 들었고요.”

한 번은 가덕리 더디기 마을에서 보리방아를 찧어 오던 어떤 사람의 배가 바위에 부딪쳐 보리가 강물에 빠졌다고 했다. 모두 떨어진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으나 쌀도, 보리도 물을 먹은 것들은 제 맛이 나지 않았단다.

◆‘쑥대기’로 물고기 잡던 신달여울
‘쑥대기’. 수숫대로 만들었다는 전통적인 고기잡는 기구다. 수숫대를 엮어 물은 빠져 나가게 하고 고기는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기구를 쓰려면 강물을 돌로 막아 물흐름을 일정한 곳으로 유도하고 그 곳에 쑥대기를 설치해 고기가 잡히도록 했다. 그 기구는 수숫대 뿐만 아니라 싸리나무로도 만들었다. 강가에 살던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내용이다. 통틀어 ‘살’이라고 한 그걸 설치한 곳이 신달여울이다.

물고기잡이는 일이 없는 겨울철에 이루어졌다. 합금리 사람들과 가덕리 사람들 몇몇이서 작목반식으로 구성해 고기를 잡고, 이원장에 내다 팔았다. 값이야 쌌지만 게중에는 물고기를 잡아 생활을 영위했던 사람도 있다.

“4∼5년 전까지 살을 놓았던 자리가 있었어요. 불과 2∼3년 전에 물 흐름을 좋게 한다고 굴삭기로 돌을 터서 그렇지, 높이가 한 1m 정도는 됐을 걸 아마!.”
“눈치, 마주, 잉어, 치리 같은 물고기가 그때는 없는 게 없었어. 한 번 처박히면 고기들이 못나와. 지금 생각해도 우리 조상들 연구 잘한겨!”

돌을 쌓아 물을 강 가운데로 몰아 고기를 잡았다. 가운데에는 쑥대기를 설치하고. 다른 사람들이 잡힌 고기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밤에 보초까지 섰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어업허가권’의 시초라고나 할까. 어쨌든 신달여울에서 다른 사람들은 살(쑥대기)을 이용해 고기를 잡지 못했다. 살을 놓았던 자리는 동이면 용죽리 올목 마을 앞과 신달여울 등이 유명했다.
 
◆여울 건너는 발길은 물 속을 잘 찾아가고
신달여울과 어신여울을 사람들이 잘 이용했던 것은 지금과 같이 가덕리-합금리-고당리로 이어지는 도로가 닦여 있지 않은 탓이었다. 워낙 좁은 길이어서 여울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더 발품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지금 있는 길로 다니기조차 어려웠다.

옛날 한 스님이 좁은 길을 가다가 신달여울 하류 지역의 ‘함바우’ 근처의 바위를 돌아 걷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져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로 궂은 날이면 그 근처에서 ‘깽맥이(꽹가리)’소리가 난다는 말이 났다. 어른들은 실제 그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용재씨는 “오래 됐지. 궂은 날이면 어른들이 깽맥이 소리 난다고 한 지갚라며 그 전설을 전한다.

어신여울 바로 위 가덕리 강변에 ‘구시개둠변은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곳 중의 하나다. 홍수가 나거나 가물거나 해도 항상 변함이 없는 곳이란다. 물이 휘도는 곳이라 둠벙이 흙에 묻힐 만도 한데 그 곳은 항상 물이 고여 있다. 박용재씨와 이용재씨는 우연하게도 이름이 같다. 박용재씨가 당연히 선배다.

“아! 내가 간이학교 시절 청마학교 지으려고 고생했고 이 친구들이 학교에 들어와 같이 학교 다녔어. 그래서 더 잘 알지.”

여울 주변의 얘기는 더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얘기는 더디기여울을 갈 때로 미루며 이용재씨는 아까 건넜던 여울을 다시 건너 돌아간다.

“언제 건너고 오늘 건너시는 거예요.”
“한 15년? 20년 됐나?”

바지 벗어 목에 걸고, 장화 들고 들어선 물 속 여울길. 아하! 그래서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던 거였구나. 옛날에는 나뭇짐 지고 한겨울 얼음에 정강이를 베면서까지 다들 그렇게 건넌 길을 이용재씨가 건넌다.

박용재씨, 금강은 삶의 터전

박용재(81)씨는 합금리 하금 사람이다. 이미 팔순을 넘긴 연배면 모두가 그렇겠으나 박씨의 살아온 이력 또한 심상치 않다. 물살이 세서 물고기를 잡는 살을 놓았던 곳에 인공으로 난 여울, 신달여울을 설명하던 박씨는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아주 조금 풀었다.

“옛날 나이먹어서 청마간이학교를 졸업하고 취직 자리가 있다고 해서 함경도 청진에 갔어요. 그런데 냄새도 많이 나고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몇 개월 버티다 결국은 공장에서 도망쳤지요.”

도망친 박씨를 공장에서 찾으러 쫓아왔다. 옥천에서 갔던 여러 명이 함께 도망을 쳤는데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넘어가려다 한 노인을 만났고, 밥을 주겠다는 노인의 말에 노인의 집에서 두어 달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향 집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박씨는 노인에게 고향에 갈 차비를 달라고 했다.

통행권이 없이는 다니지 못했던 일제말. 노인의 사위인가 하는 인근 철도역장에게서 통행권과 차표를 얻어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박씨의 나이 열여덟, 열아홉 무렵이었다. 해방을 불과 2∼3년 앞두었을 무렵이다.

그렇게 고비를 넘긴 박씨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신달여울에서 고기를 잡아 이원장에 가서 팔았다. 아주 싼 값이었으나 일거리가 없던 겨울철이었으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박씨는 고향을 지키고 있다. 이제는 합금리 노인회장이란 노송(老松)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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