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60] 안내면 도촌리
신마을탐방 [160] 안내면 도촌리
사람이 아름답고, 인심이 아름다운 `도가실'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3.25 00:00
  • 호수 7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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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방에서 국수잔치가 열렸다.

안내면 도촌리의 본래 이름은 ‘도가실’이다. 이곳은 옛날 옥천에서 보은을 지나는 유일한 길목에 위치해 상인들이 쉬어가거나 물건을 받아 가던 도가(都家)가 있던 마을(옥천향지,1984년)로 지명의 유래역시 이 ‘도갗에서 찾아야 할 듯 하다.

하지만 마을 노인정 앞에 서있는 마을자랑비는 지명의 유래를 달리 기록하고 있다. 보은과 옥천의 중간에 위치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마을이 그 후덕한 인심으로 이곳을 거친 이들로부터 도가 뛰어난, 혹은 도가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 ‘도가실(道嘉室)’을 얻었다는 것.

현재는 옥천 보은을 잇는 국도로 인해 사람의 왕래는 줄었지만 그래도 ‘도갗가 있던 인심 좋고 아름다운 마을 도가실은 오랜 옛 모습 그대로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도가실은 옥천에서 20분쯤 차를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 인포리를 지나 사거리에서 용촌 방향으로 좌회전, 신촌교를 지나 잠시면 도가실이다.

마을입구까지 왼쪽으로 보이는 포도밭이 마을의 주요작목을 짐작케 한다. 60가구 180명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도가실은 포도와 복숭아가 주요 작목이며 한우를 사육하는 농가도 상당수다. 이제 막 로타리 작업을 마친 논이 검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촉촉한 봄비를 기다리는 모습이 상쾌하다. 버스정류장 근처에 차를 멈추고 도가실의 봄 내음을 즐기며 마을로 올라가 본다. 

◆ ‘약한 자를 도와준다’
마을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주 오래된 듯 보이는 비석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흩어진 글귀가 선명하진 않지만 언뜻 보이는 글귀가 전종익 자선비다. 경신년 시월에 도율리 인민이 세웠다고 기록돼 있으니 80년 전 쯤일까?

자선비에 대한 호기심은 마을에서 풀어보기로 하자. 몇 걸음 옮기면 웅장한 느티나무, 바로 옆에 서있는 마을자랑비는 마을 수호신인 나무의 수령을 5백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느티나무와 그늘 아래 아담한 정자…. 이 둘 만 있으면 제아무리 더운 여름도 도가실을 넘보지 못하리라.

경로당은 차량 서 너 대를 품을 만한 공간을 끼고 느티나무 한 쪽에 서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건물 정면에 걸려 있는 도촌마을향약.

‘어른을 공경한다. 약한 자를 도와준다. 자녀를 바르게 교육한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벽한 도덕률이다. ‘약한 자를 도와준다’는 너무나 당연한 도가실의  변함없는 약속이다.

◆ “일본사람? 일본놈이지”
“무슨 이야기를 해달라는 겨? 그 지긋지긋 한 옛날이야길 왜 해?”
 “할 말이 뭐 있어! 옛날에는 일본 놈들이 다 앗아가서 못 먹고 지금은 늙어서 못 먹어.”

할머니 방에 계신 분들은 모두 네 분이다. 박성여(77), 조병추(73), 조순동(77), 강갑순(71)할머니. 모처럼 내린 비로 오늘 하루는 쉬면서 할머니 방에 모였단다. 비록 굽은 허리에 느린 걸음이지만 아직도 도가실 할머니들은 열심히 일한다.

“요즘은 삼 심으러 다녀, 금산 사람들이 월외리에서 삼밭을 하는데 장 거길 다녔어.(조순동)”
“얼마나 버셨어요?”
“하루 삼 만원 받지. 할머니들 마다 틀려, 나는 십 만원 넘게 벌었고 어떤 할머니는 그보다 못하고.”
“힘들어도 시퍼런 배추때기 서 너 장씩 쥐어 주면 피로가 확 풀려.”

할머니들은 도시에 있는 자식들에게 용돈 이야기 하기가 제일 싫다. 그래서 일감처럼 반가운 것이 없다.

“일본놈들이 사람이여? 놈들한테 안 끌려갈라고 시집을 일찍 갔는데, 숟가락하나 남기지 않고 빼앗겼지. 뜯어먹을 나물도 없었다니깐….”
“지금도 텔레비전에서 일본사람이라고 하면 화가나. 일본사람이 어디 있어? 일본놈이지.”

50년이 지나도록 누군가가 이가 갈리도록 미워 본 적이 있는가? 도가실 뿐 아니다. 이 나라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다.

◆ 전종익 자선비의 주인공 ‘전백원’씨
할머니방의 말소리에 할아버지 방에서 기별을 한다.

“점심이니 국수나 끓여 먹읍시다.”

강갑순 할머니가 재료를 준비하는 동안 전명섭(77)씨로부터 마을 앞 전종익 자선비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내 할아버지뻘인데 나도 그분을 직접 뵌 적은 없어. 내가 어렸을 적부터 있던 비석이니까 100년도 훨씬 넘었을 꺼야.”

전종익 자선비는 마을사람들이 도가실에 살았던 전종익(호적상 이름이고, 전백원씨로 불렸다고 함)씨의 선행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전백원씨가 땅이 많고 부자였어. 도지만 100섬을 걷을 정도였다고 해. 그래서 마을 살림이 힘들면 마을세금을 대납하고 가난한 이웃을 늘 도왔어. 마을에 큰 부자가 있다보니 도둑들이 끊이질 않아서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떠나면서도 자기 땅을 싼 값에 마을사람들에게 팔아 칭송을 들으셨지.”

약한 자를 돕는 다는 마을 향약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종익 자선비의 유례를 듣는 동안 할머니들이 준비한 국수가 뽀얀 김을 내며 할아버지방으로 들어왔다.

◆ 변함없이 이어지는 전통 ‘동제’
경로당을 나와 도가실 새마을지도자 이청록(47)씨를 만났다. 이씨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인삼을 재배하고 있으며 지난 99년부터 2년동안 옥천군 농민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도가실은 안내의 어느 마을보다 부지런한 마을입니다. 젊은 농민도 많고요. 45세부터 60세까지 한창 일하는 남자들만 스물다섯 명 정도입니다. 모두 근면해서 농가소득도 높은 편입니다.”

도가실의 청년들은 현재 안내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인 한영수씨가 이끄는 청우회에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한다. 그래서 24명의 도가실 청년들이 회원으로 가입 한 청우회는 마을 애·경사에 가장 먼저 앞장서는 마을의 중심축이다.

젊은 농군들이 튼튼한 기반을 닦고 있는 도가실이지만 침체된 농촌경기는 마을에서도 큰 걱정거리다.

“농촌문제는 통치권자의 의지 없이는 해결이 어려워요. 일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니까요. 예전엔 영농자금이 나와도 쓸 사람이 없어 필요한 농가가 필요한 만큼 쓸 수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너나없이 현금이 부족해 그나마 작은 돈도 조각조각 나눠 써야 합니다. 그만큼 소득침체가 심각하다는 얘기죠.”

도가실은 전통이 살아 있다. 마을 전통제식인 ‘동제’에 대해 전재필 이장에게 들었다.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정월초하루가 지나고 이틀 뒤 자정이면 어김없이 생시복덕을 보아 제주로 선정된 주민을 중심으로 동제를 치릅니다. 뒷재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마을입구 팽나무로 가서 다시 제사를 올립니다. 다음날 아침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제수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먹고요.”

예부터 나그네들로부터 덕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칭송을 얻었던 도가실, 오늘도 도가실은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의 자신감으로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젠 남편을 이해합니다"

김석호·고연화 부부

고연화(28)씨의 고향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이다. 남편 김석호(44)씨를 만나 한국에 온지 올해로 7년, 할아버지 때 떠난 한국은 이제 그녀에게 다시 고향이 됐다.

“아직도 명절에는 힘들어요. 친정이 큰집이 아니었거든요. 시댁이 큰집이다 보니 다른 맏며느리들처럼 일이 많아요.”

고씨는 하얼빈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문화 두 가지를 한국에서 체험한다. 제사와 농사가 그것이다.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니 농사일은 전혀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부부싸움도 잦았고요.”

그녀의 남편 김씨는 현재 안내면 농민회를 이끄는 회장의 직책을 맡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그녀에게 다른 농사도 아닌 ‘아스팔트 농사’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그러나 이제야 그녀는 남편을 이해한다고 한다.

“농사만으로도 힘든데 시위를 하러 다니는 모습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이 안됐어요. 하지만 한국사회를 이해하게 되고, 왜 농민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하면서 남편을 이해하게 됐어요. 정말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농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씨는 자신을 이해한다는 아내가 고맙다. 그래서 아내 고씨를 위해 내년엔 꼭 그녀와 함께 고향 하얼빈을 방문할 계획이다.

“비용이 많이 들고 바쁘다는 핑계로 처가에는 혼자만 다녀왔어요. 이제 아이 수진이(김수진.4)도 많이 자랐으니까 내년 겨울엔 꼭 아내와 함께 처가에 다녀오려 해요.”

김씨부부는 결혼하기 힘든 농촌의 현실이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한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더 이상 개개인에게 맡겨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시골이라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싫다고 하는 것이 요즘 여자들입니다. 외국에서 인연을 만나는 것도 돈이 좀 많이 드는 것이 아니고요. 군이나 농협이나 아니면 면에서라도 장가가겠다는 총각들을 위해 비행기표라도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결국 농촌을 지켜갈 사람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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