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보여주지 않는 것.’ 사진을 찍어 와야 하는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여타 사진 동호회와는 차원이 다른 주제였다. 숙제를 안은 사람들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 봐도 색깔이 있고, 구름이 있고, 태양이 있고, 날아다니는 새들이 있는데 말이다. 사진에는 무언가 대상이 있기 마련이거늘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니. 성능 좋은 카메라에 아름다운 식물과 풍경을 담아 오는 다른 모임들과 성격이 달랐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찍어야 한다, 어떤 의미일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물의 이면’을 찍어오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저 멀리 걸어오는 어르신들의 주름진 손을 보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상상한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을 보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떠오른다. 어두컴컴한 기차역 공간 안에서 저 멀리 비추는 환한 빛을 보고 희망을 찾는다.
사진이라는 것도 어쩌면 말잔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사진작가가 거창하게 어떤 의도로 찍었다 하더라도 달리 볼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사진을 읽는 관점은 다 다를 수밖에 없고, 자기가 경험한 폭만큼 해석의 깊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사진 동호회 ‘동그라미 포토 아카데미’는 한 걸음 더 욕심을 냈다.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그 이상을 담고 싶었는지 모른다. 조금 다른 생각, 색다른 시선을 사진이라는 매체에 투영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했다.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은 사진 초보부터 길게는 5년까지 사진에 관심 있는 옥천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의 열정은 뜨거운데 사진과 카메라를 다루는 기술은 사진 전공하는 사람과 차이가 있었다. 기술은 인터넷이나 책을 찾으면 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겠지만 이들은 사진의 깊이를 채워줄 ‘길잡이’를 간절히 찾았다. 그러던 중 옥천교육도서관 맞은편에 ‘사진카페 2월’을 운영하는 서상숙 씨를 알게 됐고,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 사진카페 사장님과 인연이 되어
“동그라미가 원이잖아요. 계속 굴러가잖아요. 꺾이는 데 없이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바가 동글동글한 지구처럼 굴러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유추해 보는 거예요. 그 이름을 정한 사람이 동수 형이죠? 동수 형한테 물어봐야 해요.”
사진 동호회 ‘동그라미 포토 아카데미(이하 동그라미)’ 이름의 유래를 묻자 모임에 참여하는 이다경 씨가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12월에 만든 동그라미는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이진영 씨 그리고 김동수 씨가 사진카페 2월 손님으로 오며 가며 하다가 서상숙 씨에게 사진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자연스레 생긴 모임이다. 2주에 한 번 금요일마다 정기 모임을 하는데 서상숙 씨가 사진 주제를 정하면 이에 맞게 사진을 찍고, 모임 때 1~2시간 정도 서로 사진을 보여주며 의견을 주고받는다.
지난 4월7일 오후 6시30분 사진카페 2월에 도착하자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오기 시작했다. 이날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을 주제로 사진을 찍어 온 이다경 이재규 이진영 씨가 참여했는데 현재 동그라미 식구가 9명으로 늘었다. 회원들이 선생님으로 모시는 서상숙 씨부터 기존 회원인 김동수 씨 그리고 양금희 황은혜 이은숙 안상남 씨가 새로운 멤버로 들어왔다. 동그라미는 지난 6월20일 옥천군에서 지원하는 ‘삼삼오오 학습동아리 지원 사업’에 선정돼 모임 활동에 탄력을 받았다.
■ 옥천에 또 다른 사진 문화 만들고 싶어
동이면 지양리에 사는 이재규 씨는 2015년 옥천에 귀촌했다. 2019년 말 퇴직하고 취미생활을 찾던 중 옥천군미디어센터에서 하는 사진 수업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인에게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서상숙 씨를 소개받아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해부터 사진을 시작한 그는 이제 틈날 때마다 서상숙 씨에게 사진 조언을 구하고 있다.
“오늘처럼 수업 시간이 되면 긴장감이 있어요. 저는 주제에 관한 이해는 빠른데 그걸 사진으로 담아오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잖아요. 서 작가님은 30년 이상 사진을 한 전공자니까 배울 점이 많죠. 저희는 상업 사진도 아니고, 필름 사진을 하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작가님만이 가진 고유의 사진 느낌이 좋았고요. 그래서 이런 모임을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원하는 분들이 있으면 동행해서 옥천에 또 다른 사진 문화를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어요.”
지난해 4월부터 옥천군미디어센터 수업을 계기로 사진을 취미로 접한 이진영 씨는 읍내에서 명륜당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옥천향토사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그는 이날 사진 주제인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어렵게 다가왔다고 한다. 난해하다고 정평이 난 철학을 전공했어도 머릿속에 있는 관념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작업은 그에게 쉽지 않은 과제인 듯했다. 이진영 씨는 오는 10월 동그라미 회원들과 함께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단체전을 열 예정이라고 알렸다.
“우리 같은 초보자들이 1년간 공부한 걸 옥천에 보여드리려고요. 사진에 관해 묻고, 토론하고,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고요. 우리 작품을 보고 사진에 관심 있는 분들이 도전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고 싶었죠. 사진을 하면서 저 스스로 변화가 일어났어요. 생각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고, 더 따뜻하게 변했다고 할까요. 생각이나 시야가 더 넓어진 게 큰 변화인데 서 작가님의 지대한 공이 있었죠.”
■ 따로 또 같이 사진으로 어깨동무
취미생활로 미술을 오래 한 이다경 씨는 사진을 햇수로 5년 했다. 평소 식물을 좋아한 그는 예쁜 꽃을 보면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게 취미였는데 만족스러운 사진을 건지지 못 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꽃을 예쁘게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잡았는데 남들이 찍은 사진을 보며 ‘어떻게 하면 잘 찍을까’ 고민하며 도전 의식을 키웠다고. 한때 이틀에 한 번 출사하고, 하루에 1천500컷 이상 찍을 만큼 시간과 돈을 투자한 그는 서상숙 작가를 만나 또 다른 사진 세계를 접했다.
“지금은 열심히 하고 행복해하면서 이 작업을 하지만 어쩌면 옥천에 사진 판도를 바꾸지 않을까 싶어요. (서상숙) 선생님은 과제 하나 딱 던져주면 알아서 찾아보라고 해요. 각자 따로 가는 거죠. 우리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렇게 찍어라’ 그런 게 없어요. 단체 출사도 다녀왔지만 가서도 따로 해요. ‘어디 가면 이런 스타일의 사진이 나오니까 거기 가서 찍어라.’ 그런 게 아니에요. 음식을 해서 입에 넣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음식 재료만 던져주는 거죠. 배추 하나 주고 김치 담그라는 식인데 저는 이런 수업이 좋아요.”
이 세 사람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서상숙 씨를 만나 사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더 깊어졌다고 말이다. 옆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서상숙 씨는 과한 칭찬이라 느꼈는지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다. 그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이 있는 모임을 이끈다는 건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30년 이상 사진을 했어도 부담인 모양이다. 살아온 이력도, 현재 하는 일도 다 다른 회원들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기술적인 것들은 여기 선생님들이 다 알아서 공부해 오셔요. 처음에는 부담돼서 올해까지만 하고 안 하겠다고 했는데 혼났어요. 너무 열심히들 하시니까 제 딴에는 부담으로 다가오죠. 가르치는 제 입장에서는 따로 공부해야 하니까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진을 찍는 동기가 생기는 면도 있고요.”
■ 대나무의 마디가 생기는 것처럼
지난 4월21일 모임부터 합류한 동그라미 회원 양금희 씨는 말한다. 3~4년 전부터 사진을 배운 뒤로 주변 환경이나 동·식물과 같은 작은 존재를 더 자세히 보는 습관이 생겼고, 주변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한 사진을 지인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처럼 동그라미 회원들은 사진을 찍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겼고, 행복해했다. 점차 자기만의 사진 세계를 정립해 가는 과정으로 보였다. 앞으로 동그라미 모임이 어떻게 나아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동그라미 모임 회원이 한 명, 두 명 늘어나는 모습에서 보이듯 사진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뻗어나가 옥천만의 또 다른 사진 세계를 확장해 나갈지 모를 일이다.
30년 넘게 사진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전문가, 그리고 사진을 배우는 단계에 있는 초심자들이 함께 걸어가는 동그라미 포토 아카데미. 삶의 경험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이들이 그려나갈 동그라미가 앞으로 더 멋진 모임으로 커 나가지 않을까 기대된다. 동그라미 이진영 회장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우리가 찍은 게 잘 찍었는지 모를 때 모임에서 같이 이야기하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에요. 마치 대나무의 마디가 딱 생기는 것처럼요. 아까 다경님이 얘기했듯이 사진은 예술이잖아요.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부분이 있잖아요. 규범적이고 정형화한 것들을 무너뜨리는 게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진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니까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기도가 따로 없고, 명상이 따로 없고, 힐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