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58] 청성면 두릉리
신마을탐방 [158] 청성면 두릉리
봄을 준비하는 두릉리 사람들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3.11 00:00
  • 호수 7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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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 할머니방에서 만난 사람들. 왼쪽부터 송복동, 김혜자, 이복림, 송영연, 임은자 할머니.

한낮의 햇살은 벌써 완연한 봄이다. 안내 오덕재를 넘어 청성면 두릉리로 가는 길, 머지않아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설렌다. 두릉리는 행정구역상 능월리에 속하는 자연마을로 능월이라는 지명도 두릉의 릉과 망월마을의 월이 더해져 지어진 이름이다. 50가구 12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두릉리는 두릉댕이라는 옛 지명을 갖고 있으며 대다수의 주민이 복숭아, 사과, 포도, 배 등의 과수재배와 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둔덕산 아래 자리 잡고 망월을 마주하는 두릉, 성큼 다가온 봄을 준비하는 두릉 사람들을 만났다.

19호선 국도에서 ‘능월1구 두릉마을’-사실은 능월1리가 맞다-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접어들자 마을회관 뒤편으로 아담한 공간이 나온다. 145평 규모의 두릉마을 다목적광장은 지난 2001년 여름 준공된 공간으로 평소에는 마을주차장으로, 수확기에는 곡식을 말리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마을의 소중한 재산이다. 광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마을 안쪽 비닐하우스에서 묘판을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주민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포장 농로, 포장사업 시급
“농사지어봤자 헛일이에요. 늙은 사람들 애만 먹는 거지...”

하우스로 옮기 고추묘판에 물을 주고 있는 육동성(47)씨다. 심은 지 20일쯤 지난 고추새싹은 한껏 봄기운을 머금은 듯 푸르기 그지없지만 육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올 하반기부터는 수입쌀도 시판한다고 하대요. 나도 나락농사 짓지만 이제 농사꾼 먹을 것 짓는 이상은 일할 마음도 없어요.”

마을에서 가장 젊은 축에 드는 농민이지만 육씨에게 올 농사에 대한 큰 희망은 없는 듯 하다. 하우스 한쪽에 수확도 못한 채 썩어가고 있는 대파가 육씨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다.

“두릉리 취재를 왔으면 꼭 봐야 할 곳이 있소. 내 차를 타요.”

육씨의 하우스에 봄배추 묘판을 들고 들어온 양시태(49)씨가 기자를 보더니 대뜸 함께 가자며 자신의 트럭으로 이끈다. 양씨는 청성 산두막 사과작목반을 이끌고 있는 사과재배농이다.

“우리 마을이 어떻게 농사를 짓고 있는지 똑똑히 보세요. 둔덕산 아래 과수재배단지가 생긴지 20년이 훨씬 지났소만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으니까...”

양씨와 기자를 태운 트럭은 잠시 마을길을 지나는가 싶더니 곧바로 과수단지로 진입한다. ‘텅텅텅...쿵쿵쿵’ 트럭이 요동을 친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과며 배, 포도, 복숭아밭 사이로 난 길은 도저히 농로라고는 믿기지 않는 비포장 상태로 무엇인가를 붙잡지 않고는 도저히 똑바로 앉아 있기조차 힘들다.

“복숭아고 사과고 간에 아무리 잘생긴 놈도 밭에서 수확을 마치고 이 길을 따라 운반하고 나면 상처투성이가 돼요. 밭이 1등급 과일을 만들어도 길이 그 과일을 망쳐버리죠. 이런 마을 어디서 보셨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과수단지 사이사이로 난 농로는 어느 하나 평평한 곳이 없다. 본래 자갈이 많은 땅에 경사까지 급한 농로의 상황은 20년 이상 포장사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 마을에서 5분도 안 걸리는 보은을 가도 여기와는 딴 세상이에요. 작목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누구하나 이런 현실에 관심조차 없어요.”

트럭에서 내려 양씨의 말을 듣고 있는데 농로를 따라 마을로 내려가던 트럭 한 대가 멈춘다. 복숭아밭에서 전지작업을 마치고 내려오던 오광원(60)씨 부부다.

“트럭타고 올라오는 날은 재수 좋은 날이유. 비 조금만 와 봐요. 경운기 말고는 올라올 수조차 없거든.”

과수단지의 농로 문제는 두릉리에 넓게 분포한 육씨 문중 땅과 연관을 가진다. 일제강점기 고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살던 두릉리는 집터와 농경지 등 상당한 양의 토지가 육씨 문중 후손들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농로조차 소유자인 육씨 일가의 반대로 오랫동안 포장이 되지 못했다는 것.

두릉리 이해준 이장은 최근 농로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포장을 허락받긴 했지만 마을숙원사업으로 농로포장을 진행하자니 마을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많아 공사의 엄두를 못내고 있는 상태라고. 트럭을 타고 내려가는 길, 이번에는 과수원 곳곳에 수북하게 쌓인 묘목가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에 파쇄기도 한 대 없어요. 전지한 가지들은 농민들이 일일이 손으로 주워서 태워야지요. 없는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예요. 이 너른 과수단지에 그 흔한 퇴비사 하나 없어 밭 뚝에다 비료를 부려놓고 씁니다. 비만 오면 퇴비 쓸려 나간다고 비닐로 덮고 아주 난리를 쳐요.”

◆육영수 생가는 두릉리 184번지
스물 두 가구의 농가가 생업을 영위하는 과수원의 영농환경은 사실 참담했다. ‘주민투표를 해서라도 보은으로 편입됐으면 좋겠다’는 한 과수농가의 탄식을 뒤로하고 과수원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섰다.

“육영수 여사의 생가는 두릉리예요. 생가복원사업을 한다는 교동리는 육 여사가 태어난 곳이 아니고, 부친이 교동리에 집을 마련하자 아주 어려서 이사를 간 곳이라고 합니다.”

이장의 말을 듣고 찾은 육 여사 생가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이웃 주민에게 수소문을 하니 생가와 관련된 것은 마장리에 사는 육대근(70)씨를 찾아보란다.

“태어난 곳은 두릉리 집이 맞습니다. 태어나서 얼마 만에 교동리로 이사를 갖는지 모르지만 태어난 곳은 두릉리예요. 자라고 또 학교를 다닌 곳이 교동리 집이니 그곳을 생가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태어난 집은 두릉리에요. 작고한 집안 어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마장리에 거주하며 옥천육씨목사공파의 종중 일을 맡고 있는 육대근씨는 두릉리 184번지가 고 육 여사의 생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2007년에 완공될 교동리 육영수 생가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군 문화공보실 추복성 담당은 “두릉리가 태어난 곳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며 “사실 확인을 거쳤으며 교동리가 생가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입장이다.

◆운동기구 하나 라도 있었으면...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마을입구 회관에 이르니 할머니 방에서 흐르는 웃음소리가 참 좋다.

“면소재지가 멀다보니 농한기에는 심심해요. 쉬울 때가 많아요. 누가 일부러 그래 줄 사람은 없겠지만, 이렇게 한가할 때 한자라도 배웠으면 좋다는 생각 많이 해요.”

불쑥 할머니방을 찾은 기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는 송영연(71) 할머니회장.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들이 너무 안타깝다며 무엇이 되었든 배우고 여가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절실하단다.

“돌아다니다 보면 찜질방이다 안마기계다 해서 주민을 위해 참 좋은 시설을 갖춘 마을이 많아요. 그래서 볼 때마다 속도 상하고...”

주부 이윤순(50)씨도 또 다른 할머니들도 비슷한 아쉬움을 전한다. 두릉마을에는 없는 것도 많지만, 후덕한 마을 인심은 어느 곳 부럽지 않다. 농한기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인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과 저녁을 먹는 공동식사의 아름다운 전통도 지키고 있으며 출향인과 주민 48명으로 이루어진 고향계는 매년 5월8일 어버이날이면 총회를 열어 마을의 관심사를 논의하고 마을 어른들을 위한 정성을 모으는 훈훈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이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진짜 생가?

고 육영수씨가 태어난 집이라는 두릉리 184번지 주택. 육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교동리로 이사하기 전 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이 집은 현재 육 여사와 6촌지간인 육찬수(75)씨가 거주하고 있다.

30여년 전 이 집을 인수한 육찬수씨는 이 집이 육 여사의 생가라는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현재 교동리 육영수 생가복원사업의 추진위원이기도 한 육씨는 “육 여사가 태어난 집은 두릉리가 아니라 교동리 생가가 맞다”며 “일부 친족이 두릉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정확히 모르고 하는 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의 주택은 육찬수씨가 집을 인수하면서 기존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해준 이장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두릉리 이해준(70) 이장은 아마도 마을 농지분쟁의 마지막 증인이 될 것 같다. 분쟁의 2세대인 그의 나이가 올해로 일흔, 옥천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장 중 한 사람이다. 다행히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로 빼어난 건강을 짐작케 하는 이 이장.

두릉리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방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두릉리가 ‘빼앗긴 들’을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 후 정부의 토지개혁(유상몰수, 유상분배)으로 우리 마을에서도 소작인들이 농지를 갖게 되었지요. 고 육종관씨(육영수의 부친) 등 일가가 마을 농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일제시대 마을 구장을 보며 부와 권력을 누리던 육씨들은 해방직후엔 얼굴도 보기 힘들었으니까요.”

지금은 작고한 이 이장의 부친 역시 해방이전부터 소작해 오던 육종관씨의 땅 가운데 일부를 국가로부터 구입한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벌어진다. 마을로 돌아 온 육씨가 자신의 땅을 분배받은 일부 소작인들을 대상으로 모종의 ‘탈환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땅을 뺏긴 소작인들은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빨갱이라면 누구나 죽여도 되는 시절에 피난을 안가고 인민군과 함께 마을에 있었던 소작인들이 표적이 됐죠. 육씨 집안에 경찰을 하던 이가 있었는데 칼빈소총으로 위협해 내 부친을 포함해 9명의 도장을 받아갔어요. 용공분자라고 몰아세우면 다 끝나던 시절이에요.”

그렇게 육씨 쪽으로 넘어간 아홉 농가의 도장은 ‘토지소유권포기각서’가 되어 소작인들의 땅을 빼앗아 갔다. 국가로부터 대가를 지불하고 소유권을 넘겨받은 토지가 졸지에 옛 지주에게 돌아간 것이다. 아무리 글에 어두운 농민이라지만 가만히 당할 리 만무했다.

소작인들은 자신의 땅을 찾기 위해 법정에 섰고, 청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법원은 ‘설사 농민들이 토지소유권을 포기하는 각서를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전 지주에게는 토지에 관한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취지로 땅을 빼앗긴 소작인들의 손을 들어준다.

육씨 측의 항소로 소송이 계속되면서 소작인들이 소송사기꾼에 휘둘리기도 하는 등 두릉리 농지를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던 중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벌어진다. 육씨의 사위였던 박정희 장군이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가져간 5.16쿠데타가 벌어진 것이다. 두릉리 소작인들의 소송상대방은 이때부터 ‘최고 권력자의 장인’이 된 셈이었다.

“고등법원까지 육씨를 위해 일했던 변호사가 쿠데타 이후 대법원장이 됐습니다. 대법원에서 소작인들은 당연히 패소했고요. 그때 내 나이 20대 후반으로 한창 나이였어요. 법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법이 권력 앞에서 그렇게도 무력할 수 있구나 하고요.”

그 후 이씨는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93년 문민정부를 통해 이 사건을 진정하는 등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별다른 답변을 얻지 못한다.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을 하잖아요. 근데 대통령하나 장관 몇 사람 바로세우자고 세워질 역사가 아닙니다. 그 수많은 친일파들, 또 그들의 자손들, 아직도 우리나라 구석구석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이 살아있는 한 힘들껍니다. 안타까운 일이에요.”

마음 한구석에는 ‘이제 포기 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묻지 못했다. 그가 아직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저 두툼한 서류뭉치는 권력이, 그리고 법률가들이 이제껏 짓밟아 온 두릉리 농민들의 권리 전에 우리의 양심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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