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실의 거울이다. 역사의 교훈을 거부하는 민족이 번영을 희구하는 것은 뜬구름 잡기다. 역사의 교훈은 그래서 위대한 반면교사다. 첨단시대를 걷고 있다고 자부하는 금세기의 알량한 위정자들에게도 그래서 유효하다.
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오기열전」의 내용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병법(兵法) 하면 ‘손자(孫子)’와 ‘오기(吳起)’를 꼽는다. 그 「오기열전」을 따라가 보자. 오기는 장수가 되자 천한 신분의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침상도 물론 같은 것을 사용했다. 한 병사가 종기가 생겼다. 그때 오기가 그 병사의 고름을 빨아 주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는 소리 내 울었다. 어떤 사람이 그리 슬피 우는 연유를 물었다.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예전엔 오공(吳公)께서 그 애의 아버지 종기를 빨아 주더니, 남편은 자신은 돌보지 않고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었다. 오공이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니, 이 아이도 아버지처럼 죽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서럽게 우는 것이다.”
위(魏)나라 문후(文侯)는 오기가 병법뿐 아니라 청렴하고 공정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고, 서하(西河) 태수로 삼아 진(秦)나라와 한(韓)나라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문후가 죽은 뒤에 오기는 그의 아들 무후(武侯)를 섬겼다. 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를 내려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오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름답구나, 산천의 견고함이여! 이는 나라의 보배로구나!”
이에 오기는 말했다. “하나라 걸왕(桀王)이 살던 곳은 황하와 제수(濟水)를 왼쪽에 끼고, 태산과 화산(華山)이 오른쪽에 있으며, 남쪽에는 용문산(龍門山)이 있고 양장이 북쪽에 있지만, 어진 정치를 베풀지 않아 은나라의 탕(湯) 임금에게 내쫓겼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것은 임금의 덕이지, 험난한 지형이 아닙니다.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 나라의 보배는 천하 명산과 풍광 좋은 호수가 아니다. 임금이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정치, 이것이 바로 위정자의 덕행이다. 오기가 왜 병사의 곪은 종기를 빨아 주었을까. 조조는 또 왜, 관우를 위해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의리를 아끼지 않았을까.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회남자』에는 ‘해불양수(海不讓水)’란 글이 있다. 바다가 바다인 연유는 썩은 물, 맑은 물 가리지 않고 포용함에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누리는 최첨단 문명 시대와 역행하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왕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 그러면서 권력자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하려 한다. 그러나 너희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 예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이것이 하늘의 가르침이요, 위정자들이 추구해야 할 치도의 길이다. 국민 위에 오르고자 할 때는 반드시 말로써 자신을 낮추고, 국민 앞에 서고자 할 때는 반드시 몸을 뒤에 두라고 말씀하셨다. 옛 군왕들이 자신을 가리켜 과인(寡人)이라 부른 연유다.
다음은 『장자』의 「인간세」편,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우화이다. 거백옥이 말했다. “당신은 사마귀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화가 치밀어 팔뚝을 휘두르며 수레와 맞섰답니다. 제 힘으로 맞설 수 없음을 몰랐던 게지요. 이는 저만 잘난 줄 알았다. 조심하고 경계해야 함에도 제 자랑만 늘어놓고, 제 잘난 맛에 세상을 향해 팔뚝을 걷어붙이고, 제 힘 자랑을 했다.”
공자가 군자라 칭했던 위나라 대부 거백옥이 안합이라는 노나라의 현인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위나라 영공의 태자는 천품이 박덕하고 남의 허물만 알고 자기 허물은 모르는 위인이다. 그가 하는 대로 버려두면 나라가 위태롭고, 법대로 보필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런 태자를 보좌하러 가면서 거백옥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거백옥은 안합에게 사마귀 이야기를 하였다.
수레는 세상사 국민의 마음이다. 사마귀는 제 생각이 옳다면 국민에게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강요하는 위정자의 군상이다. 제 알량한 힘만 믿고 백성들 알기를 개, 돼지 취급을 하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삿대질하는 위인이다. 군왕이라고 자기 뜻대로 세상사를 요리하겠다는 생각은 편협된 인간이 낳은 오만함의 극치다.
겸허할 줄 모르는 사마귀라는 군상이 수레 앞에 대항한 결과는 자명한 일이다. 고로 진정한 마음으로 국민을 대하는 위정자는, 항시 살얼음판을 걷는 자세로 행동해야 한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다가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사마귀 신세가 되지 말라고, 지금 비틀고 비틀어서 장자는 후세의 위정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살림살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자의 우화다.
새로운 통치자가 부임했다. 어언 10여 개월이 지났다.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문밖을 나가지 않고 천하를 알며, 창문으로 엿보지 않고 하늘의 가르침은 알 수 있느니라.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그 아는 바는 점점 적어진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방증의 말씀으로 나는 이해를 한다. 묘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고 벌어진다. 그분의 뜻대로 움직였고 국민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과거와 현대사의 흔적이 오롯하게 보존된 민족의 전당이요, 숨결이 간직된 현대 정치사의 전당은 하루아침에 놀이터로 전락하였다.
전 국민의 귀를 우롱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비일비재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우기는 비서진의 작태는 눈꼴사나운, 국민을 기만하는 광대들의 사기극이었다. 이것이 현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눈높이다. 옛 절대군주의 통치하에서도 벌어지지 않던 일들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곁에서 곡학아세로 아부를 일삼는 ‘십상시’들의 행태는 불쌍하다 못해 가증스럽다.
또다시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보라,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국민을 대하는지를 똑똑히 목도했지 않았는가. 이젠 정부에 그 무엇을 바랄 필요가 있을까. 국민 알기를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정부의 앞날은 논할 가치도 없다. 좋다. 정부와 지자체, 그 어느 위정자에게도 책임은 없다. 누굴 원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 애들이 도심 한복판을 걷다가 그냥 깔려 죽었다. 길을 가다가 그냥 죽은 것이다…….”
이것이 찾아가는 복지강국을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진정성 없는 사과는 두 번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요, 죽이는 작태다. 그러하거늘 그것을 굳이 애걸할 필요가 있을까. 가라. 각자도생하는 길이 현 정권에서 생존하는 비결이요,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다.
“장관님, 훌륭하십니다. 그 좋은 직 오래오래 유지하시고, 토끼 같은 자식들하고 백년해로하시길….”
폐부를 찌르는 이 함성이, 현 정권을 향한 정확한 민심이다. 이 소리가 필자의 환청임을 믿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