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삶의 기쁨을 안겨주는 곳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에게는 옥천이 그런 곳이었다. 비로소 숨 쉴 틈이 생겼던 걸까. 얼굴빛에 밝고 편안한 기운이 전해졌다. 옥천에 머무르자 삶이 여유로워지고 시야는 더 넓어졌다. 옥천서 만난 물과 바람이, 풀과 구름이, 일출과 석양의 장관이 그를 행복하게 했는지 모른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평온함이 찾아오는 옥천에 매료돼 있었다. 예술의 깊이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천연염색으로 작업하는 작가’라는 수식어는 어쩐지 부족한 감이 있다. 천연염료가 되는 식물을 옥천서 채취하거나 직접 재배해 색을 만든다고 하니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면 설명이 아쉬울 법도 하다. 자연에서 채취한 나무껍질, 꽃, 풀, 열매가 작품 재료가 됐다. 작품 하나하나가 옥천이 스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위적인 화학염료로 표현해낼 수 없는, 자연을 닮은 싱그러운 천연 빛깔을 만들어 내려고 1년 내내 부단히 움직였다.
전통기법으로 다양한 색을 물들인 한지를 손으로 한 땀 한 땀 자르고 붙여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를 작품 38점으로 표현했다. 말하자면 한지에 천연염색 콜라주 기법, 여기에 백토가 가미됐다. 작가노트에 ‘달을 닮은 듯 둥그런 달항아리 곡선이 자연에서 보는 비정형의 미(美)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나왔다. 옥천에 정착한 지 5년 된 김보영(39, 읍 가화리) 작가가 지난 11월29일부터 12월10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 작품 전시를 했다. 주제는 ‘달을 담다_옥천’.
■ 출근길에 마주친 옥천 풍경
“‘달을 담다’에 달은 자연을 말해요. 달항아리 안에 자연의 이미지를 보일 듯 말 듯 담고 싶었고요. 어떤 작품에는 달항아리 안에 대청호 풍경을 넣었어요. 매일 아침 신랑이랑 읍내에서 안남에 출근할 때마다 대청호를 만나거든요. 같은 공간이라도 시간에 따라 풍경이 달리 보이는 것처럼 작가의 삶도 작업에 녹아난다고 봐요. 옥천에 정착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일상을 기록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삶과 자연의 형상을 달항아리 안에 담아봤어요.”
경기도 화성이 고향인 김보영 작가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버지를 따라 미술을 곧잘 했다. 자연스레 그림을 전공으로 삼아 동덕여대 회화과에 진학해 한국화를 전공했다. 동 대학원 석사 졸업, 박사 수료까지 마친 그는 지금까지 개인전 10회, 단체전 27회, 아트페어 6회 등에 참여했다. 옥천에서는 이번이 첫 전시다. 천연염료를 직접 채취하고, 염색한 한지를 붙여 작품을 만드는 게 회화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한다.
학부 1학년 때 천연염색 동아리에 들어간 게 계기였다. 2009년 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천연염색지도사 자격증까지 딴 그는 2010년부터 본격적인 염색 작업에 나섰다. 석사과정 당시 석사청구전 주제를 천연염색으로 잡고 2010년 동덕아트갤러리에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달항아리 시리즈는 2014년부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연과 전통’이라는 작업관을 달항아리에 담았다. 박사청구전까지 마친 그는 2018년 옥천에 들어왔다.
■ 소밥 주고, 식물도 키우고
“제가 옥천에 오기 1년 전에 신랑이 먼저 와 있었어요. 안남면 화학리에 소를 키우거든요. 저도 매일 같이 가서 소밥 주고요. 거기서 염색 작업을 했어요. 한지 붙이는 작업은 집에서 하고, 야외 염색활동은 안남에서 했는데요. 실은 이 활동 자체가 신랑이 많이 도와줘서 가능했어요. 올해는 천연염색에 관심 있는 지인들이랑 염료가 되는 식물을 직접 키우고 같이 활동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옥천군 청년동아리 지원을 받고 ‘오늘의 행복’이라는 이름의 천연염색 동아리를 했어요.”
염료가 되는 식물을 직접 기른 건 올해가 처음이었다. 재료를 사서 염색했던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족과 성취감을 느낀 김보영 작가. 화학염료는 단숨에 색을 쨍하게 내는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빠지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천연염색은 고정된 색이 아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색을 뽐내는 매력이 있다. 자연스레 바라는 느낌이라고 할까. 김 작가는 10여년 전 천연염색한 종이를 꺼내보면 색이 더 숙성되고 고급스러워진 느낌이라고 한다. 화학염색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염색 재료는 민들레, 돼지감자, 땡감, 머위, 봉선화, 쑥, 수세미, 가죽나무, 아로니아, 밤, 호두, 메리골드 등 다양하다. 모두 안남에서 채취했다. 김 작가는 쪽밭을 따로 키워 쪽을 염료로 썼다. 쪽 염색은 염료 중 색을 내기 가장 까다롭다. 염액 보관도 어렵고, 발효도 거쳐야 하고, 여러 차례 저어줘야 하는 등 과정이 꽤 복잡하다. 1년생 풀인 쪽은 파란 색소를 지녀 천연염료 중 유일하게 푸른빛을 띈다. 쪽빛하늘이라는 말이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 자연의 선물, 천연염색
쪽 염료는 예부터 고가에 거래된 귀한 염색 재료로 우리나라에서 자주 활용했다. 조선시대에 청색 염직물을 전문으로 만드는 청염장이라는 직업이 있을 정도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쪽 염색의 명맥이 끊어졌다. 외국 문물이 들어오고 화학 염료를 수입하면서 품이 많이 들어가는 천연염색 기술이 점차 사라졌다. 오늘날 천연염색은 우리 전통을 살리고, 자연 고유의 색을 환경친화적인 생산 방식으로 입힌다는 점에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김 작가는 인위적인 물질과 색에 벗어나 조금씩 느리게 변하는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작품에 담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략적인 천연염색 과정은 이렇다. 우선 차를 우리듯 뜨거운 물에 재료를 넣고 끓여 염액을 만든다. 접어놓은 종이를 염액에 넣고 꺼내서 말리면 매염을 한다. 매염은 색을 고착하는 과정인데 보통 백반, 철, 잿물 등을 매염제로 활용한다. 어떤 매염제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색깔이나 색의 진함이 달라진다. 종이는 한지 중에 얇고 질긴 순지를 썼다. 순지는 닥나무를 갈아 직접 뜬 종이인데 얇은 종이를 써야 색이 잘 입힌다고 한다. 보통 접은 종이를 뭉치로 염색하면 접었던 그 자리에 색이 진한 무늬 자국이 남는다.
“천연염색은 제 손으로 만든 색이라는 점에 의미가 커요. 반면 화학염색은 우리 몸이나 환경에 좋지 않잖아요. 이번에는 종이를 사서 썼지만, 기회가 되면 닥나무를 심어서 종이를 직접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닥나무를 쪄서 껍질을 벗기면 그게 한지 재료거든요. 제 작품에는 또 백토라는 재료를 썼어요. 도자기 만들 때 쓰는 흰색 흙인데 작품 배경에 바른 거거든요. 이 배경도 자연의 바탕이라고 봐요. 옛 조선시대 도자기를 소재로 하고, 천연염색이라는 전통 기법을 썼지만, 제 작품들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색다르게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 든든한 가족의 힘
김 작가는 일상에서 금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만나며 작품 활동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바람의 감촉을 느끼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고 있다는 소소한 깨달음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김 작가는 향후 옥천에 천연염색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연구실 겸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게 꿈이다.
올해 우리고장 청년공예인단체 ‘가온비’ 멤버로 들어갔지만 이번 전시 준비로 많은 활동을 하지 못 해 아쉬웠다는 김보영 작가. 앞으로 옥천에 있는 청년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전시할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제가 쓰는 소재나 기법이 시골에 와서 하는 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천연염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서 감사할 따름이고요. 대청호를 보고 있으면 시간에 따라 노을 지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때 마음이 벅차오른다고 할까요. 매일 지나가는 길이 즐겁더라고요. 이렇게 옥천을 벗 삼아 작품을 낸다는 게 큰 행운이지 않나 싶어요. 이번에 전시 준비하면서 남편이랑 시부모님, 가족분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천연염색한 걸 샘플로 보여주려고 전시장에 가져왔는데 같이 만들었거든요. 온 가족이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옥천에 오길 정말 잘 한 거 같아요.”
한편, 지난 10일까지 진행된 이번 전시는 2023 옥천군 문화예술창작 지원사업으로 300만원 예산을 지원받아 기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