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63] 안남면 연주2리
신마을탐방 [163] 안남면 연주2리
봄날의 축복을 재촉하는 `중간말'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4.15 00:00
  • 호수 7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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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2리 중간말의 주부와 할머니들이 꽃놀이에 쓸 봄나물을 뜯고 있다.

우리고장의 자연이 1년 중 가장 사치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37호선 국도를 따라 피기 시작한 벚꽃은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반기며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벚나무 아래로 자리를 잡은 개나리는 그 노란 색깔이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벚꽃과 개나리 그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민 진달래는 어떤가... 들뜬 듯 수줍은 듯 그러면서 또 마음껏 분홍빛 제 색을 펼치는 진달래는 보는 이의 마음을 쉽게 빼앗는다. 한껏 열어놓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의 향기를 온 몸으로 안고 길 위에 서니 마치 자연의 향연을 독차지하는 계절의 독재자가 된 기분이다.

잠깐인들 어떠랴...자가용도 좋고 버스도 좋다. 답답한 철판 껍데기가 없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라면 더 좋겠다. 옥천 땅을 밟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함께 나와 봄의 사치를 즐기자. 만인에게 평등한 봄의 대 향연을...

봄꽃으로 수놓아 진 환상의 카펫  위를 달리던 자동차는 장계유원지를 지나 인포리를 거쳐 안남 땅으로 향한다. 향기에 취한 마음이 깨기도 전에 도착한 곳은 안남면 연주2리 중간말이다. 안남초등학교부터 경계가 시작되는 연주2리는 자연마을로 중간말과 독락정을 품고 있으며 49세대 11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안남초등학교를 지나 바로 곁에 있는 중간말 노인회관에 차를 세우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로 보리밭이다. 군내 최대의 보리재배단지답게 넉넉하게 펼쳐진 보리밭은 벌써 한 뼘이나 자란 보리가 다가오는 여름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다.

담배 끊었어요!

“안녕하세요!”

중간말에서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눈 사람은 봉원여(46)씨다. 연주2리 박현용(49)이장의 부인인 봉씨가 노인회관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이양반이 어딜 가셨나? 뻥튀기 튀긴 것 가져오래서 갖고 나왔더니 어딜 가고 안계시네.”

봉씨 앞에는 파란 비닐자루에 한가득 뻥튀기가 두 자루씩이나 담겨있다. 염치불구하고 한 주먹을 입안에 털어 넣으니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방금 튀긴 듯 아직 따스하다.

“요즘 담배를 끊는다고 뻥튀기를 아주 입에 달고 살아요. 벌써 몇 번째 튀겼는지 모른다니깐요.”
“벌써 두 달 됐어요. 담배 생각날 때 마다 먹는데 좋더라구.”

어딜 다녀왔는지 박 이장의 손도 부지런히 뻥튀기 주머니를 드나든다.

“비가 많이 오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 물이 들어요. 지금 보리밭이 들어 선 저 땅도 과거엔 참 맛있는 쌀이 자라던 땅이었는데 지금은 여름 우기 전에 수확할 수 있는 보리나 마늘 말고는 재배를 못하네요.”

박 이장으로부터 이런저런 마을의 사정을 듣는다. 20여년 전 수몰이전엔 연주2리 전체 가구 수가 100호에 육박했다는 얘기부터, 절반으로 줄어 든 마을은 아직도 큰 비가 오면 보리밭이 있는 대청댐 유휴지 가까운 주택이 하천범람으로 수해를 입는다는 이야기까지.

“올해도 5천여만원 정도의 물 이용부담금이 마을에 배정 됩니다. 이 돈은 대부분 트랙터 등 농기계를 구입해 마을 공동소유로 귀속시킬 것이고요. 다른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마을도 노령화가 심해요. 중간말에서 나보다 젊은 농민이라고 해야 토마토 농사를 짓는 주교종(46)씨 정도니까요.”

아흔 셋, 농부는 녹슬지 않았다

박 이장집 안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된 대화를 끝내고 마을 안길로 걸음을 옮긴다.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다는 마을은 조용하다. 잠시 둘러보는데 흙 담 안쪽에서 인기척이다.

“계십니까?”

인기척을 따라 대분을 열고 들어가자 정정한 노인 한 분이 흙 묻은 장갑을 벗으며 누구냐고 묻는다. 노인은 방금 전까지 마당 한켠 축사에서 청소를 하고 나오는 길이다. 청소도구를 정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툇마루에 앉길 청하신다. 기자가 중간말을 찾은 이유를 밝히자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올해로 아흔 셋, 중간말 최고령 주재학 옹이다.

“아들들이 보면 아주 싫어해요. 아버지가 이 나이 먹도록 농사일 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 보기도 흉이라고 생각 한다는 거지. 그래도 멀쩡한 육신에 놀고먹을 수는 없지 않소. 어디 아픈데도 없는데 농사꾼이 요즘 같은 철에 놀아서야 쓰나?”

주재학 옹은 현재 서울 미아동 영흥중학교 교장으로 있는 주예정씨와 충남도청 건설과에 근무하는 주창근씨 형제를 두었다고. 할아버지는 요즘 한참 젊었을 때 보다 늦게 일어난다고 하신다. 게을러졌다고. 몇 시에 기침하시냐고 여쭙자 6시나 돼야 일어난다고 하신다. 여섯 시... ‘새해부터는 꼭 여섯시 전엔 일어나겠다’고 아내한테 약속한 일이 떠올랐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약속을 지킨 날이 겨우 손꼽을 정도였는데…. 부끄럽다.

“여섯시에 일어나서 무슨 일 하세요?”
“그렇게 늦게 일어나니 뭐 할일이 있소. 오늘은 감자심고 소여물 끓이고 그러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툇마루에 앉아 마을에 얽힌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듣는데 밭일을 나갔던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안수상(71)할머니는 마늘밭에 비료를 뿌리고 돌아오는 길이다.

“노인네들 사는 이야기에 뭐 들을 것이 있다고 듣고 있으셔?”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와 함께 할머니가 한 마디 건네신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고운 미소를 간직한 표정이 참 좋다. 중간말 노부부의 삶, 한 세기를 묵묵히 걸어 온 그들의 삶은 사실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치 않았다.  그들의 꾸밈없는 모습이 자꾸만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기억하기 싫은, 지긋지긋한 가난

다시 인기척이 있는 집을 찾는다. 구불구불 마을길이 박성례(78)할머니 집까지 닿는다. 마침 박 이장의 모친 임판준(76)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하지마. 지긋지긋한데... 지금이야 쌀밥이라도 먹고 살지 젊었을 땐 죽으나 사나 나물만 뜯어먹고 살았어. 이 동네 사람들이 맨 날 나물만 먹고사니까 다 얼굴이 누렇다고 했다니깐.”

두 할머니 모두 일제시대 공출을 피해 어린나이에 중간말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으로 시집온 새색시들은 신방을 차리기 무섭게 일용할 식량 ‘산나물’을 뜯으러 소쿠리를 이고 들로 산으로 나가야 했다.

“도토리 알지? 도토리를 빻아서 수제비를 해 먹었어. 우리들은 그거라도 원 없이 한 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떫다고 한 숟갈도 못 먹더라고.”

박성례할머니의 말을 임판준 할머니가 거든다. 어디 도토리 뿐이었겠는가.

“시퍼런 보리를 뜯어다가 맷돌에 콩하고 갈아서 죽을 끓여 먹었지. 나물을 뜯어 와도 된장이 있어, 고추장이 있어…. 아무것도 없었어.”
“구질구질한 얘기는 그만 하자고.”

힘겨운 세월이었지만 구비 구비 보람은 샘처럼 지친 삶을 위로했다. 임 할머니는 보은 원남장을 다니며 조금씩 모은 종자돈으로 장사를 해 아들들을 가르쳤던 날을 떠올리며 보람을 떠올린다.

“젊은이들 쑥 캐러 나선다는데 할머니들 안갈껴?”

좀 전에 만났던 안수상 할머니가 마당에서 기별을 한다. 마을 부녀회에서 며칠 뒤 할머니들을 모시고 장계유원지로 꽃놀이를 간단다. 이날 먹기 위해 쑥을 캐러가자고 안 할머니가 제안하고 다른 할머니들도 따라 일어섰다.

개교 71주년을 앞둔 안남초

“오는 22일이면 안남초등학교가 개교 71주년을 맞습니다. 개교를 기념해 15일에는 교내과학경진대회를 열 계획이고, 16일은 전교생이 학교 뒷산 둔주봉으로 체험학습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연주2리 안남초등학교(교장 김덕중)가 오는 22일 개교 71주년을 맞는다. 열린우리당 이용희 국회의원을 비롯해 서울대 미대 차동철 학장, 전 충남대 정덕기 총장 등 걸출한 동문을 배출해온 안남면 유일의 배움터 안남초등학교.

큰 행사는 아니지만 알찬 기념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임운재 교감에게 학교가 지역과 어떻게 교류하고 있는지 들었다.

“다가오는 운동회를 포함해 모든 학교 행사는 지역사회와 더불어 함께하는 축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단지 학부모님들과 동문이 학교를 찾아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학생들에게 고향의 환경과 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안겨주기 위해 올해부터 ‘안남 문화재 체험학습’을 위한 교재도 제작해 활용하고 있고요.”

임 교감이 지난 2월 출간한 ‘안남의 3사랑 문화재 체험학습’이라는 교재를 소개했다. 이 학교 4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양성훈(26)교사의 책임아래 제작된 이 교재는 안남 곳곳에 산재한 40여개의 문화재를 가족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 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해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작은 책자지만 학생들이 가족과 함께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가장 흐뭇합니다. 안남의 역사와 문화에 애정을 갖고 계신 교사들이 많은 만큼 앞으로 더 알차게 보완되리라 생각해요.”

책자를 집필하는데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양성훈 교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학교를 나왔다. 연주2리가 품고 있는 보리밭이 손을 이끈다. 저쪽으로는 흑염소 일가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멀리는 봄나들이를 위해 쑥을 뜯는 중간말 주부들이 분주하다.

한참을 넋을 놓고 봄바람에 이리저리 춤을 추는 보리밭의 푸른빛에 취해 있는데 쑥을 뜯던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신다.

“엊그제 청춘이더니 백발노인이 되었네∼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안남이 좋아요"
[인터뷰] 안남초등학교 양성훈 교사

   
▲ 안남초등학교 양성훈 교사
‘(중략)...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인사를 했던 일, 뻘뻘 땀흘리며 아이들과 둔주봉에 오르던 일, 때아닌 비를 만났지만 그래서 더욱 기억이 생생한 봄 소풍, 비가 올까 염려했지만 좋은 날씨 속에 한마당 잔치를 연 운동회, 여러 선생님을 모시고 수업을 공개했던 일까지... 이 모두 나를 이끌어주시는 든든한 선배 선생님들과 나를 믿고 따라주는 우리 아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항상 초심의 의욕과 열정으로 참스승의 길을 걸어야겠다. 이 길이 많은 배움과 가르침의 즐거움들로 내 앞에 펼쳐지길 원한다...‘(교단일기 중)

2년 전 여름 초등학교 교사로 강단에 선 한 교사가 본사 지면을 통해 자신의 일터에 대한 설램과 기대를 전한 글이다. 이 글의 주인공 양성훈(26)교사를 다시 안남초등학교에서 만났다. 벌써 3년차에 접어든 교사의 길이 그녀에겐 짧게만 느껴지나 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고 담담하게 웃는 그녀에게 지난 시간에 대한 소회를 들었다.

“시골학교라면 언뜻 낭만을 꿈꾸고 떠올리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말고도 업무가 많아요. 도시학교보다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자신이 제작한 체험학습교재로 이야기를 꺼낸 양씨는 여전히 첫 근무지인 안남이 좋다고.

“언제나 처럼 옥천의 교육자로 남고 싶은 것이 제 소망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큰 학교에서 보다 이렇게 작은 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네요.”

자꾸 줄고 있는 학생수도 걱정이고, 도시가정에 비해 학교교육의 의존도가 높은 농촌의 교육환경도 그녀에겐 걱정이다. 하지만 현장교사의 열정으로 늘 바람직한 해결점을 고민하고 있다는 양씨에게 지면을 통해 학부모들에게 전하는 말을 부탁했다.

“칭찬과 관심, 너무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학생들을 교육함에 있어 이 말보다 중요한 말은 없을껍니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관심과 함께 우리 어린이들에 대한 지역사회와 가정의 적극적인 관심이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농촌의 교육도 훨씬 가벼운 걸음걸이를 가져 갈 수 있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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