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마티리 '말여울' ②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마티리 '말여울' ②
대추나무 전설의 현장 먹절재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5.04.15 00:00
  • 호수 7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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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립 선생 애국혼 서린 빈 절터와 산등성이 논 흔적 아직도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다. 동이면 조령리에서 금암리로 가는 길을 닦느라고 깎아낸 절벽으로 올라야 한단다. 지그재그로 닦여진 길. 낙엽이 쌓여 여간 미끄럽지가 않다. 우리가 지금 오르고 있는 길은 청마리 말티 앞 말여울을 건너 올라오는 것과는 반대 방향이다. 

예부터 목쇠(목시)벼랑이라고 불렀던 길. 험하고 길도 좁아 사람들이 다니는데 불편을 많이 겪었던 곳이다. 이 절벽길은 옛날, 그래봤자 불과 20∼30여년 전이다. 목쇠벼랑으로 길이 나서 차량이 통행하게 될 때까지 청마리 말티 앞 말여울을 건넌 청성면 합금, 고당 사람들도 건넜을 것이고, 푸렁골, 먹절 사람들이 장을 보고 볼 일을 보러 넘던 고갯길이다. 

먹절재. 지도에 나타난 먹절재의 높이는 해발 270m. 먹절이라는 절, 먹절 마을이 있어 먹절재라고 불렸을 이 고갯길을 오르는 청마리 길은 다소 편하다. 급경사가 없고 오르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말여울 건넜던 사람들 넘던 고개
옛 길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땀이 나려고 한다. 여울지기 정수병씨와 오삼탁(69·동이면 금암리 새터)씨가 오늘의 동반자다. 지난해 7월 적하리와 조령리를 잇는 송골여울을 갔을 때 동행했던 오삼탁씨가 이 길을 아는 까닭은 고창오씨인 오씨의 조상 묘소가 먹절재 정상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오씨는 조상 덕분에(?) 이 재를 아직도 해마다 오르는 사람이다. 오씨는 해마다 벌초 시기가 되면 기계를 들고 고갯길을 오른다. 혼자 올 때도 있고, 아들 등과 함께 올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혼자 올라오는 횟수가 많아졌단다.

▲ 목쇠벼랑으로부터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다 잠시 숨을 돌렸다. 오삼탁, 정수병(오른쪽)씨.


“이 산소도 내가 힘없어 못 올라오면 묵고 말거요. 지금이야 이 산소 올라와도 40분 정도면 올라오지만 앞으로는 힘들겠죠.” 

드디어 먹절재 등성이에 올라섰다. 올라서서 말티 쪽으로 조금 내려서니 먹절 마을이 빤히 보인다. 빨간 페인트칠을 한 조립식 주택이 조명숙 이장의 집이고, 그 위가 바로 김동식씨의 집이다. 고갯마루에서 마을을 빤히 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먹절 터를 확인하러 등성이를 탔다. 성황당 무너진 돌무더기가 보인다. 오삼탁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지금은 허물어졌지만 꽤 큰 성황당이었다고. 오삼탁씨의 조상 묘소에 도달했다.

◆먹절재에 오르니 옥천읍이 훤하고
앞이 훤하니 트였다. 장관이다. 한 눈에 다 보인다. 금암리에서 휘돌아가는 금강이 보이고, 올목으로 새로 난 고속도로며, 장령산, 마성산에 삼성산까지 옥천읍을 둘러싼 산은 물론이고, 옥천읍 중앙에 있는 함박산, 돌람산에 옥천 시내까지 전부 볼 수 있다. 

“야! 이 묘자리 정말로 좋네요.” 
산 사람도 이렇게 속이 트이는 것 같은데 세상떠난 영혼 역시 마찬가지리라. 산소를 지나니 옛 절터가 나온다. 이 절터는 예부터 먹절이라는 절이 있었던 터라 전해진다. 이런 등성이에 무슨 절이 있었으랴 했지만 큰 바위를 등지고 암자 쯤은 제법 들어섰을 법한 터가 눈 앞에 나타난다. 축대를 쌓아 길을 만든 흔적이 아직도 역력하다. 절터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절터에 먹는 샘물이 있었다는데….”
그러고 보니 샘이 있긴 있다. 조금씩 물이 나오는 곳, 조그만 웅덩이가 생겼고, 도롱뇽 알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다. 웅덩이 바로 위에는 주인은 모르겠으나 산짐승의 집으로 쓰이고 있을 법한 작은 굴이 하나 있다. 

“먹절이 원래 있었는데 언젠가는 모르지만 빈대 때문에 다 망했다는 거예요.”
오삼탁씨는 자신이 들은 얘기를 꺼내고, 정수병씨는 임진왜란 당시 조상인 고암 정립 선생의 일화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정립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조헌 선생의 막하 장수로 출전하려 하다가 병이 나서 묵사동(먹절마을)에서 요양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더구나 정립 선생은 자신이 남긴 임진왜란 7년 기록인 ‘고암일기’에서 자신이 일본과의 전투에 나가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한편 이원 원동리 적등진전투에서 패한 일, 옥천읍 가풍리 솔티의 방어선이 무너진 일 등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 기록에서 보이는 지명이 바로 묵사동이다. 묵사동(墨寺洞)이면 우리말로는 먹절마을이다.

정립 선생의 애국혼이 숨쉬고 있는 먹절
이 묵사동에서 정립 선생은 바깥 소식을 애타게 기다린다. 아마도 조헌 선생이 이끄는 의병들이 이긴 승전보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을 것. 그러나 조헌 선생이 적등진 전투에서 패하자 이를 분통히 여겨 통곡을 하다 혼절하는 등 애절한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먹절은 그래서 고암 정립 선생의 애국혼이 묻어 있는 곳이다. 

이젠 김동식씨가 부쳤다는 논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그 곳은 아직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아마도 해발 500m 가까운 뒷산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려온 계곡이었을 것이다. 김동식(74)씨는 물론 여러 해 전까지의 일이지만 먹절재 정상 부근에 논을 직접 부쳤던 당사자다.

이 곳에서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어 물이 나고, 종자를 하기 위한 벼농사를 지었단다. 적어도 산등성이에 있는 논까지도 놀려두지 않고 부쳐야 했던 절실함을 요즘은 알까. 논 크기는 보잘것이 없고 논 귀퉁이에서 흘러나오는 샘은 이미 흙으로 메워져 있었지만 흙을 긁어내면 금방 말간 물이 차오른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 대추나무 전설이 있는 곳인 먹절재는 대추나무 전설 이외에도 언젠가부터인가 등성이 부근에 복숭아 나무도 많다. 요즘도 여름이면 복숭아를 따먹느라 많은 사람들이 올라온단다.

이유인즉 옛날 어느 아주머니가 복숭아를 바구니째 굴러뜨려 그로부터 먹절재 고개를 올라가는 길 주변엔 많은 복숭아를 낳았다는 것. 복숭아 나무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에 사람이 많이 다녔던 때가 불과 20∼30년 전임에 비추어 먹절재 전설은 다시 또 전설이 되고 있다. 

부부의 죽음·대추나무 전설

   
▲ 오삼탁씨가 왼손으로 쥔 것이 대추나무.

오삼탁씨는 지금으로부터 15년이 넘은 시절을 잘 기억해 냈다. 이 벼랑에 많은 대추나무가 있었다는 것. 이 대추나무는 서울에서, 대전에서 업자들이 달라들어 사람들에게 대추나무 묘목을 캐게 해서 갖다 팔았다고 했다. 

“대추나무 묘목을 하루 잘 캐면 당시 벌이로는 큰 돈인 5만원 벌이를 했어요. 실제로 나도 여기 와서 대추나무 묘목을 캐고 돈을 받았다니까요.”

그렇게 2∼3년 동안 먹절재의 대추나무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들었던 전설이 대추를 팔려고 고개를 올랐다가 미끄러져 죽음을 맞이한 어느 노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오씨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전설은 청마리에 살았다는 어느 노부부가 하루는 대추를 팔러 먹절재를 넘다가 잠시 쉬는 사이 대추를 담은 바구니가 굴러 대추가 흩어지자 이를 잡으려다가 급경사에 미끄러져 죽었다는 것.

이후 몇 해가 지나 대추나무가 먹절재 근방에 나기 시작해 근처를 덮었다. 대추나무 전설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군지에 나타난 대추나무 전설의 현장은 뒤바뀌어 있다. 동이면 지양리에서 청마리로 넘는 말티재가 대추나무 전설이 있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전설의 현장이 먹절재에서 말티재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 흔적을 찾기로 했다. 대추나무. 내려오면서 주변 나무를 유심히 살폈다. 3분의 2쯤 내려왔을까? 눈앞에 대추나무가 보였다. 바위 위에 뿌리내린 대추나무는 사람의 키를 훨씬 넘게 컸다. 주변을 보니 어린 묘목도 여러 그루다. 그렇게 2∼3년 동안 샅샅이 대추나무를 캐 갔어도 남은 대추나무가 있었던 것이다. 전설은 이렇게 대추나무로 현장을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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