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159] 청성면 신기리
신마을탐방[159] 청성면 신기리
2개 군, 3개 면 교차하는 `새 터'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3.18 00:00
  • 호수 7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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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머니들. 왼쪽부터 황삼연, 박석순, 박정연, 박진수, 배발림, 김기돌 할머니.

신기리는 망월리와 함께 청성면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 그 경계가 보은 삼승면과 맞닿아 있다. 옥천군과 보은군이 닿은 땅이면서 동시에 청성면과 안내면, 그리고 보은 삼승면이 만나는 곳이다 보니 주민들의 농토 또한 청성면 외에도 안내면 오덕리와 삼승면 원남리에 골고루 펼쳐져 있다.

옥천에서 출발해 오덕재를 넘는 길을 택했다. 마을 앞을 지나는 국도가 닦이기 전부터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이 길은 삼승면사무소를 지나 보은 원남장을 거친다. 원남 사거리에서 우회전, 다리하나를 지나면 그때부터 옥천 땅, 청성의 새 터 신기리다.

스물 네 가구 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신기리는 대부분 주민이 사과, 배, 고추재배 등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신기(새 터)라는 마을의 이름은 1백년에 지나지 않는 마을의 짧은 역사에 유래한 것으로 마을의 기원은 10여 가구가 사금을 채취하며 거주하던 마을이 6.25를 전후해 타지에서 들어온 피난민 등으로 커지면서 ‘새 터’가 됐다. 망월리에 속해있다 독립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작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사과와 고추 등 고소득작목의 재배로 비교적 높은 소득을 거두는 농가가 많다.

마을 인구 점차 줄어
신기리를 알리는 작은 이정표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은 빈집이다. 마을 입구의 첫 집인 붉은 철문의 주택은 버려진 지 벌써 오래 된 듯 을씨년스럽다.

“한때 40호를 넘었어요. 하지만 자식들은 다 외지로 떠나고 노인들은 하나 둘 돌아가시면서 빈집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스물 네 가구 중에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 다섯 가구니 땅을 일구고 마을을 지키고 있는 집은 스무 가구 정도로 봐야죠.”

마을이장 안경호(55)씨다. 안 이장에 따르면 65세미만의 장년층은 10명에 불과하다니 노령화는 신기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듯 하다.

“몇몇 가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니까요. 그래도 마을 출향인들의 고향 사랑은 각별합니다. 향우회가 있어 마을에 상이라도 나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고향으로 달려와 일을 거드니까요. 우리 마을 향우회처럼 똘똘 뭉치는 마을도 찾기 힘들어요.”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난 후에도 매사 고향을 잊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나니 마을입구 빈집에서 받은 쓸쓸한 느낌에 다소 위안이 되는 것 같다.

부족한 ‘일손’, 가장 큰 고민
마을의 노령화와 인구의 감소는 전형적 농촌마을 신기리에 노동인구의 부족이라는 큰 골칫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논농사와 함께 4천여 평의 밭에서 사과와 배를 재배중인 홍순복(63)씨도 노동력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다.

“신기리가 사람이 귀한 마을이에요. 그래서 서로를 아끼는 미덕이 살아 있는 점도 있지만 힘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배 밭에서 해충 방제작업을 하던 홍씨가 농기계에서 내려와 고단이 찌든 장갑을 벗는다.

“모내기하고 사과 봉지 싸는 시기, 열매 솎는 시기가 겹치는데 이때가 제일 힘들어요. 동네 노인들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다른 마을에서라도 품을 얻어야 하는데, 이때가 되면 일손 부족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귀하고 노동력이 부족하다 보니 2년 전부터 마을을 찾고 있는 대학생 농활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수원 아주대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농활대는 지난해 봄, 여름, 가을 이렇게 세 번씩이나 마을을 찾아 가뭄의 단비처럼 부족한 일손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어요. 농민들한테 신세질 수 없다며 자신들이 마련해 온 쌀과 반찬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도 참 대견했고요. 젊은 학생들의 노력에 주민들 모두 고마워하고 마을에 머무는 동안 참 즐겁게 지냈습니다.”

홍씨의 배 밭을 떠나 안 이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길이 마을회관으로 이어졌다.

“신기리도 신경 좀 써줬으면...”
할머니 방에서는 여섯 분이 모여 꽃놀이(화투)가 한창이다. 판돈으로 올라온 돈은 10원짜리 동전이 몇 개, 동전보다 장기 알이 더 많다.

“아이구∼ 뭐 이런걸 찍으려구그랴! 화투한다고 잡아갈라고?” 할머니들 틈으로 은근히 한 자리 끼어들었다.

“장기 알로 화투치면 안 잡아 간데요. 할머니들은 어떻게들 지내세요?” 마을에 온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반색을 하고 반기신다.

“우리 마을이 청성에서도 제일 먼 마을이잖여. 그래서 그런지 너무들 한 것 같어. 원남만 가도 일주일에 한 번은 소독을 해준다던데, 우리 마을은 한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어.”

“한 달에 한 번이 뭐여? 난 여름에 몇 번 보고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아이구 또랑에 벌거지들이 버글버글 혀. 그라구 우리 마을이 물이 안 좋다던데 그거나 좀 알아봐.”

마을이 면소재지와 한참이 멀다보니 인접한 삼승면과 비교될 때가 많단다. 그럴 때마다 불편해서 싫은 마음보다 서운한 마음이 앞선다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무시하지 말고 우리 신기리도 신경 좀 써달라고 해요. 아마 십수 년 전처럼 보은으로 편입하자고 주민투표라도 하면 백 프로 옮긴다고 할꺼요. 백 프로...” 지방자치의 실시 후 주민이 느낀 소외감은 ‘백 프로’라는 말로 집약되는 것 같다. 신기리 주민 마음속에 이 ‘백 프로’를 채우기 위해 자치단체가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3명의 초등학생, 모두 보은으로
마을회관을 나왔다. 벌써 완연한 봄, 마을 진입로에 있는 주택에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농한기는 한참을 지났다는 생각이 든다. 골목 저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농기계소리를 따라가니 새해 농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최동설(37)씨가 못자리 평토작업으로 분주하다.

“방금 건너온 개울부터 안내면이에요. 마을 동쪽 끝으로 가면 삼승면이고요.”

최씨의 말에 무심코 건너온 작은 교량을 돌아보았지만 청성에서 안내로 넘어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마을회관에서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농사지으면서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예요. 뭣 하나 지원 좀 받아보려 해도 어떨 땐 안내면으로 가고, 또 어떨 땐 청성면으로 가야 합니다. 삼승면에 속한 땅은 뭘 해도 지원에서 뒷전이고요.”

최씨의 농지는 안내면에도 보은 삼승면에도 또 신기리 땅에도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경작면적에도 신기리의 지리적 특성이 원인이 된 불편함이었다. 잠시 일을 멈추고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최씨 곁에 아들 훈이(최훈,12)가 신기한 듯 빼꼼이 얼굴을 내민다.

“신기리는 생활권이 거의 보은이라고 봐야 합니다. 마을에 셋 있는 초등학생들이 모두 보은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요. 능월분교에 보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중학교를 보은으로 보내야 하니까 다들 보은으로 학교를 보내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

신기리를 지켜가는 몇 안되는 주민들조차 자녀 교육을 보은군에 의지하는 형편이니 옥천출신이라는 정체성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 고리가 주민복지의 영역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신기리를 나왔다.

우리 마을 `농사박사' 노종호씨

신기리 입구 새터농장의 노종호(48) 대표는 마을의 ‘농사박사’라고 불린다. 지난 85년 고단한 서울살이를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노씨는 벌써 귀농 20년째 고향 새 터의 밭을 일구고 있다.

“부모님이 힘들게 농사짓는 것이 안타까워서 돌아가실 때까지만 돕자고 아내를 설득해 내려왔는데 벌써 20년이네요.”

꿈을 안고 돌아온 고향, 그러나 열다섯 어린 나이에 떠났던 고향의 농토는 그에게 그리 만만치 않았다.

“마을 어른들한테 씨 뿌리는 법을 여쭤보면 난감한 얼굴로 ‘그걸 알아서 뿌려야지 알려 줄 것이 뭐 있냐?’고 되묻곤 하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공부하기 시작했죠. 교육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서 배우고, 비가 와 농사짓기 힘든 날에는 농사 잘한다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다니고요. 그래도 아직 농사박사는 아닌데...”

그의 뚝심은 귀농 후에도 그렇게 발휘됐다. 청년 농업인으로 성장한 그는 지난 2000년부터 2년 동안 능월농우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아내 김영옥(43)씨와 함께 고추, 사과, 배, 인삼 등 복합영농을 구현하고 있는 노씨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농민 ‘자신’이었다.

“농민 스스로가 자신의 공공의 적이 되고 있습니다. 뭐라도 하나 값이 뛴다 싶으면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결국 가격폭락을 자초하니까요. 그런 때가 농삿일하면서 제일 힘들 때죠.”

노씨는 올해 복숭아 저농약 재배에 도전한다. 청성 산두막복숭아작목회 총무를 맡고 있는 그에게 올해는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우리 작목반 50명의 회원 가운데 16명이 폐원을 신청했을 만큼 복숭아농사가 위기입니다. 그러나 친환경농업으로 고품질 복숭아 생산에 도전한다면 복숭아 농사도 꼭 힘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농촌의 미래에 자신의 삶을 투자한 노씨, 한국농업전문학교 과수과에 재학 중인 아들(노선민.21)도 같은 길을 준비하고 있다. 새터농장 노종호 대표와 그의 가족, 그리고 신기리 주민들이 미래의 한 조각을 만들고 있었다.

☞ 3월11일자 청성면 두릉리 마을탐방 중 ‘육영수 생가는 두릉리 184번지’라는 기사와 관련, 육 여사의 유족 측에서 교동리가 실제 육 여사의 출생지임을 증명하는 호적사본을 제시했습니다. 본 기사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육 여사의 생가관련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일부 주민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의도였으며 두릉리가 육 여사의 생가임을 단정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다만 육 여사가 1925년에 태어났고, 육종관씨가 교동리로 이사한 시점이 1920년대 초반이었다는 기록을 명시하지 않아 혼란을 자초한 점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과 유족 측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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