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랴 거기서 봐”
어머니는 막걸리 친구들과 다음날 점심 약속을 하고 계셨다. 아직은 6학년인 새댁들과 읍내에서 셋이 만나 서로 돌아가면서 지갑을 열고 막걸리 한잔으로 심심함을 달래신다고 젊은 아낙들이 나를 끼워줘서 고맙다는 말도 빼놓지 않으셨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쏙쏙 꺼내면서 집 얻으러 다니느라 오밤중에 산 넘고 물 건너 고생한 얘기를 들려주시면서 들숨과 날숨을 연거푸 쉬고 계셨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었더니 지금까지 잘살아 온 것 같다고 웃음으로 화답을 해주신다.
■ 발끝에 밟히던 시체들, 피란길의 충격
6 25때 일곱 여덟 살 이었는데 고향 보은에서 상주까지 피란 가느라 보따리 하나씩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아후 말을 할 수가 없어. 난리난리 그런 난리가 없어. 겨울에 피란길이 얼마나 추워? 발끝에 밟히던 시체들, 냇물에 둥둥 떠내려가던 돼지사체들. 어린 나이에 죽음의 현장을 여과 없이 코앞에서 직면하는 살얼음판 같던 시절, 그 시절도 견뎌낸 성장통 덕분인지 우리는 살면서 고단한 통과의례를 잘도 버텨냈다. 여든이 넘으니 인생길에서 문리(文理)가 트여 우리 노인네들은 세상의 진리를 학교 공부와 상관없이 터득했다.
■ 열여덟 살, 백화점 물 좀 먹었지
작은 아버지가 나를 데려다가 공부시켜준다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집으로 갔다. 작은 집은 잘사는 집이라 나는 초등학교때 부터 밥값 하느라 그 집 애기도 보고 집안일도 거들면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청주여중에 다니다가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래도 여중 다니던 기억이 머릿속에 있으니 큰 추억이다.
백화점에 있을 때 보따리 장사 보부상 할매들이 나한테만 와서 물건을 주섬주섬 갖다놓고 “아가씨 이것 좀 끼어 넣고 팔아줘” 하더라고 내가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때라 순진해보여서 그랬을거야. 나는 우리 엄마가 가난해서 보부상 할매들도 가난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엄마 생각이 나서 슬쩍 슬쩍 물건을 끼워서 진열해주기도 했어. 동변상련이라고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 먹고 살겠다고 애쓰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 눈치껏 할매들 물건을 끼워서 팔아줬지. 순전히 우리 엄마 생각해서 그랬던거야.
■ 시댁으로 호적을 옮기다, 뒷모습 둔둑했던 남편
스물한 살에 총각네 잘산다고 해서 시집와 봤더니 다 팔아 잡숫고 빈털터리였다. 시댁 동네에서 김주사댁이라고 하면 부잣집으로 소문났지만 옛말이더라고. 처음 선을 본 날은 우리 영감이 양복입고 왔는데 뒷모습이 둔둑하고 듬직해보였다. 살아보니 천하의 양반이야. 스물한 살에 첫눈에 보면서 듬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6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생전 말수가 없고 나 하자는 대로 하는 분이었다. 군청 산림과에 다녔는데 그 때는 산림과면 최고 끗발이 좋은 과였다. 결혼할 때는 면서기로 시작했다. 나는 21살, 남편은 24살, 신랑 각시가 되고 시집 와서 종종 걸음으로 살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 어머니가 “새아가 너가 밥해먹어라” 하시며 됫박을 나한테 맡기셨다.
■ 조카들까지 돌보던 새댁, 보따리 장사로 살림을 보태다
남편은 끗발 좋은 산림과에 있었지만 교과서 같은 양반이라 술 사주면 술 받아먹는 정도는 했지만 눈먼 돈 한번 챙겨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은 낭구(나무)하는 게 돈 벌이였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감독하는 남편한테 막걸리를 잔뜩 먹여서 남편이 자전거타고 오다 저수지에 빠져서 우리 영감님이 물귀신에 끌려가다가 겨우 살아난 일들도 있었다. 휴... 십 년 감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잘 참고 성실하게 근무해서 정년퇴직까지 깨끗하게 공무원으로 마감했다.
내가 장사를 하게 된 건 시부모님 두 분에 우리 애들, 거기에 조카들을 키울 수밖에 없던 안쓰러운 사연이 있었다. 우리 친정 올케가 일찍 세상 떠나고 친정엄마도 일찍 돌아가셔서 그 집 조카들을 다 키울 수가 없어서 둘을 우리가 보살피게 되었다. 애들을 고아원에는 보낼 수 없어서 둘은 다른 집에 보내고 둘을 데리고 왔다. 시어머니께
“어머니 조카들이 불쌍해서 어째요”
말씀드리니 어머님이 두말 않고
“데려와라”
하셔서 같이 살게 되었다. 참으로 인정 많은 양반이셨다. 어찌나 고마운지 어머니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점잖은 분들이셨고 돌아가실 때 선산에 모시러 상여 뒤를 따를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었다. 요령소리에 묻혀서 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 인품 지키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알기에 떠나보내는 길이 애처롭고 가슴이 저렸다. 열 식구가 살려니 내가 보따리 장사라도 시작했어야 했다. 남편 월급봉투만 보고 살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쓰던 가계부가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여 50년 묵은 가보가 되었다.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던 때였다.
■ 우리 부부 夫唱婦隨(부창부수)이야기 한 소절
여러 식구가 살아야 하다 보니 세 얻기도 쉽지 않았다. 셋 방 3만원을 얻으려고 곗돈을 부었다. 전세 3만원, 그때 남편월급이 4,500원이었다. 그때 곗돈이 500원인가? 곗돈을 타서 우리 영감님 보고
“그 돈 가져다가 방 얻어요”
하면서 계약하라고 돈을 줬다. 그런데 아 글쎄 다음날 기막힌 일이 있었다. 남편이 방 얻을 곗돈을 쓰리를 맞았다. 소매치기를 그때는 쓰리꾼이라고 불렀다. 내가 남편보고
“여보 계약 했어요? ”
했더니 남편이 말을 안하고 양복 주머니를 보여주었는데 아이고 주머니에 쭉 그어놓은 칼자국이 있잖아. 나도 그 꼴을 보고 기가 막혔지만 어쩌겠어.
“아이고 쓰리 맞았네” 라고 지나가듯이 한마디 던졌다.
남편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 것인가. 나보다 몇 갑절이나. 거기에 내가 불난데 부채질 하듯이 쏘아댄들 사라진 돈이 돌아올 것도 아니며 남편도 더 속이 상하고 나도 부아가 더 치밀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저 무심한 듯 쓰리 맞았네 하고 말았더니 우리 부부는 그날의 일을 잊었다.
■ 휴...문패에 남편 이름을 달기까지
전세로 살다가 우리 집을 가질 마땅한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있어야지. 할 수없이 친척들 신세를 져야 되서 막내 작은 아버지에게 부탁하려고 길을 나섰다. 그때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는데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묘금리 어디쯤인데 겨울 동짓달이라 캄캄하더라고. 날은 왜 그리 추운지...우리 막내가 젖 먹을 때라 젖을 물려야 하는데 젖이 퉁퉁 불었어. 날은 춥고 초행길이라 울적하긴 했지. 그런데 그때는 그런 마음도 사치야. 빨리 작은 아버지를 뵙고 집 살 돈을 빌리는 게 내 살길이었어.
동네에서 여기저기 해매는 데 초롱불이 반짝이는 집이 보여서 찾아들어갔지. 할아버지랑 손자로 보이는 두 이가 가마니를 짜고 있었어. 이 00동네 교장선생님 사택 찾는다고 했더니
“이 아줌마 모시고 그 집 찾아드려라” 하시는거야.
청년이 호롱불을 들고 첩첩산중을 넘어 작은 아버지 집을 찾아갔어. 그런데 세상에 가도가도 얼마나 산이 깊은지 말도 못해 겨우겨우 산 넘고 작은집을 찾았어.
작은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셔서 거기 구판장에 들러서 막걸리 한 병 들고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갔지. 작은 아버지가 그 밤에 내가 왔으니 깜짝 놀라서
“아니 아가야 이 밤중에 웬일이냐”
그래서 저간의 사정 이야기를 했지. 그랬더니 작은 어머니보고 융통해오라고 하셔서 작은 어머니가 돈 5천원을 빌려주셨어. 그 밤에 불쑥 찾아가서 돈을 빌릴 수도 있고 은인이지.
나는 빨리 갚는다고 성급히 말하기보다 곗돈 부어서 갚겠다고 1-2년 후가 될 수도 있다고 딱 부러지게 솔직히 말씀드렸어. 약속을 못 지키면 작은 아버지께 불손한 상황을 만드는 거라 확실하게 말하는 게 필요했지. 내 성격이었어.
작은 아버지가
“나 같으면 안 받아도 되는데 작은 엄니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빌려주시는 것만도 황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나는 돌아오는 길 너무 좋아서 그 칠흑 같은 밤도 두렵지 않았다. 글쎄, 여느 아낙 같으면 그 고생을 하고 젖이 퉁퉁 부운채로 돈을 빌려나오는 발걸음이 서글플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고맙고 신났다. 힘들게 어렵사리 돈을 얻었지만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우리 식구들 눈치안보고 살 수 있다. 젊은데 뭘 해서든 돈은 갚으면 된다. 뭐가 걱정인가. 열심히 살면 되지...너무 좋았다. 그때는 마음이 힘든 것 보다 퉁퉁 불은 젖몸살이 더 아팠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이 밤새 막내를 돌보느라 보리쌀 뜨물에 사카린 타서 밤새 먹이셨다. 인품 좋은 어머니는
“갓난쟁이를 두고 젖 짜는데 얼마나 고생했니 시집 잘 못 와서 고생해서 어쩌니.”
어머니의 그 말씀 한마디에 고단했던 발걸음이 다 녹아내렸다. 우리는 곧장 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 집에서 둘째가
“할머니 응가는 어디서 해?”
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우리 새끼 아무데나 눠도 돼. 니 맘대로 눠”
하시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셨다. 애들 데리고 셋방살이 할 때 아이들이 똥오줌 누는 것도 눈치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둘째가 할머니한테 똥 어디서 누냐고 물을 때 우리 어머니 억장이 무너졌나보다. 어휴 그 말을 다 어디다 해.
나는 장사하고 남편이 봉급 타오면 곗돈 넣고 시골이라 나가면 채소며 고추도 주고 인심이 좋을 때라 허리띠 꽉 졸라매면 돈이 차곡차곡 모였다. 그래서 가계부를 50년째 쓰고 있다.
내 속옷 한번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빨랫줄에 널린 축 늘어진 남편 메리야스 중에 하나는 내가 입던 것 이었다. 그래도 아침마다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은 먹이고 입히는 거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나를 잠시 잊기로 했다. 돈을 모을 때는 집 짓는 것 같았다. 맞지. 집 살돈 빌려온 돈이라 집 짓는 거랑 다름없었다. 고단해도 힘이 나던 때다.
■ 다시 청춘인 시골할매의 하루
영감님을 3년 전에 보내고 처음에는 적적하고 쓸쓸하데. 그래도 애들이 수시로 와서 나를 챙겨주면서 위로가 됐어. 그런데 어차피 인생이 둘이 살다 하나가 먼저 가는 건 자연의 이치라 이제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동네 동상들이랑 막걸리 한잔 씩 하면서 유유자적이네.
100세 시대라니 여든이 넘은 나는 인생의 8할을 넘게 살았다. 겨울이라고 한들 아니라고 손사래를 저을 수도 없다.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길었는데 우찌 80년은 후루룩 지나왔다.
엊그제 여중 다니던 계집아이였는데 문패에 나란히 같이 섰던 남편이름은 먼저 가고 나만 남았다. 덧없어 보여도 지난 세월 속에서 사랑하며 행복에 젖고 슬픔에도 잠겨보았다.
수많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골 깊은 주름은 훈장처럼 보이고 아직도 영민한 눈매, 입가의 미소는 여전하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랄까. 거울 앞에선 내가 부끄럽지 않다. 햇살에 반짝거리던 단풍잎들이 한 바탕 비를 맞더니 오히려 곱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낙엽 되기 전 절정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도 한 겨울이 아닌 만추의 한 가운데 섰다고 자부하련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때, 바로 지금이다.
어머님전 상서
집 뒤뜰에 가보면 언제나 장독대에 놓여진 정안수를 보면 울컥해집니다. 자나 깨나 자식들 잘 되라고 정안수 떠놓고 기도하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어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기도 덕분에 저는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기고 지금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행군하다 절벽에서 미끄러져서 낭떠러지로 떨어졌는데 천운으로 통나무가 가로질러 놓여져 있어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천운도 만났습니다. 3년 전 대장암 수술 받고 지금도 회복중 이지만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병, 모두 놀랐지만
잘 치료 받고 현재 건강하게 잘 살아있는 것도 어머님이 간절히 기도드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명의 위기가 왔을 때 구해주신 분은 어머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뒤뜰의 정안수가 저를 살리고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 얼굴에 주름이 자꾸 깊어져서 제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있어주신다면 바랄게 없습니다. 아픈데 있으면 숨기지 말고 얼른 말씀만 해 주세요. 저희들이 바로 고쳐드릴게요. 어머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2022년 깊은 가을날,
둘째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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